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4-1. 아리스, 한 아리 (23)
'뭐지?'
머릿속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수마를 간신히 몰아낸 아리가 다시 눈을 떴다.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기에 몸이 나른하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도 멍했다.
쿵쿵쿵쿵쿵쿵.
여러 개의 묵직한 발소리. 아리는 그 발소리에서 성민이나 친구들 체급으론 흉내낼 수 없는 육중함을 느꼈다. 처음 도어락이 열렸을 땐 성민이겠거니 하고 눈을 감았는데, 이어지는 수많은 발소리를 듣고는 잠들던 몸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설령 친구들이라고 해도, 이렇게 갑작스레 많이 몰려온다면 연락이라도 했겠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는게 1초라도 늦었다면 속절 없이 약 기운에 밀려 잠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초감각을 이끌어낸 아리는 거의 열 명에 가까운 수많은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분명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고(思考)의 언저리를 맴돌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 두근두근 심장 박동을 부추겼다.
"으음…."
차분히 가라앉던 몸에 다시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면서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빠른 속도로 온몸을 돌던 수면제의 약효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아리는 점점 더 힘이 빠지는걸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시간이 얼마 없었다. 만약 단순한 도둑이라면 바로 제압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상황이 복잡하다면 꽤나 피곤해진다.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마나 유저의 힘을 함부로 사용할 순 없었다. 암묵적인 룰이었다. 레이아가 플레이를 위해 최면 마법을 거는 경우도 간간이 있었고, 용사가 아리에게 찝쩍대는 남자를 마나의 기운으로위협한 적도 있긴 하지만, 마나를 이용해 일반인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적은 없었다.
제약을 어길 순 없다. 아리에겐 그러한 문제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큰 골칫거리는, 아리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외강내유] 스킬.
용사 파티의 일원인 아리스를 향한 마왕의 저주.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지나와 아리스는 혼자 있을 땐 몸을 사려야 했다. 지나는 공격 수단이 전무한 순수 지원형 마법사기 때문이다.아리스는 강하긴 하지만, 남자가 욕망을 품고 억지로 밀고 들어오면 무력해진다. 그나마 지나는 방어 계열 마법이라도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라도 있지만, 아리스는 그런 보험조차 없었다.
다행히도 아리스는 아직 험한 꼴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더 위험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마나도 스킬도 쓰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로 인해 남자들에게 무력하게 당할 위험이 큰 상황. 십수년에 달하는 목숨을 건 치열한 실전 경험도, 그녀를 최고의 검객으로 만들어준 기민한 반사신경도 지금 상황에선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번 탄력을 받은 약 기운이 빠르게 몸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방 밖의 괴한들을 만나기도 전에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뭔가를 해야….'
띠이잉!
"으윽…."
마나로 인해 흉포해진 약의 기운이 머릿속까지 헤집었고, 강한 현기증을 느낀 아리는 자신이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음을 인지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은 것 같았으나, 자신이 잠시나마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에 아리는 서늘함을 느꼈다.
후회가 막심했다. 섹스 플레이에 미쳐서 위험천만하게도 마나까지 동원해 약을 함부로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남자들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은 사냥감인데, 아예 먹기 좋게 손질까지 해놓은 꼴이나 다름없었다. 아무 것도 입지 않는 맨살 위로 싸늘한 공기가 지나가며 살갗을훑었다.
'바, 밖은 어떻게 됐지?'
이럴 시간이 없었다. 아리는 혼곤한 정신을 가다듬고 문고리에 손을 뻗으며 초감각을 활성화했다. 아직 제 기능을 하는 초감각이 순식간에 집 안의 모든 인기척을 감지했다. 대부분이 여전히 거실에 있었지만, 세 명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위치는….
'바로… 앞에?'
쿵!
"아앗!"
외부로부터 아리를 차폐해주던 문이 거칠게 열렸고, 체중이 가벼운 아리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기에 그 힘에 밀려 뒤로 튕겨나갔다. 하마터먼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다행이긴 하지만, 넘어지지 않았다는 건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여기 계셨군. 워우, 냄새 봐라."
아리의 앞에 우뚝 선 것은, 그녀보다 적어도 두 배는 넘는 덩치를 자랑하는 거한이었다. 방 안에 가득한, 짙은 교미의 흔적이 거한의 후각을 자극했다. 여자의 암컷 내음은 맡기 좋았지만, 거기에 섞여 있는 다른 수컷의 냄새 때문에 그다지 향기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두 명의 거한 사이로, 한 소년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왔다. 성민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은, 성민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순수하지 않은, 차가운, 지독한 성격. 소년에게는 불순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딱 하나, 성민과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왕성한 성욕. 여자를 탐하고자 하는 욕망.
우두두.
자신을 샅샅이 훑는 차가운 수컷의 눈빛에, 아리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필이면 현기증이 와서 그들이 올 동안 아무 것도 걸치지 못했기에, 새하얀 피부가 형광등 불빛을 그대로 반사하여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미녀의 나신에 모든 남자들이 끈적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거한들 역시 아리의 몸을 보고 단숨에 발기했다. 어린 고용주, 박민우는 여자를 독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난잡한 난교를 즐기는, 꽤나 지저분한 성욕을 가진 녀석이었다. 우리에겐 행운이지. 두 거한은 충동대로 당장 여자를 덮치는 대신, 이후에 끈적하게 즐기기로 하고는 소년의 옆에 서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쿵.
박민우가 아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평균 키에 평균 체중, 평범한 인상. 딱히 덩치가 크지도, 생김새가 살벌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겐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겁주는게 처음도 아니었기에, 익숙한 동작으로 다가가 아리에게 손을 뻗는다.
스윽.
차가운 손이 아리의 부드러운 뺨에 닿았다. 그 손길을 막고자 아리가 민우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거기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때문에 오히려 만져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의 입이 비틀린 미소를 띄웠다.
….
아리는 뺨을 쓰다듬는 무례한 손길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며, 허무한 표정으로 방금 얻은 깨달음을 곱씹었다.
'아아….'
저주가 있는 한….
남자를… 이길 수… 없구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뒷덜미가 서늘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하얗고 부드러운 목울대가 모두에게 보일 정도로 크게 한 차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