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4-1. 아리스, 한 아리 (21)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임준식. 모든 것의 화근인준식은 차디찬 바닥에 쓰러진 채 속으로 수없이 욕을 했다. 욕설의 대상은, 그냥 전부 다였다. 상대를 잘못 고른 자신도, 괜히 스케일을 키운 친구들도 원망스러웠고, 억울하게 휘말린 성민이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
일련의 사건을 요약하면,의외로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옆 학교 만만한 놈을 건드렸다가 반대로 맞았고, 빡쳐서 친구들 데리고 가서 밟아줬더니…. 저번처럼 기껏해야 친구들이나 몇명 데려올 줄 알았던 그 놈이 '진짜'를 데리고 왔다. 야구 배트로 쳐도 꿈쩍도 안할 것 같은 덩치에, 몸에 살벌한 문신을 한, 주먹으로 먹고 사는 무서운 거한들….
혼자 다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친구들이랑 몰려 다녔는데, 그래서 일이 더 커져버렸다. 학생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아니라 일진들이 얽혔다고 착각하고는, 진짜배기를 대동해서 싹을 밟아 버리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학교가 휴업하는 바람에 준식과 그의 친구들은 본의 아니게 보호 구역 밖에서 움직이게 됐고, '그들'에게 있어선 일처리가 더 수월해진 꼴이 됐다.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이 지역 토박이들도 잘 모르는 인적 없는 으슥한 곳으로 끌려갔고, 준식은 '그 녀석'을 린치한 것을 몇 배로 돌려 받았다.
무섭게도 그 사람들은 기술자였다. 사람을 최대한 덜 다치게 하면서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런 기술자들 말이다. 준식은 눈물 콧물은 물론이고 오줌까지 지릴 정도로 맞고 고통을 당했지만, 그 고통에 비해 부상의 정도는 훨씬 경미했다. 질질 짜는 준식의 눈에 보인 것은 그들뒤에 서서 자신의 고통을 웃으며 관람하는 그놈이었다.
박민우. 저번에 봤을때 교복 명찰로 확인했던 놈의 이름이었다.
정체가 뭐야? 아버지가 조폭인가? 아니면 영화에서나 나오는 권력가 집안의 자식?
일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준식은 이어지는 고통에 생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정말 무섭게도 그들은 준식에게 최대한 또렷한 고통을 선사하기 위해 짜임새 있는 린치를 가했다. 너무 아파서 고통이 적응되지 않았고, 기절조차 마음대로할 수 없었다. 당하는 준식의 입장에선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준식의 친구들은 반대로 린치라기엔 너무이성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에 질려 벌벌 떨어야만 했다.
마침내 눈깔을 뒤집으며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준식을, 그들은 쓰레기를 버리듯이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로 다가갔다. 무릎 꿇린 채로 겁에 질린 친구들은 거한의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박민우를 올려다보며 비굴한 굴복의 표정을 그렸다.
어쩔 수 없었다. 박민우의 뒤에는 스테로이드라도 맞은 듯한, 여자 허벅지만한 굵기의 근육질팔뚝이 수십 개가 있었으므로…. 압도적인힘 앞에서 학교 졸업도 못한 애송이들의 그저 그런 싸움 실력이나 자존심, 의리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
애송이들은 벌벌 떨었으나, 이어진 것은 고통이 아니라 하나의 제안이었다.
"너네들, 선택해 봐."
박민우의 제안은, 마치 뱀의 눈을 마주보는 것처럼 이질적이고 차가운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지금 여기서 뒤지게 맞던지.
아니면 협조하던지.
침착하게 제안하는 박민우는 의외로 별로 화가 나지 않은 듯했다. 겉보기론 말이다. 그는 자신의 겉모습을 통제할 줄 아는,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함이 있었다. 준식과 그의 친구들에게 맞아서 이마 쪽이 찢어져 있었고, 입술에도 아직 빨간 핏기가 남아 있었다. 옷으로 가려진 몸에도 여러 상처가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차분하게 제안하는 그의 모습에 성민의 패거리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냉혈한 같은 모습에 질리기도 했지만, 거부하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떡대들의 살벌함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박민우의 계획은 심플했다. 일단 이 사건의 원인이자 자신에게 먼저 시비를 건 준식은 용서하지 않는다. 조진다. 그리고, 그 패거리는 봐주는 대신 대가리, 즉 리더를 조지겠다는 것이었다.
