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4-1. 아리스, 한 아리 (24)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리는 실전 경험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여전사였다. 비록 주특기인 외날검이 없기는 했지만, 그녀는 맨몸 격투 역시 달인의 경지였다. 아무리 거한들이 싸움을 잘한다고 해도 주먹과 발, 무릎 등 온갖 신체 부위로 수십 수백의 몬스터를 타살(打殺)한 아리를 상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용사 파티 전원을 강력하게 옭아맨 저주는 그런 아리의 힘을 무력화 시켰다. 최고의 여검객은 수컷의 번들거리는 욕망의 눈빛을 마주했고, 거부할 수 없는 저주의 힘으로 인해 온몸의 힘이 탁 풀려버렸다. 거기에 더해 빠르게 신진대사를 억누르는 약의 기운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늪으로 아리를 점점 끌어내렸다.
"아아…."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세요. 얌전히만 있으면 해치진 않을 테니까."
민우가 마치 연인을 대하듯 아리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냉혈 동물처럼 차가운 눈빛과 표정은 저항할 경우 아픈 꼴을 당할 거라는 협박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아리는 옆의 두 거한보다도 눈앞의 소년이 더 큰 벽으로 느껴졌다. [외강내유] 스킬은 아리를 향한 남자의 욕망에 반응하기에,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탐욕을 뿜어내는 박민우가 아리를 가장 강하게 억압하고 있었다.
패배다. 아니, 애초에 싸움조차 성립하지 않았다. 아리는 암담한 마음에 눈을 내리깔다가, 다시 눈동자를 들어 소년을 마주보았다.
"흠?"
"…용건이 뭐야."
이 와중에도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약 기운에 넘어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아리가, 적어도 기싸움에서라도 밀리지 않기 위해 마지막 자존심을 불태우며 이유를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민우는 훤히 드러난 아리의 몸을 위아래로 스윽 훑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게요."
그가 민성의 핸드폰을 꺼내어 아리에게 보여줬다. 핸드폰 화면에 민성과 성민이 나눈 톡이 출력되었다. 아리는 빠르게 그것을 스크롤하며 확인했다. 대부분은 아리의 야릇한 사진과 더불어, 성민이 일방적으로 아리를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한민성과 남성민. 성민이와 녀석의 베스트 프렌드. 두 명의 이름을 확인한 아리는 이 일이 성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사진을 보니까 누나가 참 예쁘시길래."
민우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내밀어 아리의 뺨을 스윽 핥았다. 불쾌하지만, 끈적한 욕망이 가득한 그 행동에 아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내 녀석이 아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쌈해가려고요."
"……."
침묵하던 아리는 귓볼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민우를 약한 힘으로나마 밀어내었다. 밀려났다기보단 한 발 물러나준 민우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한 제스쳐였다.
"성민이는 어딨어?"
"아아? 저기, 지금 애인 걱정하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디있냐고."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묻는 아리를 본 민우는 나름 앙칼진 모습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순순히 대답해줬다.
"음, 저기 거실에 있지요?"
"…무사한 거야?"
"뭐, 아직은요."
앞으로도 무사할진 모르겠네요.
민우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아리는 민우와의 대화에서 그나마 얻어가는게 있다고 생각하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날 데려가겠다고?"
"네. 물론 선택권은 없어요."
"너, 학생 아냐? 이런 일을 하면서 무섭지도 않니?"
"무서워? 하하하, 그럴 리가요. 누나. 제가 이런 일 처음 해보는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익숙하거든요. 뒤처리도 깔끔하게 할 자신 있다구요?"
민우가 자신 있다면서 낄낄 웃었다.
'위험해.'
아리가 민우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녀석은 누가 봐도 이런 쓰레기짓에 익숙해 보였다. 이런 일을 하고도 이제껏 용케 법망을 피해갔구나. 뒤처리에 자신 있다는 녀석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험한 녀석이었다. 이런 위험한 녀석에게 성민이를 넘겨줄 순 없었다.
판단을 마친 아리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음?"
"따라갈게."
