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1화 〉#4-1. 아리스, 한 아리 (22) (61/162)



〈 61화 〉#4-1. 아리스, 한 아리 (22)

그게 이 사건의 원인이었다.


민성은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원래라면 준식이를 밟은 것처럼 성민이도 조금… 아니, 많이 아프겠지만 린치를 당하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개가 달라졌다.

박민우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성민과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았다. 다른 친구들이 하나 같이 민성을 쳐다보았고, 박민우가 민성의 핸드폰을 빼앗아서 성민과 나눈 톡을 확인한 순간…. 처음부터 지금까지 착 가라앉아 있던 박민우의 눈동자는 성욕과 탐욕으로 맹렬히 요동쳤고, 그의 목표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바뀌었다.

그 후, 박민우는 민성을 데리고 독방으로 들어가 마치 심문을 하듯이 정보를 캐냈다. 대부분의 정보는 민성의 핸드폰에,  성민과의 문자 내역에 다 있었다. 그가 민성에게 물어본 것은 성민과 아리에 대한 개인적이고 사소한 질문이라던가, 자신이 가진 정보에 대한 확인이 전부였다.

민성은 기분이 묘했다. 뱀처럼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냉정한 놈인줄 알았는데, 그냥 여자에게 관심이 많고 남자에겐 심드렁한 녀석이었다. 그는 속으로 박민우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성민과 아리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떤 미래를 그려봐도 둘의 파멸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애들 싸움에 폭력배를 데려오는 저 무서운 놈이 성민과 아리를 노리고 있으니…. 은근히 익숙해 보이는 그 행동거지로 봐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게 분명했다. 그럼 더더욱 좋을게 없었다.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자신이 봤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 마음 같아선 어느 쪽이던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고, 자신은 고작 무력한 애새끼일 뿐이었다.

'생각하자, 생각해.'

박민우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민성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어느 쪽도 잃기 싫었지만, 만약 잃는다면 최대한  잃어야 한다. 문득 박민우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말투는 이성적이긴 하지만 눈동자는 이미 맛이 가 있었다. 성욕과 소유욕에 번들거리는, 암컷을 격렬히 갈망하는 수컷의 눈동자. 박민우는 읽기 쉬운 단순한 욕망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아.'

마치 눈 앞에 길이 생겨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속셈 모를 차가운 놈을 그냥 발정난 수컷이라고 생각하니 간단해졌다. 저런 상태라면 그냥 앞으로만  돌진하지 않겠는가. 앞길을 막는 다른 수컷이 있다면 무자비하게 배제하겠지만, 아무도 앞을 막지 않는다면 그저 그 끝에 있는 암컷만 탐하겠지.


한아리의 희생은 막을 수 없지만, 잘만 하면 성민이는 지킬  있겠다.

민성은 번쩍 떠오른 계획을 잠시 동안 머릿속에서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용건을 끝낸 후 뒤돌아선 박민우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저기…."

"음?"




'무슨 일이지.'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아리는 아직 축축한 머리를 기계적으로 말리면서, 마치 입 안에 있는 사탕을 굴리듯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리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없다지만, 평범한 사람도 분위기 정도는 읽을 줄 안다. 다소 화가 난 듯한, 짜증 섞인 성민의 감정을 아리는 캐치할  있었다.


그 나이대, 그리고 성민이 어울리는 친구들을 떠올려보니 얼추 알 것 같았다. 친구 문제겠지. 그 나이대 소년이라면 여자 문제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성민은 이미 있잖는가. 내가.

머리를 대충 말린 아리는 전신 거울로 향했다. 판타지 세계에서도, 이곳 지구에서도 최상급으로 인정받는 얼굴과 몸매. 아리는 민망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내심 자신의 외모가 만족스러웠다. 고향인 판타지 세계와 이곳, 지구의 외모 기준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만족의 측면에서도 다행이지만, 무엇보다도 용사님… 아니 정인의 여자로서 손색이 없다는게 감사할 일이었다.