'성민이를? 걔는 이번 일이랑 아무 상관 없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생각해보니 준식이랑 성민이만 주면 되잖아?'
'성민아, 진짜 미안하다. 내가 진짜 개새끼다. 날 절대 용서하지 마라.'
이 일과 아예 무관한 성민이가 희생된다는 사실에 친구들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으나, 반대로 성민이만 희생하면 다들 무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간사한 마음도 같이 들었다. 신변의 위협을 마주한 어린 애들에게 의리란, 언제든지 소모할수 있는 협상 카드에 불과했다. 친구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스스로를 쓰레기라 욕했지만 결국 성민의 신상을 모두 토해냈다.
…
"후우…."
민성은 끊었던 담배를 꺼내 피우며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담배 연기보다도 자욱한 죄책감이 그의 폐부를 가득 메웠다.
친구를 위해서, 친구가 사랑하는 한 여자를 짓밟았다.
하지만 민성에겐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보단 평생을 함께할 불알친구가 더 소중했다.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감히 선택했다. 물론 자신의 죄를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지독하게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다.
"씨발…."
무거운 죄책감은 끊임없이 민성을 짓눌렀고, 민성의 마음 속은 짓밟힌 성민 만큼이나 피폐해졌다.
….
성민은 나름 비밀로 한답시고 조용히 지냈으나, 오히려 그 조용함이 친구들에게 확신을 안겨줬다. 친구들 중 짓궂고 행동력 좋은 녀석이 나서서 몰래 염탐을 나섰다. 그 녀석은 맨몸이었기에 철조망이 둘러진 성민의 집 담벼락을 넘을 순 없었지만 집밖으로 언뜻 언뜻 새어나오는 성민와 여자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야 이새끼 여친이랑 동거한다. 내가 떡치는 소리 똑똑히 들었다.]
[리얼?]
[진짜. 양심 걸고.]
[올. 성민이 개쩌네.]
한창 그쪽의 호기심이 많을 나이대라 금세 성민을 제외한 단톡방이 만들어졌고, 녀석은 입을 가볍게 놀리며 특보를 뿌려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구들이 아리의 외모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얼굴을 확인했다면 생전 처음 보는, 차원이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서 썩 좋지 않은 결말이 됐을 수도 있었으므로.
그렇게 성민과 여친의 동거는 모든 친구들에게 알려졌다.
민성 역시 단톡방에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성은 다른 친구들이 동거를 눈치 챘다는걸 굳이 말하지 않았고, 대신 성민을 떠봤다. 무심한 척 했지만, 민성도 꽤나 궁금했던 것이다.
[야. 애들이 너 동거한다고 떠벌리던데, 맞냐?]
물론 성민은 모르는 척을 했다.
[??]
[아닌데]
하지만 민성은 계속해서 성민을 추궁했고, 입이 근질근질했던 성민은 불알 친구이자 가장 믿는 친구인 민성에게 비밀 엄수를 약속받고는 아리에 대해 얘기했다. 이제까지 말하고 싶은걸 어떻게 참았는지, 감추는 것 하나 없이 별의 별 얘기를 다하다가 마침내 사진까지 전송했다.
[-사진-]
성민이 보내온 사진을 본 민성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성민의 집이 분명한 배경에 찍힌 남청색 긴 생머리의 여자는, 그가 살면서 봤던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민성의 인생에 이런 여자는 없었다.
미의 기준은 시대, 지역, 세대마다 전부 다르다. 그러므로 절대적 기준은 없다. 민성은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친구들과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에 대해 얘기할 때도, 아무리 예쁜 사람을 얘기할 때도 예쁜지 잘 모르겠다는 녀석이 꼭 한 명 쯤은 있었다. 사람마다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고 민성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 한아리 만큼은 예외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렷한 이목구비, 하얗고 말끔한 피부, 촉촉하고 선명한 눈동자, 유려한 콧날, 부드러워 보이는 연분홍빛 입술. 찬사에 가까운 묘사였으나, 묘사를 할수록 오히려 그녀의 외모를 깎아내리는 기분마저 들었다.화장기 하나 없는 밋밋한 얼굴에 널널한 평상복 차림임에도 이 정도니, 한껏 꾸미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취한 듯이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던 민성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당연히 의구심을 품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성민이한테 왜?'
