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4-2. 개입 (3) (68/162)



〈 68화 〉#4-2. 개입 (3)

레이아는 아리스가 머물렀었던 자신의 새로운 방으로 갈지, 아니면 그대로 욕실에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냥 이곳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방음 마법을 사용했다. 욕실에 가득한 따뜻한 습기가 포근하니 기분 좋았기 때문이다. 아직 수건조차 쓰지 않았기에 몸과 머리카락이 젖어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온몸이 촉촉하게 젖은 채로 태연히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물의 요정 같았다.

[으음, 레이아?]

큐피드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화 기능은 큐피드에 탑재된 수많은 부가 기능 중 하나였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에도 있는 기능이, 레이아가 심혈을 기울여 마법력과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마법 드론에 없을 리가 없었다. 마법으로 통신하는 것이기에 핸드폰처럼 통신망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큐피드는 용사의 관음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였으므로, 여자들끼리 일상적인 통화를 하는데 큐피드를 사용하진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고 아리스가 핸드폰을 압수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것 뿐이었다.

큐피드를 통해 아리스와 레이아가 대화를 시작했다. 화상 통화 기능 역시 있었기에, 남자들에게 신나게 돌려먹혀서 다소 나른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역시 생생하게 화면으로 출력됐다.


"아리스, 잘 들려?"

레이아는 편한 말투로 아리스에게 물었다.


여자들 간의 관계는 지엄한 용사의 강력한 권고로 인해 모두 수평적이었다. 여자들끼리 서열을 나누거나 배척하는 개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용사는 부단히도 노력했고, 여자들 역시 함께 마왕군을 상대하면서 전우애로 똘똘 뭉쳤기에 지금처럼 이상적인 관계가  수 있었다. 때로는 평생지기 친구 같기도 하고, 때로는 굉장히 사이 좋은 친언니 친동생 같기도 했다. 연인이 아님에도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관계였다.

가장 마지막에 파티에 합류했고, 나이도 막내인 레이아는 자기보다 열 살이 많은 아리스나 거기서 한 살 더 많은 델렌에게 반말을 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적응도 됐고, 진짜 가족처럼 느껴졌기에 지금은 반말이 어색하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어색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혹은 막역한 친언니 친동생에게 나이 차이 조금 있다고 존댓말을 주고 받지는 않는 것과 같았다.


아리스는 큐피드로 통화하는 낯선 상황과 더불어 남자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면서 느끼는 정신적 피로로 인해 안색이 묘했으나, 막상 레이아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는지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통화할  있는 상황이지?"

[응. 걱정 마. 여차하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 줄게.]

[외강내유] 스킬로 인해 박민우에게 꼼짝없이 붙들려서 진심으로 수치와 굴욕을 느낀  치고는, 아리스의 표정은 태연하고 평온했다. '유희'의 가면을 벗은 그녀의 본래 얼굴이었다.

몇 시간 전, 레이아는 성민에게 접촉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에게 메세지를 보냈었다. 상황이 되면 먼저 연락해달라고. 그리고 절묘하게도 레이아가 혼자 있는 타이밍에  연락이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긴데?]

"그게…."

….


항상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많은 레이아였지만, 아리스에겐 진솔하게 모든 것을 말했다. 그녀의 '플레이'에 무단으로 개입한 사실과 그에 대한 사과를 했다. 또한 그 근거조차 그저 '안 좋은 예감'임을 말했고, 심지어 용사의 허락조차 받지 않은 완전한 돌발 행동임을 고백했다. 성민을 다뤘던 다소 불쾌할 수도 있는 방식도 숨김없이 전부 얘기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아리스의 얼굴에는 단 한 번도 노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살짝 당황하는 모습은 보였으나, 그건 레이아가 그녀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한 의문일 뿐이었다. 아리스는 용사의 여자들 중 나이는 두 번째로 많으며, 성격은 가장 둥글둥글하고 성숙했기에 레이아에게 사소한 불만조차 표출하지 않았다. 레이아는 그런 그녀의 자애와 성숙함을 체감하면서, 정중한 사과와 함께 양해를 구했다. 꾸벅 머리를 숙이며 사죄하는 그녀를, 아리스는 활짝 웃으며 용서했다.

[괜찮아, 괜찮아. 뭔가 좋은 결과가 있겠지. 그리고 설령 아니라고 해도 뭐, 레이아의 허당끼를 본 셈이니 만족스러울 것 같아.]

"허, 허당…."

충격적인 단어를 들은 레이아는 왠지 이 일을 성공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마구 샘솟는걸 느꼈다. 아리스는 레이아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줌과 동시에 은근히 승부욕을 자극시키는 현명한 처사를 보였다.


"그나저나, 아리스."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자 레이아는 안심하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응?]

"걔가 놓아줄 것 같아?"

[걔? 아아.]

"건방진 새끼 거미."

박민우가 주제로 나오자 아리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역시. 레이아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아리스의 속마음을 읽어내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애들만 놔주고 아리스는 어떻게든 붙잡을걸. 나라도 그럴 거야. 아리스는 엄청 예쁘니까."

