235화 자네는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건가?
한참을 씩씩대던 이정훈 회장은 잠시 숨을 고른 뒤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미친놈이 신용대출까지 받았다고 하더라. 내가 준 집을 가지고 담보대출도 받고…… 아니 이 미친놈. 차라리 돈이 필요했으면 나한테 이야기를 할 것이지. 대출은 왜 받아? 천하에 기풍 자식이 은행에 왜 아쉬운 말을 왜 하냐 이 말이야.”
무척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다 가지고 가. 기풍증권의 자산운용 파트는 전적으로 세이지에 맡길 테니까 알아서 운용하도록 해.”
“괜찮겠습니까?”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어차피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거니까. 지금 기풍에 그 돈 남겨 놓았다가는 그놈이 거기에까지 손을 대려 할지도 몰라.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가지고 가.”
한진영은 이성우가 이정훈에게 신뢰를 모두 잃은 것을 확인하고 잠시 고개 숙여 미소 지었다.
지금이라면 기풍증권 분할을 확실하게 이성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더하여 기풍증권의 자산운용 파트까지 한진영에게 얹어주고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모두 넘어올 것들이지만 그 시간이 빨리 당겨진 것에 한진영으로서는 나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에 한진영은 웃고 있던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정훈 회장을 향해 자기가 이곳에 온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연락받으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기풍증권의 분할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씩씩대던 이정훈 회장은 그제야 생각이 떠올랐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도 들었네. 자네가 분할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보아 지금이 그 시점이라는 이야기겠지?”
“네. 딱 알맞은 시점입니다.”
한진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정훈 회장에게 숨 고를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에서였다.
이정훈 회장도 한진영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이성우 때문에 치밀어 올랐던 흥분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안색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가의 안정세로 이익이 오를 것이 충분히 예상됩니다. 기풍증권의 인수 후에 빠르게 안정화 작업에 성공한 것도 플러스 요인이고요. 기풍을 바라보는 시각이 호의적인 시기입니다.”
“이때 기업 분할을 하자?”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분할 방법은? 당연히 인적분할이겠지?”
한진영이 새삼스러운 얼굴 이정훈 회장을 바라봤다.
이정훈 회장은 자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왜 그러나?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보지?”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생각보다 인간적이신 분 같습니다.”
“인간적이다? 무슨 뜻이지?”
“제가 분할을 이야기하자 바로 인적분할을 말씀하셔서 말입니다. 저는 당연히 물적분할을 생각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의외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물적분할이 내 입에서 나올 줄 알았다고? 어째서? 설마 자네는 지금 물적분할을 이야기하는 건가?”
“네. 저는 물적분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려는 거냐고 말하려던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정말 물적분할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당연합니다. 인적분할을 하게 되면 기존 주주들과 새로 분할하는 기업의 지분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래서는 계산이 맞지 않지요.”
“계산이 맞는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기존 주주들이 가만히 있겠어?”
“가만히 있지 않으면요?”
“이건…… 이건…….”
생각도 못 한 이야기였는지 이정훈 회장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인적분할은 기업을 분리할 때 신설법인의 주식을 모회사의 주주들과 같은 비율로 배분하는 분할 방식이었다.
반면, 물적분할은 기업을 분리할 때 신설법인의 주식을 모두 모회사가 보유하는 분할 방식이었다.
병렬 구조의 수평적 분할 방법인 인적분할 방식에 비해 물적분할은 분리할 사업부의 자회사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는 수직적 분할 방법이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물적분할이 모든 면에서 나은 방법이지만 기존 주주들의 반발을 피할 수 없다는 단점이 담겨 있었다.
이정훈 회장은 바로 기존 주주들의 반발을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한진영은 혼란스러운 이정훈 회장에게 그가 지난 시절 경험했던 기풍철강의 분할 형태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기존 기풍철강은 기풍홀딩스로 이름을 바꾸고 물적분할로 철강 분야와 자원개발 분야인 기풍자원. 그리고 기존 자회사였던 기풍증권을 기풍홀딩스 산하의 자회사로 나누어 분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거기에 더해 상품중개업을 진행하고 있는 기풍인터내셔널 또한 분할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사업부를 기풍철강의 자회사로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기풍철강 자체를 지주사 아래에 두겠다는 것인가?”