톡을 나눠보니 머물 곳을 찾다가 때마침 알게 된 성민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고 한다.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잖아. 저 정도 외모면 길거리만 지나다녀도 연예인이나 모델, 하다못해 몸장사라도, 아무튼 없던 직업도 생겨날텐데. 뭐가 아쉬워서 성민에게 신세를 지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는걸 좋아하나?
성민에게 캐낸 정보를 조합해보면 그런 결과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를 긍정적으로, 아무 악의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의 얘기였다.
부정적으로, 숨은 속내가 있다고 가정하면 순식간에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은 역시 꽃뱀이었다. 그래서 민성은, 성민의 들뜬 기분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돈 얘기가 나오면 조심하라고 일렀다. 만약 성범죄로 몰아가면 문자 내역 같은걸 증거로 삼으라고도 말했다. 성민은 의외로 화내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사실 자기도 처음엔 조금 의심했다고 한다.
민성의 의심이 걷힌 것은, 성민의 '못된 짓'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수면제 건의 얘기를 듣자마자 민성은 전화를 걸어 욕부터 했다. 고추 때문에 인생 조지고 싶냐고.
그러나 용서받았고, 오히려 관계가 진전되어서 사실상 연인 사이가 됐다는 말에 민성은 아리에게 속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입밖으론 오글거려서 차마 말 못하지만, 가족 만큼이나 소중한 친구가 벌인 큰 잘못을 용서해줬으니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렇게 본격적인 동거를 하게 된 성민과 아리가 하루 종일 섹스하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톡을 보내면 몇 시간 후에나 답장이 온다던가, 글자에서도 느껴지는 녀석의 행복함이라던가.
진짜로 둘이서 섹스하는 거야? 라는 의심도 하긴 했었는데, 성민의 실수 한 번으로 단번에 해소됐다. 일상 사진을 하나 보낸다는게 실수로 수위가 센 사진을 보내버린 것이다. 전신 누드는 아니었고, 성민의 침대에 맨몸으로 엎어져 있는 사진이었다. 꼬리뼈 아래쪽은 이불로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새하얀 등과, 바닥에 눌려서 옆으로 삐져나온 풍만한 가슴살이 존재감을 넉넉히 과시해서 남자를 발기시키는 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앙큼하게 웃는 표정에는 남자를 홀릴 줄 아는 요망함이 가득했다.
민성 역시 남자였기에 발기했고, 처음엔 당황하였지만 나중엔 그 사진을 저장하고 두고두고 감상했다. 고작 등짝만 나오는, 세미 누드라고 말하기에도 귀여운 수위가 이렇게 치명적이라니. 이렇게 색기가 세니까 성민이가 감싸고 돌았구나, 하고 민성은 생각했다. 성민이 친구들과 연락도 잘 안 하고 그녀에게 빠져든 것도 충분히이해할 수 있었다.
성민은 사진을잘못 보냈다고, 지우라고 했지만 민성은 당연히 안 지우고 웹 드라이브에 저장까지 했다.
그 후로도 성민은 민성에게만 개인적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녀석은 비록 실수이긴 하지만 이미 수위 있는 사진을 보냈으니, 앞으로도 더 보내도 상관 없겠다며 수위 높은 사진을 자랑하듯 보여줬다. 성민의 늘어진 티셔츠 한 장만 달랑 입어서 어깨나 허벅지가 전부 드러난 모습이라던가, 샤워하고 나와서 앞쪽만 수건으로 가린 사진도 보내왔고, 심지어 윗도리를 벗는 도중에 찍은, 목 아래의맨살과 속옷이 전부 드러난 사진도 대담하게 보내왔다. 불안한 느낌이 들어 물어보니, 다 본인 허락을 받고 보내준 거란다.
누님 참…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민성은 베풀 줄 아는 착한 마음씨 주머니를 가진 글래머러스한 아리에게 감사하며, 사진은 전부 저장했다. 아쉽게도 그 이상의 노출은 없었지만, 그게 어딘가 싶었다.
그렇게 성민의 폴더 만큼이나 민성의 핸드폰 앨범에도 차곡차곡 아리의 사진이 쌓여갔다. 소위말하는 19금 수위는 아닌, 즉 유두나 성기 쪽의 노출은 없긴 했지만, 모델이 모델이다보니 뭇 남자들에게 있어선 충분히 딸감이 될 만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연예인 화보집이라도 모아놓은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