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4-1. 아리스, 한 아리 (25)
"허윽!"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성민은 정신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두통에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에 의해 코와 입이 막혀서 기절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의식을 잃는 도중에 들었던 목소리 역시 떠올랐다.
'민성이?'
걔가 왜?
워낙 뜬금이 없어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가장 믿는 친구가 자길 덮칠 이유가 없잖는가. 성민은 착각이라고 단정짓고는몸을 일으키기 위해 상체를 움직였다.
철컥.
"어?"
그러나그 행동은 차가운 쇳소리와 함께 제지당했다. 성민이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니, 자신의 한쪽 손목에 채워진 은색 수갑이 침대의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다.
"뭐야, 시발."
철컥철컥 철컥 철컥.
성민이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수갑을 흔들어댔으나 손목만 아플 뿐이었다. 그제서야 성민은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었음을 자각했다.
"뭐, 뭐야. 어떤 새끼가…."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하여 시야가 좁아졌던 성민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리와 정사를 나눴던 자신의 방이었다.
"여긴 내 집이잖아…. 뭐야, 뭐냐고."
당황한 성민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수갑 때문에 거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끼익.
"아, 일어났냐."
"한민성? 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성민의 절친 민성이었다. 녀석은 왠지 안색이 어두워 보였다. 둘 사이엔 꽤나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성이 풍기는 담배 냄새가 성민에게까지 닿았다. 분명 금연한지 일 년이 넘었는데, 무슨 일인지 줄담배를 지독하게 피운 것이었다.
민성은 묶여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성민의 옆에 풀썩 앉았다. 성민은 지독한 담배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으나 지금은 담배 가지고 떠들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우선 가장 급한 질문부터 했다.
"야. 뭐야, 이 상황. 나 왜 묶여있냐? 응?"
"…하아. 성민아."
"넌 왜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새끼야. 시원하게 말 좀 해 봐. 엉?"
"미안하다. 그래, 다 말해줄게."
민성은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로 모든 사건의 전말을 고백했다.
준식이 사건 때문에 패거리 전체가 박민우에게 끌려간 것도, 그 과정에서 성민과 동거하는 아리의 존재를 들킨 것도, 성민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아리의 희생을 완전히 방치한 것도. 거기에더해서 너를 기절시킨 것도 나였으며, 이유는 아리를 데려가는 과정에서 괜히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거짓없이 전부 고백했다.
"…."
"이게 끝이다. 그 누나가 어떻게 됐는진 나도 몰라."
"…민성아."
죄책감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전부 고백한 민성은 성민의 깊게 잠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눈 안에 들어온 성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현실을 부정했다.
"구라지? 몰카냐? 지랄하지 마. 장난도 정도껏 하라고 개새끼야. 어? 다 구라잖아? 그렇잖아?"
"미안하다…."
"씨바알!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고개를푹 숙인 성민은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욕설을 반복해서 내뱉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
퍼억!
"이 개 씹새끼야!"
사과하던 민성의 얼굴에 성민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하는 발차기에 민성이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수갑 때문에 거동이 제한되어서 마음껏 팰 수는 없었지만, 성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자세와 동작으로 민성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날렸다.
퍽! 퍼억! 퍽! 퍽! 퍽! 퍼억!
쓰러진 민성은 도망치지 않고 성민의 분노를 감내했다. 이를 악물었기에 큰 비명은 없었고 으윽, 컥 정도의 숨죽인 신음이 전부였다.
….
"허억, 허억, 흐어…. 으아아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성민은 온갖 감정이 가득 담긴 기합을 내지른 후 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때리면서 화까지 내느라 제풀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성민이 기운 빠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냐…."
"…그래."
"확인해봤냐? 누나 방에, 아무 것도 없어?"
"어. 텅 비었다."
"…."
민성은 온몸이 고통으로 쑤셨으나 성민을 달래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민은 거칠게 민성을 밀어냈다.
"씨발놈아, 혼자 있게 좀 냅둬라. 제발 잠깐 꺼져 있어봐. 부탁이다, 좀…."
"…알았다."
