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4-2. 개입 (13) (78/162)



〈 78화 〉#4-2. 개입 (13)

 말에 민성이 홱 고개를 앞으로 돌려 레이아를 마주보았다. 아직 뒷말을 못 들었기에 단정지을 순 없었지만, 친구를 농락한 거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굳은 심지를 보였다.


그래, 이제야 좀 남자답네. 너무 딱딱하기만 하면 재미 없잖아. 레이아는 배시시 웃으며 가슴팍에 올려두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자연스레 고정되었던 수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으윽! 뭐하는 거야!"

"헤에. 뚫어져라 보시길래, 보고 싶다는줄 알았죠."

"씨발, 장난치지 마. 네가 방금  말이 무슨 뜻인지나 설명해."

민성은 화가 났으나, 모든살결을 드러낸 나신의 레이아를 차마 마주보진 못했다. 레이아는 빙긋 웃으면서 민성에게 조금씩 다가가며 말했다. 민성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진실 반, 거짓 반. 성민이를 위로하는 임무를 받은건 맞지만, 사실 한 가지 임무가 더 있지요."

"…뭔데. 거기 서서 말해."

어느새 등이 벽에 닿은 민성은 그녀를 제지하려 했으나, 손을 뻗을 수도 없었기에  뿐이었다. 그런 소극적인 태도에 레이아가 씨익 웃으며, 상체를 민성에게 밀착시켰다. 그의 얇은 긴팔 실내복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의 살이 맞닿았다. 민성이 숨을 들이켰으나, 레이아는 태연한 얼굴로 얼굴마저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연인에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제가 할 일은, 당신들을 '전부' 입 닫게 하는 것이랍니다. 저기서 자고 있는 남성민 뿐만 아니라, 한민성 당신도요."

"미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납득이 갈만한 내용이었다. 성민이 당근을 문다고 한들, 민성이 입을 열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레이아는 여전히 저항하는 민성에게 거부할 수 없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근데 당신은 너무 딱딱해요. 벽이 느껴져. 제가 안아달라고 해도 무시하겠죠? 밀고 당기기는 성민이한테 한 거면 족하니까, 당신에겐  세게 나갈게요."

입술 사이를 혀로 슥 핥은 레이아가, 요염한 보랏빛 눈동자를 빛냈다. 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일단, 저와 조용히 섹스하고 입단속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근데 눈빛만 봐도 순순히 그러진 않겠네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제 진짜 임무를 솔직하게 성민이에게 다 말하는 거죠. 네 친구 민성 님도 몸으로 달래줘야 한다고. 근데 튕기니까 좀 도와달라고."

"…씨발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민성은 울컥하는 마음에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품 안에 안겨 있던 레이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자기 목덜미를 톡톡 가리켰다. 성민에게 목이 졸렸던 것을 암시하는 행동이었는데, 즉 화를 내는 대상이 잘못됐다는 지적이었다. 외통수에 찔린 민성은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미안하다. 말실수를 했어. 넌  일을 하는 거고, 씨발년은 박민우 새끼였지. 욕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흥. 신경도  쓰이니까 당신도 미안할  없어요. 선택이나 하시죠."

민성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한동안 침묵했다. 같은 집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있었기에, 그는 성민과 레이아의 관계 역시 꿰뚫고 있었다. 한아리의 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성민은 레이아의 신세마저 망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한두 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리와 계산이 있었지만 어쨌든 레이아를 받아들였다.

 후로는 사실상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금기로 지정한 선을 넘어버린 성민은 꾹꾹 눌러 참아왔던 것을 한 번에 분출하듯이 레이아에게 매달렸다. 마치 그녀가 없으면 숨도 혼자 못 쉴 것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상당히 의존했다.

한아리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성민이 아리에게 최종적으로 바랐던 것은 결국 몸, 섹스였다. 일상적인 대화로 친밀감을 쌓아 올렸던 것은 물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섹스를 위한 발판을 쌓아올리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레이아에게 소년이 바라는 것은 마음이었다. 마음을 달래줄 연인. 물론 육체 관계 역시 원했으나, 아직 마음 속에는 한아리의 그림자가 있었기에 키스라던가, 대딸 등의 유사 성행위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전부 대화나 가벼운 스킨십 등으로 다친 마음을 치유하는데 사용했다.

그렇게 의존하는 여자친구를 불알친구와 공유해야만 한다. 안 그래도 죽도록 마음고생을 한 성민이 그 사실을 알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친구의 가슴에 비수를 꽂던가, 아니면 몰래 친구를 배신하던가.


정말 엿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알았어.  말대로 할게."

"그럼 키스부터 해볼까요? 성민이랑 했던 것처럼. 후후,  감아 봐요."

"…하아, 씨발…."

마치 재채기처럼,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을  없었다. 민성은 순순히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상체를 부드럽게 누르던 레이아의 몽글한 가슴이 점점 위쪽으로 움직였다. 레이아가 까치발을 들고 민성에게 키스했다.


쪼옥. 키츗. 쪼옥, 츄. 츄웁….

성민과의 키스가 서로 열심히 혀를 얽는 모양새였다면, 민성과의 키스는 레이아가 일방적으로 소년의 입과 혀를 탐하는 모양새였다. 민성은 적극적이고 테크닉 좋은 여자에게 키스를 받아보는게 처음이었는지, 은근히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찰칵.


"웁? 무슨…."

익숙한 사진 촬영 효과음. 민성이 눈을 뜨니 레이아가 천진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서로 키스하는 사진이 아주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서로 혀가 깊숙히 얽혀 있고 투명한 침이 늘어진 완벽한 타이밍에 사진을 찍어서, 누가 봐도 레이아와 민성이 열렬히 키스하는 모양새였다.

"무슨 짓이야."

"성민이는 이미 제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됐지만, 당신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요. 약점을 좀 잡아야겠어요."

"네 말대로 해준다고 했잖아! 왜…."

"전 저의 일을 할 뿐이랍니다?"

마치 놀리는 듯한 말투.  방 먹은 민성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레이아는 빙긋 웃으며 다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마음 같아선 밀어내고 싶었으나, 명백한 약자의 입장이 된 민성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키스해야만 했다.

잠시 후, 둘의 입이 떨어지고 침으로 이루어진 실이 둘의 가슴팍에 각각 떨어졌다. 촉촉히 젖은 레이아의 입술을 보던 민성이 자기 입술을 손등으로 스윽 닦으며 말했다.

"이게 네 본모습이야?"

"글쎄요. 진짜 모습이 뭔데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지로 일하는 모습은 아니야."

"제가 여기로 파견된 이유가 있지요. 모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민성 님?"

레이아의 미소.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으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녀의 미소는 사악해 보이지 않고 그저 해맑았다.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녀 같았다. 그녀에게 과연 속아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사진은 앞으로도 종종 찍을 거니까, 모쪼록 협조해 주시길."

 이상, 욕은 나오지 않았다. 민성은 방을 나가는 레이아를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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