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009)

수면에 숨어든 어쌔신처럼 눈만 물밖에 내놓았다. 프랑은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쑥쓰러워 하다가 화제를 되돌렸다.

“하지만 그런 거면 마법사 길드에는 빨리 가 봐겠다.”

“…그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 맨얼굴을 까고서라도 가 봐야지. 병세는 초기처치가 가장 중요하니까.”

프랑이 먼저 숨통을 틔워주려 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나도 얌전히 수면 밖으로 나와서 대답했다. 그녀는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그냥 내가 잠 안 자고 수선을 할까? 드워프는 일주일 쯤 안 자도 안 죽어!”

“그로지말자….”

대체 왜 죽는 걸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주량도 먹고 뒤지기 직전까지를 한계로 카운트하는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까 농담 같지가 않았다.

내가 이번에도 고개를 젓자 프랑은 욕탕 바닥에 앉아서 물장구를 치며 고개를 모로 꼬더니,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면서 소리쳤다.

“맞아! 이러면 되겠다! 오늘 의뢰를 펑크 내고 남는 시간은 하루 종일 옷 수선에 쓰는 거야!”

일을 펑크를 낸다고? 나는 도저히 프랑이 말할 것 같지 않은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펑크낸다니? 오늘 의뢰를 째겠다는 소리야?”

“응! 아, 하지만 그래도 접수처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텐 말을 전해놔야겠지?”

성실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건 땡땡이를 치겠다는 사람의 말이었다.

나는 프랑의 변화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일부 여성들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예전의 성실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데, 프랑도 그런 성향이 있나?

‘이러다 나중에 염색도 하고 피부도 태닝하는 거 아냐?’

나는 금발 태닝 하프 드워프 양아치 프란체스카를 상상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 지랄이 났다가는 여관 주인 베이냐 씨가 취사장에서 쓸 법한 요리용 삽을 들고 내 머리를 필라멘트 전구처럼 와장창 파사삭 하게 만들러 올 것이었다!

“관둬. 일을 펑크냈다가는 승급에도 지장이 올 거야.”

“나는 상관없는걸? 이제는 더 이상 접수원을 목표로 삼는 것도 아니구. 그리고 다른 것보다─.”

프랑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모험가로서는 노르보다 선배니까 먼저 승급할 텐데, 나 혼자 먼저 브론즈 플레이트를 달아서 뭐하겠어? 난 조금 승급이 늦어져도 노르랑 같이 일하고 싶은 걸?”

천사다.

존나 여기 천사가 있다.

나는 후광마저 느껴지는 프랑의 메르시(Mercy)함에 눈이 멀 듯 하여 두 눈을 굳게 닫았다. 시발 여기가 커플 전용 목욕탕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물가였구나. 감동에 몸을 떨며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노르. 울어?”

“흐흐. 울기는. 내가 왜 울어? 우리 나라에서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우는 거랬어. 훌쩍.”

그러니까 이것은 눈물이 아니다. 그저 감동받으면 나오는 마음의 쿠퍼액에 불과하다.

마음의 쿠퍼액은 주로 생리현상으로 분류된다. 하품하면서 찔끔 나온 눈물을 가지고 울었다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흐흑….”

나는 프랑의 한없이 커다란 사랑에 마음의 쿠퍼액을 줄줄 흘리며 감동했다. 이것은 거의 모성에 가까운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목멘 성대가 울음소리를 냈다.

“마망….”

“마망?”

“…………….”

야 이 시발 성대 새끼야 진짜로 소리를 내면 어떡해.

“아, 아니. 프랑?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뇌에서 필터링도 안 거치고 튀어나온 멘트에 울음이 뚝 그쳐버리고 말았다!!

시발 이건 쬐끔 많이 에바였다. 남자친구가 마망 소리를 하는데 정이 안 떨어지는 여자는 없다. 엄마 맘마조 같은 개드립은 인터넷에서나 해야 하는 법이었다!!

‘마망이라니? 시발 마망이라니?’

이건 존나 육성으로 말하면 정색을 넘어서 기겁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말이었다!! 이럴 때는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더 알아듣기 쉽다!!!

─파파. 나 자지 조. 하움. 쯉쯉.