그래도 더 이상 발광하지 않는 성민을 다행이라 생각한 민성은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해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자마자 들리는 절친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민성 역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며 괴로워했다.
…
시간이 지났고, 분위기는 비록 침체되었으나 성민의 상태 역시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민성아."
"어."
"풀어주면 안 되냐?"
"후우, 말했잖냐. 널 지키기 위해서 감시 역할을 자처했다고. 게다가 나 감시하는 사람도 저기 있는데 어떻게 널 풀어주냐. 헛짓거리 하면 우리 둘 다 뒤지는 거야."
씨발새끼, 하고는 성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성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나한테 열쇠도 없어."
"그래 너 잘났다 씹새야. 배신자 새끼."
"배… 아니, 미안하다."
배신이 아냐. 다 널 위해서 이러는거야. 나도 존나 힘들다고. 좀 알아주면 안 되냐?
민성은 충동적인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지금 그 말을 해봤자 성민의 기분을 바닥으로 처박는 것밖에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참았다.
둘의 분위기는 묘했다. 성민은 민성을 죽이려는 듯이 거칠게 욕설과 폭력을 가하기도 하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걸 이해하고는 힘빠진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나마 다행인건 성민이 점점 민성을 부드럽게 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쌍욕을 퍼붓는건 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폭력은 쓰지 않았다.
"나 핸드폰 써도 되냐? 존나 심심한데."
"어, 돼. 그건 안 막더라."
절대 안될거라 생각하곤 농담으로 물어본 성민이 벙찐 표정으로 민성에게서 자기 핸드폰을 받았다. 멍하니 있던 성민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이새끼들 뭔 생각이지. 이제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끝나는거 아니냐?"
"아, 잠깐. 안 그러는게 좋을 거야."
"뭐?"
"박민우가 너한테 전해주라더라. '신고하면 너야 편해지겠지만, 어딨는지도 모르는 한아리는 어떻게 될까? 널 위해서 희생한 네 애인은 지금 내 손 안에 있으니까 잘 판단해.'라고…."
당장이라도 경찰에 신고할 기세였던 성민은 그 말을 듣고는 핸드폰을 옆으로 탁 던지며 그저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씨발, 그럼 내가 어떻게 신고를 하냐…."
"걔네가 우리에게 진짜로 자유를 주겠냐. 그리고 너 아까부터 내가 간수인 것처럼 말하는데, 나도 진짜 간수한테 감시당하고 있다고. 거실에 존나 살벌한 놈이 있다니까. 솔직히 밖으로 나갈 때마다 쫄린다."
"그러냐…. 그럼 그냥 여기 있어라."
성민이 침대에 대자로 누우며 말했다. 분위기는 소강 상태가 되었고, 둘의 관계는 어느 정도 회복된 것으로 보였다. 이성을 어느 정도 되찾은 성민은 민성의 입장을 최대한 생각해 보았고, 아리 누나를 희생양으로 생각한 점은 분명 사형감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걸 최대한 참작했다. 아직 완전히 용서한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민성을 개 같은 배신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성민이 이런 통 큰 용서를 한 가장 큰 이유는,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리를 잃은 상황에서 절친 민성까지 쫓아낸다면 곁에 아무도 없을 텐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이 적막 속에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무서웠다. 민성이 녀석은 비록 괘씸하긴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배신하지는 않을 녀석이니까….
'시발, 까짓거 봐준다.'
그렇게 민성은 용서받았다.
….
적막 속에서 여러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성민이 질문했다.
"근데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냐?"
"아 맞다. 그게, 상황이 좀 웃겨."
"뭔데."
민성은 자신이 들은 어이 없는 정보를 성민에게 전달했다.
박민우. 그놈은 여러 의미로 대단한 놈이었다. 놈은 사건의 원흉인 준식과 리더인 성민만 조진다는 약속을 지켰고, 준식과 함께 자기를 밟았던 애들까지 전부 용서해줬다. 그리고는 오히려 성민 패거리를 접대해줬다. 진짜로 재력가나 권력가 집안이었는지 무려 자기네 '별장'으로 초대했고, 그렇게나 무서웠던 떡대 형님들이랑 다 같이 어울려서 놀고 있단다. 물론 준식이에겐 자비가 없었지만, 나머지 애들은 이름조차 몰랐던 온갖 비싼 술과 고급 담배에, 심지어 여자들까지 옆에 끼고 온갖 향락을 즐기는 중이란다.
