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4-2. 개입 (4) (69/162)



〈 69화 〉#4-2. 개입 (4)

레이아는 정적이고 성격도 차분하지만, 지루함 만큼은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현역 시절, 파티에서 나름 참모 역할도 했었던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낭비를 그냥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마치 휴양지처럼 평화롭고 널널한 지구에 와서도 혼자 있는 시간에는 마법을 수련하거나, 이론을 정립해보거나, 마법과 연금술과 지구의 과학을 접목해보는 호기심 바탕의 실험을 하고 지냈다. 그 수많은 연구의 결과물이 바로 큐피드였다.

겉보기엔 얌전해 보이지만, 사실 레이아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활발함을 머리 쓰는 활동에 쏟아부었기에 얌전해 보였을 뿐. 하기야, 따지고 보면 사람에 대한 평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바탕으로 하니까, 그녀가 얌전하다는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성민의 집에 찾아온 후에도 레이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도발을 뿌려대고 있었다. 잔인한 거래로 성민을 좌절시킨 다음 태연한 얼굴로 욕실에 샤워를 하러 간다. 남성민이든 한민성이든, 거실을 떡하니 지키는 떡대든, 누가 넘어오든 상관 없었다. 아예 떡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심심풀이 놀이니까. 마치 자지를 툭툭 건드리는 것처럼 남자의 성욕을 가볍게 자극한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게 은근히 스릴 있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테면 보라지.  봐도 상관 없고.

한아리가 머물렀던  방에다가 옮겨둔 캐리어에서 갈아입을 속옷과 세면 도구를 꺼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앞까지 걸어가는 과정에서 레이아는 입고 있던 민소매 폴라티와 짧은 주름 치마, 그리고 전혀 미덥지 못한 두께의 맨살이 다 비치는 검은 스타킹을 차례차례 벗어서 바닥에 떨어트렸다. 옷 안에 입고 있었던 속옷은 짙은 보라색이라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마치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수치심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갔다.

욕실과 성민의 방은 남자의 평소 걸음걸이로 4~5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비록 문은 닫혀 있어서 성민은 보지 못했지만, 문 앞을 지키던 민성은 가까운 거리에서 레이아가 벌이는 때아닌 스트립쇼를 의도치 않게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눈밭에 누워있으면 절대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순백의 피부와, 마른 체형에 비해 의외로 묵직한 가슴을 받쳐주는 보라색 브래지어가 민성의 눈에 들어왔다. 매혹당하여 그 자리에 홀린 것처럼 서있던 민성은 레이아가 치마마저 쑥 내리자 버럭 호통이라도 들은 아이처럼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성민의 방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본능적으로 눈동자가 아래쪽, 보라색 팬티로 향했다는 사실을 민성은 극구 부정하며 자꾸만 떠오르는 레이아의 골반 라인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 애썼다.

차분한 성격인 민성은, 동류의 느낌이 나는 레이아가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녀를 볼 때마다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할  있는 것은, 지금 여자애한테 눈 돌릴 때냐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는 것 뿐이었다.


….

그리고, 거실에 있던 감시자 떡대는 당당한 자세로 그 모든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의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맴도는 보랏빛 마법의 기운은 수컷의 거친 충동을 강력한 힘으로 억눌렀고, 눈앞에서 옷을 막 벗어대는 음탕한 계집을 덮쳐서 거칠게 자지를 쑤셔박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으윽, 윽…. 으으음…."

이내 성욕으로 범벅이 되었던 수컷의 기운은 빠르게 갈무리됐고, 떡대는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심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칙칙하고 지겨운 감시를 이어나갔다. 그의 머릿속에서 레이아의 보드러운 맨살은, 거부할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의해 빠르게 잊혀졌다.

지나에게 배운, 아니 지나에게서 옮은 레이아의 귀여운 악취미였다.






가까이 있는 욕실에서 들려오는 생생한 물소리. 샤워기에서 나온 물이 어딘가에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성민의 청각을 자극했다. 귀를 막으니  편해지긴 했지만…. 왠지 계속 듣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충동과 더불어, 귀를 틀어막는게 의미하는 것은…. 레이아가 샤워하는걸 의식하고 있냐고 물어보는 듯한 내면의 따끔한 질타가 그를 괴롭혔다. 결국 꽤나 긴 시간 동안 그는 물소리를 들으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저건 떡대가 씻는 소리다. 좆같은 새끼가 더러운 몸을 씻고 있다….'

"푸하하하!"

타이밍 좋게도 거실에 있던 떡대가 TV를 보고 폭소했다.

'시발….'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성민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눈 돌아가게 예쁜 레이아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아리 누나를 잃었기에 느끼는 상실감과 괴로움, 무력감 등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중간중간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처럼 아리 누나의 얼굴이 떠올라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시간이라도 빨리 지나가긴 했다. 괴롭고 혼란스러웠지만, 눈 떠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지금도 아리 누나는 그 놈들에게….'

잠시 망각했던 사실을 떠올리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마치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괴로움보단 무력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을 피할  없다면, 나라도 좀 덜 괴로운게 낫지 않나?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흠칫.