[뭐래, 후후후…. 으음, 그럴 지도 모르겠네.]

"흐음…."

박민우가 아리스를 놔주지 않는다는 전개는 꽤나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아는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아리스를 빼낼까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리스를 도와줄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그녀의 정인인 용사와, 큐피드의 책임자인 레이아.


그러나 용사는 요즘 큐피드로 수집되는 여자들의 온갖 영상들을 보고 즐기느라 바빴다. 물론 여자들이 진실로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어디에든 달려나가겠지만, 그러기엔 그녀들이 너무나도 강해서 위기 상황이 없었다. 그리고 여자들도 용사의 도움을 원하지 않았다. 용사를 위해서 기껏 수고하며 '플레이'를 하는데, 용사가 즐기지도 못하고 개입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니까.

레이아 역시 아리스를 도와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못할  없었다. 마법으로 집안에 있는 세 남자를 잠재우고 텔레포트로 별장에 가서 몰래 빼내오면 되니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다. 레이아는 이미 한아리의 '플레이'에 비집고 들어가 박민우의 비서 역할을 자처했으므로, 자신의 룰에 충실해야만 했다. 일개 비서가 삼엄한 감시 하에 억류된 한아리를 구출해낸다?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역시 자력구제였다. 만약 아리스가 [외강내유] 스킬 때문에 정말로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면 몰라도, 그녀에겐 최후의 수단이 있으니까. 어차피 초월적인 힘이 필요하다면, 굳이 레이아의 도움을 받을 필요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게 더 깔끔하고 보기 좋았다. '플레이'가 깨기진 하겠지만, 이왕 그렇다면 당사자가 직접 깨버려야 모양이 사니까.


[그 방법밖에 없네.]

"응. 마스터나 나도  도와주니까."

[그래. 어쩔 수 없지.]

아리스의 저주, [외강내유] 스킬은 다른 저주와는 다르게 실제로 사람을 구속하는 강력한 저주였다. 미라의 [바람기], 지나의 [음탕], 레이아의 [모순], 그리고 델렌의… 다소 민망한 이름의 그 스킬까지, 전부 성적 취향에 큰 영향은 미칠 지언정 실체적 구속력은 없었다.

아리스의 [외강내유]야말로 진짜 저주에 가까웠다. 남자가 수컷으로서 거칠게 들이밀면, 지금의 상황처럼 꼼짝없이 끌려다녀야만 한다. 큐피드를 완성하기 전까진 핸드폰밖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아리스가 이제껏 자유롭게 돌아다닌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구에와서도 비활성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일부 스킬들. 그게 아리스의 보험이었다.

아리스는 지구에서 행하는 용사를 위한 '플레이'를 가장 진지하게 수행해왔다. 언제나 행동과 감정 모두 진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는 지구가 고향인 한아리라는 여자의 역할에 깊이 몰입했기에, 개인적으로는 초감각 등을 쓸지언정 사람을 상대로 마나의 힘을 사용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레이아도 자신의 무단 개입을 고개 숙여 정중히 사과했던 것이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일단은 경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한아리라는 여자가   있는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면, 그녀도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새끼 거미가 남자애들을 풀어주고, 여기에 있는  명도 해방시켜주면 우리도 '플레이'를 끝내자. 아리스, 다시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하도록 할게."

[괜찮다니까. 사과하지 마. 나야말로 막막했는데 해결책을 찾아줘서 고마워.]

"으응…. 아무튼 디데이(D-day)가 되면 난 이쪽 세 명의 기억을 좀 만질 생각이야. 나는 물론이고 아리스에 대한 것도. 남성민은 머리를 좀 오래 만져줘야 하니까, 같이 자거나 해야겠고, 나머지는…. 아무튼, 아리스가 조용히 사라지기만 하면 아무문제 없을 거야. 다 잊을 테고, 인식 방해도 걸어 놓을 테니 설령 나중에 마주쳐도 못 알아볼 거야."

[완벽해, 레이아.]

레이아는 더 말할게 있나 생각한 후 속 시원하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후우, 후련해. 사실 말하기 전까지 마음이  좋았어."

[헤에.]

"물론 아리스가 제일 기분 나빠해야 하지만, 나도 계속 기분이 이상하고 그래서…."

[에이, 잘 했다니까. 아무튼 우리  다 서로 속 편해져서 다행이다.  됐네.]

도합 15분 쯤 되는 시간을 꽉 채워서 얘기했고, 둘은 모든 용건이 끝났다. 타이밍 좋게 아리스 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온다. 이제 끊어야겠어.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지내.]

"응. 안녕."

레이아가 손을 흔들었고, 화면이 암전됐다. 잠시 실체를 드러냈던 큐피드는 다시 투명하게 은폐됐고, 레이아는 아리스에게만 살짝 보여줬던 다정다감한 얼굴을 지우고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후우…."

후련하게 숨을 내뱉은 그녀는 물기가 다 마른 몸에 옷을 걸치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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