"오? 억지로 끌려가느니 자기 발로 직접 가겠다는 건가요. 뭔가 TV에서 본 것 같은 대사네요. 나쁘지 않아요, 그런 협조적인 태도."
"대신."
아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성민이는 건들지 마."
그 말에 민우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의외의 대사를 듣고 굳었다기보단, 반대로 너무 표현하고 싶은게 많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동작을 멈춘 상태로 계속 입을 오물오물 거리는게 그 증거였다. 그렇게 잠시 간의 정적 후, 민우가 박장대소를 하며 크게 웃었다.
"푸흡! 푸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
"하하하! 크큭, 크흠, 커흠!"
시원하게 웃어 제낀 녀석은 어깨를 몇 번 더 들썩이다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손을 V자로 벌려서 아리의 턱살 부분을 거칠게 잡아눌렀다.
"좋아, 좋아요. 까짓거, 그 새낀 안 건들죠 뭐. 존나게 따먹고 싶은 누나에 비하면 좆도 아닌 새끼니까요. 대신… 하나는 확실히 가르쳐 드릴게요. 누나가, 지금, 남, 걱정할, 처치가, 아니라는, 걸요."
민우가 눈을 부릅뜨며 마지막 말을 또박또박 강조했다.
"미친… 새끼…."
"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미래가 여러 의미로 기대되는 소악마는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다시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저주와 수면제로 혼곤한 와중에도 마음의 짐을 덜어낸 아리는, 기어이 모든 힘을 빼앗아가는 외부의 기운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건넸다.
"으음…. 너… 이런 분위기에서, 미안한데…. 내 짐 좀 챙겨줄래…. 옷이랑, 화장품밖에… 없거든…. 내 캐리어에 담아서…. 아아…."
풀썩.
"어엉? 뭐야."
민우는 갑자기 품에 안겨드는 아리의 행동에 흠칫했다. 의식을 잃은 사람의 몸은 원래 체중보다 훨씬 무거웠기에, 그는 안겨드는 아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거한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한 명이 쓰러진 아리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는데요?"
"엥?"
어이가 없어하는 민우와 거한. 이내 다른 남자가 눈썰미 좋게 아리가 먹었던 수면제 포장지를 발견했다.
"수면제를 먹은 것 같은데."
"아. 어쩐지 좀 멍해 보이더라."
남자들이 수긍하고는 피식 실소했다.
"하, 재밌는 년이야. 잠드는 와중에도 자기 짐 챙겨달래."
"다른건 몰라도 깡은 있구만."
"아니, 그냥 세상 무서운줄 모르는 걸수도 있지. 이 정도 얼굴이면 공주님처럼떠받들어져서 세상 귀하게 자랐을 테니까."
"그런가? 근데 어쩐다. 이젠 공주님이 아니게 되겠구만. 흐흐."
그렇게 분위기가 수습되고, 멍하니 서서 잠든 아리의 얼굴을 홀린 듯 감상하던 민우가 정신을 차리고 남자들에게 지시했다.
"슬슬 데려가죠. 부탁도 받았으니 이 누님 짐도 챙겨주시고요. 아, 핸드폰은 꼭 챙겨요. 안 챙겼다간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여차하면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지만, 좋게 끝낼 수 있다면 좋게 끝내는게 상책이니까…."
"그럽시다. 근데 어디로 갈까요?"
"하하, 알면서 그러시네. '별장'으로 가야죠. 일을 할만한 데가 거기밖에 더 있어요?"
"그건 그렇죠. 담요라도 두를까요?"
거한이 묻자 민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대로 가죠. 가는 길에 손장난이나 좀 쳐야겠네요."
"알겠습니다. 자, 일 시작하자."
의외로 서로 존중하는 좋은 분위기의 고용주와 고용인들은 자기 일을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성민의 집에 한바탕 태풍이 몰아쳤고, 몇 시간이 흘렀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난 자리에 남은 것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성민과 성민의 감시역을 자처한 민성, 그리고 짬이 모자라서 둘의 감시를 맡게 된 막내 한 명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