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6화 〉#4-2. 개입 (1) (66/162)



〈 66화 〉#4-2. 개입 (1)

"진짜로 둘이 있게?"

민성이 또다시 물었다. 성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민성을 밖으로 내보냈다.

"너 들어서 좋을  없다잖아."

"넌  새끼를 믿냐?"

성민은 대답 대신 레이아를 잠시 응시했다. 단발 머리가 진보라색으로 예쁘게 물들어 있는 소녀는, 컬러 렌즈를  건지 이질적이면서도 보다 보니 묘하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박민우의 취향인 건가 싶었으나, 이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레이아를 관찰했다.

귀여운 얼굴에 피부도 아기처럼 좋아서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겉보기로만 보면 자기 또래라고 해도 될 것 같았는데, 차분하고 감정 없어 보이는 표정 때문에 분위기는 성숙해 보였다. 키는 여자 평균보다 5cm 정도 작아서 남자 평균 키인 성민조차 한참 내려다볼 정도였지만, 그래도 비율이 장난이 아니었다. 머리가 작고 허리와 다리가 길었으며, 가슴도 충분히 크고 골반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때문에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예쁜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상당했다.


당장 도심에만 나가도 슈퍼 스타로 캐스팅 될만한 아리 덕분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성민은 그나마 침착했지만, 민성은 어지간한 아이돌보다 더 예쁘고 매력 있는 레이아의 외모에 넋이 나가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그런 말이  있는지, 두 소년이 직접 증명하고 있었다. 둘의 반응은 각각 달랐지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생긴 레이아를 보고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거두고 있었다. 처음부터 스스로를 박민우의 비서라고 소개하며 가시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아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간에 녹아들 수 있었다.

"성민아, 그래도…."

"내 판단이야. 존중해줘."

성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민성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곤 성민의 의견을 존중하여 밖으로 나갔다. 끼이익 문이 닫힌다. 아리와 성민의 체취가 여전히 남아있는 방 안에서, 새로운 여자인 레이아가 성민을 독대하고 있었다.

스르륵….

평범한 일반인인 성민과 민성은, 레이아의 마법이 자신들을 차례 휘감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미지의 마법으로 인해 둘은 자기도 모르게 레이아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씩 거두고 있었다.



….

성민은 말없이 레이아를 보았다.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고 정자세로 서있는 레이아를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훑는 것은 한창 때인 남자의 슬픈 본능이었다.그나마 상황이 어두웠기에 성민이 얌전하고 신사적으로 구는 것이었다. 몸 건강한 소년이 새로 등장한 예쁜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적어도 함부로 대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편하게 있어도 돼."

눈앞에 있는 여자애는 분명 원수인 박민우의 개인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성민은 왠지 모르게 그녀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잘 대해주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서로 친하게 지낼 관계는 분명 아니었기에, 그는 평범한 여자애한테 할만한 기계적인 배려 이상은 하지 않았다.


레이아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추를 풀고 외투를 벗었다.


스륵, 스르륵.

"어우…."

레이아가 코트를 벗자 그 속에 숨겨져 있었던 상의가 드러났다. 꽁꽁 싸맨 겉옷과 대비되는 검은색의 민소매 폴라티가 성민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여자 옷이 교복인 성민에게 있어서, TV에서나 나오던 옷을 직접 보니 생각보다 훨씬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옷보단 옷걸이, 모델이 최상급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솔직히 몸매는  그대로 쭉쭉빵빵한 아리가 훨씬 성민의 취향이었다. 그렇지만 아리는 화장이나 패션이 수수한 스타일이었고,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적절히 잘 꾸민 레이아가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리는 지금 눈에 안 보이고, 레이아는 아주  보이고 있다는 점 역시 주효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성민이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한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옷 때문인지, 작은 키와 가냘픈 체형에 비해 큰 가슴이 더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성민은 이미 가슴까지 뚫어져라 본 주제에 더 이상 쳐다보면 큰 실례일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지금 여자가 눈에 들어오냐, 병신아!'

비록 상황이 좋지 않아서 두뇌가 신체 반응을 억제하고 있었지만, 성민의 신체는 요 며칠간 하루 종일 여자와 섹스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몸이 새로운 여자를 인식하고 수컷으로서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짝 일어서려는 페니스의 상태를 자각한 성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들어간 매끈한 허리 라인이라던가, 허벅지를 반도 못 가리는 짧은 주름 치마라던가, 안이  비치는 얇은 검은색 스타킹이라던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메말라가는 상황 속에서 뚝 떨어진 미려한 여체에 미련이 남았지만 박민우의, 악마의 수작이라고 생각하니 그 매력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독사나 독버섯은 화려한 무늬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성민은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너도  감시하려고 온 거야?"

"아뇨. 그분을 대리해서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거래? 하! 나랑, 그놈이?"

철컥.


무심코 팔짱을 끼려던 성민은 수갑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다시금 자기 상황을 자각했다. 상황적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자신에게 자유는 없었다. 그러면서 거래라니. 조롱하러 온 건가. 불쾌해진 성민이인상을 썼다.

"거래는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아냐?"

비꼬는 듯한 말투에 레이아가 피식하며 의미 모를 작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동등하지 않더라도, 주고 받는 것만 있으면 거래는 언제든지 성립하지요. 세상을 겪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겁니다."

"너… 후우."