점점 무너지는 마음을 지키고자 방어 기제로 떠오른 이기적이고 간사한 생각. 배신! 배신이다! 그토록 혐오하던 배신의 유혹에 넘어갈 뻔한 성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니가 사람이냐? 아리 누나가 누구 때문에 그 꼴이 났는데!'

짝, 짝, 짝.


자기 뺨을 수차례 때린 성민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볼이 얼얼했다. 그렇게 세게 때려야 했을 정도로 마음이 혹했다는 사실을, 성민은 애써 외면했다. 사람의 이기심은 소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하고 달콤했다.

똑똑. 끼익.

허락은 듣지도 않고 바로 들어오는 레이아. 노크는 그저 들어간다는 통보에 불과했다. 그녀는 톡이 오면 알려주겠다며 성민의 핸드폰을 가져갔고, 지금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성민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레이아는 문을 지키던 민성을 간단한 눈짓으로 쫓아낸 후 사무적인 표정으로 통보해왔다.

"계약 조건을 이행하실 시간입니다."

올 것이 왔다.


성민은 가슴이 꽉 죄여 오는 것을 느끼면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잠깐만."

핸드폰을 확인하기 전에, 성민이 레이아를 보았다. 말 해보라는 듯이 눈썹을 띄우는 레이아에게 성민이 확인을 요구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확인을 받아내야겠어."

"무엇을요?"

"그 피임약… 효과 확실하지?"

마치 교복을 연상시키는 흰색 와이셔츠와 남색 치마로 갈아입은 레이아는, 이해한다면서 아까 보여줬던 피임약을 꺼내보였다.

"분명히 말씀드리죠. 저희는 당신이 조건만 이행한다면, 이것과 같은 약을 한아리에게 제공하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성민이 미처 반응도 보이기 전에  알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꿀꺽,  차례 움직인 후에야 성민이 화들짝 놀란다.

"어엇? 어…."

"자. 먹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아 벌리는 레이아. 성민은 당황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분홍빛 입안에 들어간 약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치아와 분홍빛 혀는 마치 장인이 만들어낸 것처럼 완벽했다. 나름대로 속살이라고 할 수 있는 입 안을 본 성민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웃기지만, 믿어주십시오. 적어도 이런 걸로 속이진 않습니다. 한아리가 임신하면 저희 입장도 다소 귀찮아질 염려가 있어서."

"…그럼 그냥 먹여주면 안 되나."

"유감스럽게도, 불가합니다."

레이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성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네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렇게 자신을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는 성민을 보며, 레이아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녀석은 피임약이 무슨 마법의 약이라서 먹기만 하면 임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바보잖아? 그렇지만…. 차라리 아예 멍청해서 나름 귀여운 면은 있었다. 요즘 애들에겐 보기 드문 순수함이 있었고, 또 순진하다보니 속이기가 쉬워서 좋았다.


사실 성민이 다른 애들보다도 특별하게 무지한건 아니었다. 그 나이대의 남자애들은 성욕은 지대하지만, 막상 성지식은 별로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니까. 그나마 여자애들은 임신하는게 자기 몸이기 때문에 대체로 최소한의 지식은 있었지만, 남자애들은 자기 일이 아니다보니 실감을 못하는 면도 있었다.

레이아는 방금 삼킨 '영양제'가 뱃속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설마 사전피임약과 사후피임약 같은 것도 모르는건가. 물어보지도 않네? 알고 있는 피임법이라고는 콘돔이 전부인 애송이니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다가도 나이를 좀  먹고 머리에 냉혹한 사회의 물이 들면 갑자기 어른이 되면서 성숙해지는게 남자들의 재밌는 특징이었다. 문득 용사, 마스터의 철없는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눈앞의 모르는 애도 순진한 모습이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데, 사랑하는 마스터라면… 상상만 해도….


"하아…."

"힘 내…."

레이아의 한숨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성민은 자기 혼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며 멋대로 억측했다. 현실로 돌아온 레이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이제 좀 믿음이 가시는지."

"…후우, 그래. 믿지 못하면 어쩌겠어."

"그럼 이제 시작하시죠."

그 말에 성민은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또다시 질문했다.

"설마 진짜로 네가 다 보는 거야?"

"네?"

"그, 내가 자, 자위… 하는거 말야…."

"네."

쿨하게 한 글자로 단답하는 레이아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어렵게 말을 꺼낸 성민과 대조되는 태도였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바뀐 듯한 묘한 분위기 속에서, 성민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핸드폰과 레이아를 번갈아가며 봤다.

"저기."

답답하게 구는 성민을 레이아가 재촉했다. 그제서야 마구 움직이던 눈동자를 멈춘 성민이 레이아를 멍하니 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빨리 하시죠. 벌 서는 기분이 듭니다만."

"그게, 말처럼 쉬운게 아냐…."

"후우…."

시종일관 정자세로 서서 아랫배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있던 레이아가  한숨을 내쉬며 성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 뭐야."

"좀, 하시, 지요."

그토록 얌전해 보이던 레이아가, 성민의 아랫도리에 거침없이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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