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4-2. 개입 (2)
끼익.
성민의 침묵을 수락으로 받아들인 레이아는 아무 말 없는 성민을 내버려두고 방 밖으로 나왔다.
쿵!
문 앞에 서있던 민성이 지나가려던 레이아의 앞을 막았다. 벽을 쿵 치며 팔로 앞길을 막는 민성을, 레이아는 그 특유의 차분한 얼굴로 빤히 응시했다.
"또 목을 졸려야 합니까."
"…아냐. 그럴 생각 없어."
레이아의 뼈 있는 말에 민성은 흠칫하며 자기 감정을 죽였다. 밖에서 모든 대화를 들은 민성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지만, 친구가 벌인 실수를 되풀이 할 생각은 없었다. 터프하게 벽치기를 한 것 치고는 부드러운 말투로, 레이아에게 질문한다.
"미안. 놀랐다면 사과할게. 하나만 확인해도 될까?"
"말씀하시죠."
신분증 잉크도 안 마른 애들한테 연속으로 반말을 듣는 레이아는 그만큼 어려 보인다는 뜻이니 좋아해야 하나,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민성에게 말하라는 듯이 눈썹을 띄웠다. 아무리 어려 보이는게 좋다지만, 애처럼 보인다면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좀 애매하네.
"너도 억지로 그놈 명령에 따르는 거지?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지? 응?"
거의 애원에 가까운 간절한 질문이었다. 레이아는 좀 과한 동안도 자기 매력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민성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저도 하나 묻겠습니다."
레이아의 작고 섬세한 손이 얇은 폴라티의 목 부분을 잡아내렸고, 가려져 있던 그녀의 여린 목덜미가 드러났다. 성민이 온 힘을 다해 목을 졸랐기에, 그녀의 새하얀 목에는 수평선처럼 시퍼런 멍자국이 일자로 새겨져 있었다.
"아…."
"이런 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미안. 정말 미안해. 실례가 많았어."
민성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친구의 돌발 행동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가기는 했다. 그러나 친구보다 침착한 성격인 데다가 당사자도 아닌 민성은 애꿎게 봉변을 당한 레이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앞길을 막고 있던 팔을 거둔 그는 왠지 모를 미안함에, 다시 목을 가린 레이아에게 한 마디 더 건넸다.
"그 멍자국… 괜찮아?"
"당분간은 가려야죠. 이 옷만 입고 살 순 없으니, 목도리라도 하고 있어야겠네요."
"아…."
레이아는 몇 걸음 걸어 나가다가, 고개만 뒤로 돌려서 멍하니 서있는 민성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 멍이 잘 들고 잘 없어지는 체질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레이아를 우두커니 지켜보던 민성은, 그저 그대로 서서 방문 앞을 지킬 뿐이었다.
…
쏴아아….
레이아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맨몸을 투두두둑 때리는 따듯한 물줄기를 맞으며, 벽 너머에 있는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걔는 나를 뭘로 생각할까. 박민우의 충실한 개? 적이라고 생각할까. 아마 그렇겠지. 그런데 어쩌나, 박민우는 날 알지도못하는데.
레이아와 박민우의 접점은 아예 없었다. 레이아는 박민우를 알고 있지만, 박민우는 레이아의 존재조차 모른다. 놈은 여전히 성민의 집에 있는게 성민과 민성, 자기 부하 한 명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진실은 그저, 레이아가 박민우의 비서를 사칭하여 무겁고 우중충한 성민의 집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아리스에겐 미안했다. 그녀가 기분 나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용사의 여자들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플레이'에 허락 없이 개입하지 말것. 그러나 레이아는 지금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성민의 집으로 찾아왔다. 비록 직접적으로 아리스의 플레이에 개입한건 아니었지만, 아직 그녀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성민에게 접촉하고 같이 지내는 것은 명백한 룰 위반이었다.
그리고 이성적이라는 평가와는 정반대로, 레이아가 개입한 데에는 별 근거가 없었다. 그저 '불길한 예감'을 받고 성민을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초월적인 수준의 마나 유저이자 정점에 달한 흑마법사였기에, 그런 예감이 뜬구름 잡는 듯한 허상은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에게도, 용사에게도 말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무리 봐도 분명한 잘못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사실 집을 나와 이곳으로 오면서도, 심지어 성민을 이리저리 휘두를 계획을 세우면서도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러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행동했다. 이성과 논리가 세운 견고한 장벽을 돌파할 정도로 강력한 예감이라고 생각하니, 마치 거대한 힘에 의해 등이 떠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게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다.