누굴 가르치려 들어. 성민은 짜증이 났으나, 저쪽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초인적으로 인내했다. 그리고는 차라리 이 주제를 빨리 끝내는게 낫겠다는 생각에 자신이 먼저 대화를 진행시켰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래서, 무엇을 거래하자고?"

스스로를 다스리는 성민의 모습에 레이아는 소년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상향했다. 진행이 빨라서 좋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말없이 근처에 놓인 성민의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지금쯤 많이 왔겠지요. 당신을 위한, '포르노'가요."

레이아는  글자를 유독 강조하며 말했다. 역린을 건드리자 성민의 어깨가 한 차례 크게 들썩였으나,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래도 분위기는 제법 흉흉해졌다. 아마 그의 두 손이 자유로웠다면 서로 평화롭게 대화를 주고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걸로, 자위해주세요."

"…뭐?"

충격적인 말을 전한 레이아는 벙쪄있는 성민에게 다가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한아리의 포르노로 자위하고, 정액을 사정하십시오."

터억!

 누구라 해도 참을 수 없는 모욕적인 제안. 결국 성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비록 한 손은 속박되어 있었으나, 자유로운 반대쪽 손이 날아들어 레이아의 가냘픈 목덜미를 꽉 쥐었다. 처음 만져보는 그녀의 목덜미는 옷으로 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연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가냘펐다. 조금만 더 힘이 강했더라면 부러뜨릴 수도 있을정도로.

"크으으… 죽여버린다…. 죽여버릴 거야…."

"으긋…."

작고 가녀린 두 손이 성민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분노한 수컷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레이아 역시 범상치 않았다. 목을 조이는 강한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입 밖으로 토해내진 한 줄기 호흡을 제외하고는 켁켁 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독하게 버텼다. 여전히 초점을 또렷이 유지하고 있는 서늘한 보라색의 눈동자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냉정하게 성민을 직시했다. 손목을 잡고 있는 그녀의 두 손에는 처음부터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서, 붙잡고 있다기보단 얹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차갑고 이질적인 모습을 마주한 성민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꽈아악.

"…아."

분노로 온 세상이 시뻘겋게만 보이던 성민의 시야가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온 그의 시각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지금의 상황을 감내하는 레이아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비록 목줄기를 세게 틀어쥔 힘에 의해 자동반사적으로 눈가에 물기가 살짝 맺혀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몸부림 치지도 않았고, 손톱을 세워서 할퀸다거나 성민을 탁탁 두드리며 자비를 구하지도 않았다.  모습을 본 소년은 온몸에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콜록, 콜록…."

간신히 해방된 레이아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고, 침대에 걸터 앉은 성민의 다리 사이에서 기침하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평소였다면 둘의 자세가 묘해서 민망했겠지만, 지금은  다 그런걸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레이아가 호흡을 정돈하자 성민이 먼저 사과했다.


"…미안."

"후우…."

레이아는 여전히 무릎 꿇고앉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치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여러 가지 정제되지 않은 말과 감정을 다스리는 듯했다. 이내 레이아가 일어서서, 처음처럼 침착한 분위기로 침대에 앉아 있는 성민을 내려다보았다.

"이해는 합니다."

"괘, 괜찮니?"

"……."

뒤늦은 후회와 양심의 가책에 성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그녀가 이성을 잃을 만큼 화가 나는 말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게 그녀의 악의겠는가. 이 여자애는 그저 악마 새끼, 박민우의 말을 앵무새처럼 전달할 뿐이었다.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큰 실수를 했다.  작고 가냘픈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성민은 슬슬 몰려오는 미안함과 자괴감에 머리를 벅벅 긁은 후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그런 성민의 진심 어린 사과를, 레이아는.

"하던 얘기나 계속 하실까요."

 듣기라도 한 것마냥, 한 발짝 물러나 성민과 거리를 두고 하던 얘기를 이어 나갔다.

"어? 어어…."

사과마저 무시하는 차가운 리액션에 성민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의 말을 얌전히 듣는 것뿐이었다. 레이아는 목을 졸릴 때와 별 차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성격이 급하시니 거래 내용부터 바로 말씀드리죠. 당신은 당신의 핸드폰에 전송된 한아리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자위하십시오. 물론 정액을 사정해야 자위로 인정됩니다. 그 대가로, 이쪽에서는…."

레이아가 허리를 숙여, 벗어 놓은 외투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약?'

약을 꺼낸 레이아는 종이곽을 뜯고는 특수 포장된 약을 꺼내보였다.

"그게… 뭐지?"

"피임약입니다."

"…응?"

성민은 순간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 바보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자가 임신이 되지 않게 만드는 약입니다."

"아니, 그건 아는데…. ……서, 설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무서운 깨달음. 외통수에 걸린 듯한 아찔한 느낌에 성민이 눈을크게 부릅떴다. 레이아는 마치 장기판에 장군을 두는 듯한 말투로,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

"이쪽의 조건입니다. 당신이 거래 조건을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저희는 이것과 동일한 피임약을 한아리에게 제공하겠습니다."

"……!!"

이, 이, 이, 악마 새끼야아아아!!!

성민은 입을 벌리고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전 거래 기간 동안 당신이 '조건'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보조하고 확인하는 역할입니다. 따지고 보면 감시 역할도 맞긴 맞군요. 모쪼록, 계약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아는 거절이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그녀의 건방진 확신을, 성민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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