“맞습니다.”
이정훈 회장은 충격을 받은 듯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권수형 부사장의 지휘로 분할 작업에 들어가 여러 차례 보고를 받았단 이정훈 회장이었다.
비대해진 기풍철강의 몸집을 나누어야 한다는 공감대와 승계작업을 위해서도 분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풍철강은 어떤 방법이 가장 나은 방법인지 오랜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진영이 말한 방법은 검토조차 하지 않았던 방법이었다.
기풍철강 아래 사업부들을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기풍철강을 홀딩스로 바꾸어 철강 분야를 물적분할 한다는 방법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가 경험했던 지난 세월에서 이런 방법의 분할은 몇 년에 걸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온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류의 방법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걸 한진영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었고 이정훈 회장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방법에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한진영은 벌써 걱정하는 이정훈 회장의 마음을 달래줬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소액주주들이 반발하겠지만 회장님을 비롯한 대주주들과 국민연금이 동의한다면 무리 없이 통과될 겁니다.”
“언론의 질타는?”
“그거야말로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언론에 별다른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요.”
“어째서 그들이 알아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그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야말로 꼬투리를 잡으면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는 놈들인데?”
“그거야 자기네들 이득과 관련이 없을 때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지요. 긍정적인 기사를 써준 곳에 전면광고를 두어 번 실어주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알아서 꼬리를 흔들며 좋은 기사를 앞다퉈 쓰려고 할 테니까요.”
“하하.”
이정훈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언론의 생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한진영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이정훈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을 향해 그의 걱정을 덜어줄 만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언론이 아무리 호의적이라고 해도 주주들이 반발한다면 그것만큼 불편한 일이 없겠지요.”
“그래. 나는 그게 불편해. 아무리 소액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회사의 주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리고 소액주주는 표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불편해. 소액주주들의 피해까지 눈감은 채 사업을 하고 싶지는 않아.”
한진영은 생각보다 양심적인 이정훈 회장의 모습이 의외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액주주들의 이권까지 다 챙겨주며 소액주주들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는 이 시대의 참된 경영인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남들의 시선을 불편해하며 욕을 먹는 것을 싫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의 걱정을 덜어줄 만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소액주주들이 불만이 없게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소액주주들이 불만이 없게?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가능하니까 물적분할을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잔뜩 구름 껴있던 이정훈 회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게 무언가? 어떻게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어?”
“간단합니다. 소액주주들이 기뻐할 만한 일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물적분할로 인해 훼손되는 가치를 보전시켜 주면 되는 겁니다.”
“소액주주들이 기뻐할 만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잔뜩 기대한 이정훈 회장에게 한진영이 차분히 방법을 이야기했다.
“조만간 대한정유에서 대규모 사업 계획이 발표될 겁니다.”
“대규모 사업 계획?”
갑자기 왜 대한정유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게는 이정훈 회장은 가만히 한진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에게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한정유는 2차전지를 본격적으로 팔아먹을 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공장을 새롭게 짓고 공격적으로 투자를 할 거라는 발표를 할 겁니다. 거기에 맞춰 기풍철강도 한 가지 발표를 하십시오.”
“거기에 맞춰 우리가? 우리가 무슨 발표를 해?”
“자원개발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다고 발표하면 됩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하고 있는 것이니 발표하기 더 좋지요. 꾸며낼 필요 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하면 될 테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수긍이 갔던지 이정훈 회장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하는 게 아니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이게 소액주주와 무슨 상관인가?”
이정훈 회장은 점차 한진영의 말에 빠져들었다.
생각도 못 한 이야기와 함께 이어진 이야기들은 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진영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정훈 회장을 향해 설명했다.