남성민.
막상 녀석과 만나자, 행동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소년이 입은 상처는 성숙한 성인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물기는 커녕 상처가 더 깊어져서 좋지 않은 상황을 초래했을 것이다. 아리스는 소년을 달래줄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큐피드를 관리하며 아리스를 지켜보던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소년에게 제안했다.
소년이여, 애인의 포르노로 딸딸이를 치거라.
"하."
피식.
아무리 생각해도 실소가 절로 나오는 권유. 레이아는 이것 만큼은, 아무리 자기 생각이라지만 어이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녀석을 두 번 죽이는 잔인무도한 짓이었다. 마스터라면 좋아 죽겠지만, 네토 취향이 없는 소년에겐 자해밖에 되지 않는 행위였다.
아무리 육감이, 선명한 예감이 이 길이 맞다고 몇번이고 확신을 해줘도 불안했다. 그래서편법을, 마법을 조금 사용했다. 소년에게, 그리고 겸사겸사 자신의 뒤에 있는 소년의 친구에게도 사용했다. 일종의 정신 조작 마법이었다. 마법의 내용은 간단했다. 우선 응급처치로 두 소년에게 모두 진정 마법을 걸었다. 극단적인 감정과 스트레스를 희석하고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정신 마취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조금 조작했다.
만약 그들이 레이아를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지금처럼 극단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 인연 없이 만났다면 어땠을까. 성민이든 민성이든 둘 다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특히 그 나이대 소년에게 있어 여자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새롭다. 절대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아리스에게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레이아가 덜 예쁘게 느껴지진 않는다. '우와, 존나 예뻐!' 이렇게 생각하겠지.
대충 그런 식의 마법을 걸었다. 레이아에 대한 인식에 한해서는, 현재의 상황을 상당히 배제하도록. 마치 길거리에서 갑자기 마주친 것처럼, 현재 상황과 무관하게 레이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도록. 물론 너무 마법의 강도가 세면 갑자기 첫눈에 반해서 들이댈 수도 있으므로, 조금 조절해서. '으으… 상황이 너무 안 좋지만, 그래도 얘는 참 예쁘다.' 이 정도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이렇게 적당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박민우 밑에서 일하는 레이아를, 두 소년은 밀어내기는 커녕 여자로서 신경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쓰레기 같고 잔혹한 거래 조건을 들었음에도, 고작 목을 좀 주물러지는선에서 끝나고 오히려 사과까지 받았다. 심지어 친구 녀석은 더 조심스럽게 대한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만족이었다. 레이아는 더 이상 소년의 정신을 건들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정신계 마법은 안 그래도 어려운 여러 마법 분야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았다. 사람마다 정신이 각기 다르고, 같은 말을 해도 기분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상황마다 마법의 효력이 상당히 달라진다.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레이아조차 최면으로 기억을 잊게 하거나, 지금처럼 생각을 비트는게 사실상 한계였다. 그 이상 가면 대상에게 부작용이 생기거나 마법 자체가 무효화되는 등, 완벽한 성공이 불가능했다.
하라고 한다면 더 할수야 있겠으나, 시간과 노력을 너무 과하게 투자해야 했기에 차라리 그 자원으로 다른 일을 하는게 나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정신계 마법의 이해도가 높은 마법사로서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정신계 마법은 인간에게 허락된 분야가 아니라고. 다른걸 하는게 더 낫다고.
아무튼. 시꺼멓게 물든 마음 속에 숨구멍을 뚫어줬으니, 최악의 미래로 가는 길은 무너졌다. 사람은 간사한 법이라서, 못 견디게 힘들면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성민에겐 레이아라는 새로운 여자가 있으니…. 극약 처방이긴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아리스 때문에 괴로우면 괴로울 수록, 본능은 레이아를 찾겠지.
어둡기만 하던 소년의 앞길에 억지로 난입하여, 최악의 길을 막고 새로운 활로를 열어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커다란 호의였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은 녀석의 몫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가 좋았다.
몸을 구석구석 씻고 멍하니 서서 생각하며 물줄기를 맞던 레이아는 슬슬 나가려 물을 잠갔다. 몸에 남아있는 물방울이 그녀의 몸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수건 걸이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는 순간.
우웅.
허공에서, 마나 유저만 느낄 수 있는 작고 미세한 진동이 한 차례 울렸다. 레이아는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큐피드.
"아."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