아리는 두 말 하면 입 아프지만, 용사에 대한 애정이 정말 정말 강했다. 거기에 더불어 자기애도 강한 편이었다. 용사를 떠올릴 때,  옆에 있는 용사의 여자인 자신도 항상 생각한다. 여자들 중에서도 콩깍지게 가장 세게 쓰인 아리의 눈에는 용사가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남자였다. 그러니  남자의 옆을 차지하는 여자 역시 우월해야 그림이 된다.

'이 정도면….'

거울 앞에 나신으로 선 아리는 자기 가슴을 들었다가 놓고, 자기 골반을 감상하기도 했다. 아무리 이런저런 여러 가지 매력이 있어도, 여자의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매력 포인트는 세 곳이었다. 얼굴, 가슴, 골반. 당연히 아리는  세 부분에 모두 자신이 있었다.


"휴우."

자기 자신에게 합격점을 준 아리는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녀는 초월자 수준의 마나 유저였기에 갑자기 살이 붙거나 급작스러운 몸의 변화가 있거나, 노화가 진행되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아리는 때떄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결과는 항상 만족이었다.

아리가 자신을 점검하는 이유  하나는, 다른 남자들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거의 꾸미지 않고 수수하게 다니는 편이지만, 더 이상 자기 외모가 먹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먹히는 스타일로 꾸밀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언제든 남자들을 끌어들일  있는 매력적인 외모를 갖춰야 하니까.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원하고 탐하는 것 자체가아리 본인에게도 큰 쾌감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인에게 지극한 쾌락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후후."

 얼마나 아름다운 현상인가. 물론 처음엔 네토 플레이에 거부감이 있었다. 기뻐하는 몸과 거부감이 남아 있는 마음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이상했고, 전혀 즐길 수 없었다. 그러나 혼란기를 버텨낸 현재에 이르러선, 자신도 즐겁고 정인도 즐겁고 네토남도 즐거운  행복한 플레이를 언제든지 몇 날 며칠이고 하고 싶다고, 자신이 먼저 원하고 있었다. 셋 중  쪽이라도 즐기지 못했다면 이렇게까지 좋아할  없었을 것이다.


무심결에 정인과 성민을 동시에 떠올린 아리는,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얼마나 늦게 오려나?'

침대에 걸터 앉아서 생각하던 아리는 발밑에 널부러진 자기 옷가지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성민이가 없어서 입어도 상관이야없겠지만, 딱히 옷을 입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도 나름의 해방감과 상쾌함이 있었고, 아리는 예전부터 그런 시원한 느낌을 좋아했다. 먼저 막 벗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벗을 기회가 되면 나체족처럼 알몸의 해방감을 만끽해왔다.

아리는 계속 알몸으로 다니며 슬슬 익숙해진 성민과의 몸의 대화를 떠올렸다. 성민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렇게 성욕과 정력이 강한 녀석이니 오자마자 달려들겠지? 기왕이면 자고 있을때 범해주면 좋겠다.


문득 수면제 생각이 난 아리는 생각난 김에 수면제의 마지막 한 알을 삼켰다. 슬슬 약효가 떨어져서 어제는 제대로  수면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식도를 통해 뱃속으로 넘어가면서 퍼져가는 약의 기운을, 마나를 통해 몸 곳곳에 깊숙히 받아들인다.


'이게 마지막이네.'

벌써 성민이 구해다 준 세 알을 다 먹었다. 아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약효가 온몸으로 도는 것을 방치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아리는 뒤늦은 생각을 했다. 마나 유저의 건강하고 활발한 신체를 억지로 잠재우는건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도 좋은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마침 수면제도 다 먹었겠다, 이걸 마지막으로 이 짓은 더 이상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하고선….


잠시 후, 아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띡띡띡, 띠리릭.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이, 도어락이 열리며 여러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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