"뭐야, 미친 새낀가?"
"아냐. 그새끼 진짜 치밀하고 무서운 새끼야. 소름돋지 않냐?"
"뭐가?"
민성은 이해를 못하는 성민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이게 박민우의 '뒤처리' 방식이었다. 조지기로 마음 먹은 놈은 철저하게 족치지만, 나머지는 전부 회유한다. 지금처럼 생전 처음 누려보는 향락을 써먹기도 하고, 돈을 먹이기도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편으로 만든다. 그 결과 성민의 친구들은 전부 박민우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걔네들이? 그렇게 의리가 없는 애들은 아닐텐데…."
"그 정도 되는 놈이면, 사람 마음 바꾸는게 어려울 것도없지 않겠냐."
그 이름도 유명한 당근과 채찍.
박민우는 그 두 가지를 잘 활용했다. 만약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준식이를 조진 것처럼 채찍으로 잔혹하게 처리한다. 대신 말을 잘 들으면 확실하게 당근이주어졌다.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진귀한 당근이.
증거 역시 꼼꼼하게 남긴단다. 현재 성민의 친구들이 민우의 별장에서 즐기는 모습은 사진과 영상으로 빠짐없이 전부 기록 중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삐리들이 온갖 술과 담배, 여자에 빠져서 난잡하게 노는 모습이 전부 물증으로 남는 것이다. 만약 박민우를 배신한다면, 그 기록들이 녀석들의 약점이 되어 박민우를 방어함과 동시에 배신자를 공격할 것이다.그리고 성공적으로 자신을 방어한 민우는 그 뱀처럼 차가운 얼굴로, 배신에 대한 가차 없는 보복을 실행하겠지.
민성이 아는건 여기까지였다.
"씨발…."
힘의 차이를 실감한 성민은 할 말을 잃었다.
박민우와 성민 패거리 사이에는 마치 야생의 먹이 사슬처럼,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인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박민우는 촘촘한 거미줄을 자유롭게 오가는 거미였고, 성민과 친구들은 거미줄에 꽁꽁 묶인 작고 힘없는 피식자에 불과했다. 피식자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거미줄에 얌전히묶인 채로 떡고물이라도 받아먹던가, 아니면 거미줄을 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아무 성과도 못 내고 분노한 거미에게 잔인하게 뜯어먹히던가.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민성도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이 좆같은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기나긴 인고의 시간도 끝이 있다는 점이었다. 학교. 학교의 휴업이 끝나기까지 일주일 가량이 남아 있었다. 그 말인 즉, 적어도 그 전에는 모두를 해방시켜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주일을 이러고 있으라고? 미친…."
"나도 존나 막막하다."
"박민우 그새낀 학교 안 가냐? 걔네 학교도 휴업인가?"
"아니. 근데 그새끼가 그런거 신경 쓰고 살겠냐? 별 탈 없도록 학교에도 수작을 부렸겠지. 왜, 우리도 벌써 학교 빠지는 애들 많잖냐. 특기생이나 무슨 합숙이니 경시대회니 이지랄 하면서."
성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놈은 비록 또래였지만, 나쁜 의미에서 차원이 다르게 성숙했다. 벌써부터 머릿속에 뇌수 대신 세속의 온갖 더러운 구정물이 잔뜩 들어 있었다. 벌써부터 싹을 보이는 거대한 악을 떠올리던 성민은 생각할수록 괜히 기분만 나빠졌기에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야. 근데 나 화장실은 어떻게 가냐."
"밖에 떡대가 급하면 말하래. 잠깐은 풀어주겠다고."
"너무 쉽게 허락해 주니까 좀 무서운데."
"헛짓거리는 꿈도 꾸지 말라는 거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