“대규모 투자 발표. 그게 대한정유의 사업과 연관이 있다는 뉘앙스를 슬쩍 흘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한진영의 말에 이정훈 회장이 무릎을 쳤다.
“그래. 그렇게 된다면 주가 상승이 나오겠구먼그래. 대한정유가 실행하는 사업에 우리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하하하. 그래. 그게 발표가 나오면 물적분할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 있겠어. 그리고 물적분할을 하는 충분한 명분도 될 테고 말이야.”
이정훈 회장이 만족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에게 발표로 인한 이득 한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발표를 통해 물적분할의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게 무언가?”
“그룹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룹의 지배력 강화?”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물적분할이기 때문에 지배력이 약화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기대하고 물적분할을 진행하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과 같이 지배력을 강화하기 좋은 타이밍을 놓칠 이유가 없습니다. 다다익선이라고 지배력 강화는 강할수록 좋은 일이니까요.”
한진영은 잠시 입술에 침을 바른 뒤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지배력 강화는 승계작업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배력 강화가 승계작업과 연관되어 있다? 허허. 도대체 자네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감탄사만 나오는구먼. 기업 분할을 이야기하더니 물적분할을 이야기하고 이제는 승계작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도대체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인가?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거야?”
이정훈 회장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두 따로따로 진행될 것 같은 이야기를 한데 묶어 진행하려 하는 한진영의 계획에 감탄 이상을 표현할 길이 없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입을 벌리고 있는 이정훈 회장을 향해 승계작업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투자에는 항상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자금 투입이지요.”
“그렇지.”
“그 자금 투입을 유상증자로 진행하는 겁니다. 3자 배정 유상증자를 통하여 자금 수혈을 한다고 발표하는 거지요. 대규모 투자가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방법에는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회장님께서 이사들만 잘 설득해서 이사회만 통과시켜주시면 그 이후는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이사회 통과와 3자 배정은 문제 될 게 없어. 자네 말대로 그건 대규모 투자에 따라오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도대체 그게 승계작업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가?”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의 질문에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꽤 시끄러웠던 승계 절차였지만 기풍철강은 이 방법을 통해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들에게 물려주게 만들어야지.’
지난 시절 기풍철강은 기업을 딸에게 물려주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한진영이 아들인 이성우에게 물려주게 만들려 했다.
한진영은 기풍철강이 진행했던 방법에 몇 가지를 추가하여 이정훈에게 이야기했다.
“자금을 투입하여 3자 배정을 받을 곳과 계약을 하나 맺는 겁니다.”
“계약?”
“네. 5년 뒤에 배정받은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계약 말입니다. 그리고 매각하는 곳은 이유정 본부장 또는 이성우 사장으로 명시를 하는 겁니다.”
“하하. 하하하. 이 자식.”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웃음을 짧게 끊어 흘렸다.
한진영은 이정훈이 보여주는 모습이 감탄을 넘어 찬사를 보여주는 것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이정훈은 당장에라도 한진영을 와락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크게 기쁜 마음이었다.
“머리 하나 기막히게 돌아가는구나. 그래. 중간자를 놓고 지분을 돌리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지주사의 지분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거지. 증여세를 내지 않고도 말이야. 그런데…….”
이정훈 회장은 한 가지 찜찜한 것이 남아있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지분을 넘길 기한이 있는 일을 누가 하려고 한단 말인가? 게다가 먼저 돈을 집어넣어야 하고 만약 3년 뒤에 주가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손해까지 볼 일인데…… 게다가 나중에 가서 딴소리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믿을 만한 곳에 지분을 맡겨야 하는데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나?”
이정훈 회장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저었다.
기가 막힌 방법이었지만 중간자 역할을 할 존재를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아쉬운 표정의 이정훈 회장을 향해 몸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이정훈 회장 앞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채 말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3,000억. 저희 회사가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하하하.”
이정훈은 무릎을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모든 고민이 한진영의 말 한마디에 모두 날아가 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