만약 여친이 자지를 물고 빨면서 저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라!! 거기서 쥬지가 빨딱 서는 것은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자가 여친한테 마마 쮸쮸조 하는 것은 저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마망…. 마망…?”

나는 뭐라고 변명을 해 보려 했으나, 프랑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중얼거리더니 금방 고개를 들었다.

“흐음~?”

프랑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짖궂은 웃음과 함께 숨기지 못할 즐거움이 엿보였다.

그리고 프랑은 두 팔을 벌리더니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마마에요!”

“……뎃?”

욕탕의 단차에 앉아 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춘 프랑.

그것은 처녀수태의 마리아상과 같은 자애를 가진 나만의 성모였다!!

“프랑 마망…!!”

나는 그런 프랑의 모습에 마음 속 잼민이가 울부짖는 것을 느꼈다. 멈춰있던 마음의 쿠퍼액이 도로 줄줄 흘러넘쳤다.

프랑의 모성은 크기 만큼이나 부드러웠다.

크, 이게 섹스지.

10시 반 쯤 되서 나랑 프랑은 목욕탕을 나왔다.

“다음 이용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리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 접수원한테서 얼른 도망쳤다.대낮부터 섹스 삼매경에 빠졌다는 사실을 남이 훤히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등 비할 데가 없는 부끄러움을 선사했다.

그렇게 창창한 푸른 하늘 아래로 나온 우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밥 먹을까?”

“…그럴래?”

내 제안에 프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포도주를 마셔대고 과일을 집어먹었지만 그것 말고는 하루 종일 굶었으니 더럽게 배가 고팠다.

“내가 싸고 맛있는 집 아는데. 그런데 양이 많아서 나는 늘 다 못 먹고 따로 챙겨가.”

“거기로 가자. 지금이라면 프랑 네가 남긴 것도 포함해서 1.5인분 먹고도 남겠어.”

“응, 알겠어. 이쪽이야.”

프랑을 따라서 근처 가게로 들어가 음식을 적당히 시키고 식사를 마쳤다.

맛은 도르카네 여관 쪽이 나았지만 가성비는 이쪽이 더 낫겠다. 비유하자면 만원짜리 갈비탕이랑 5천원짜리 막국수. 어느 쪽을 고를지는 개개인의 취향일 것이었다.

나는 식사를 마친 뒤에 스푼을 내려놓고 말했다.

“프랑. 나도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네가 받은 의뢰는 내가 대신 나가도 되지 않을까?”

“노르가?”

“응. 나는 오늘 비번이고, 프랑이 네 옷을 손봐주는 동안 내가 대타를 뛰고 오면 아예 펑크를 내는 것보다는 페널티가 덜 하겠지.”

일종의 대타출동이다. 일 나름이겠지만 그냥 잡무에 불과한 의뢰에는 내가 대신 나가도 상관이 없다. 아딱이한테 프랑급 손재주나 자물쇠 따기 능력을 바란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그러자 프랑은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오늘도 하수도 의뢰인데?”

“…………괜찮아.”

나는 여치들과의 PTSD가 재발하는 것을 느꼈지만 근성을 보여서 참아냈다. 남자들이 여친 앞에서 가오를 잡다가 사고를 치는 이유를 잘 알 것 같았다.

‘씨이이이발!! 트라우마 까짓거 다 좆까라 그래라. 공포는 직접 맞서서 이겨냄으로써 치료하는 것이다!!!’

정신병 의사가 들으면 클로로포름을 안면에 퍼붓는 일이 있더라도 말리려 들 개소리였다.

하지만 이세계에 정신과의는 없다. 프로이트 당신은 여기서 한낱 변태할배에 불과해!!

─덜덜덜덜덜덜.

“다다녀녀올올게겍게!!”

“조, 조심해야 돼?”

그렇게 나는 얼어붙은 깃발을 휘날리는 핏빛 율법의 데스나이트와 같이 용맹함을 뽐내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방에서 장비를 챙기고 모험가 길드 접수처에 들려서 대타 얘기를 전해준 다음에 12시까지 출근이다. 시간적으로는 적당히 여유를 부릴 정도는 됐다.

─뻐끔.

여관으로 돌아오니 도르카가 멀거니 카운터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 새끼 일 안 하냐? 아, 손님이 없군.

“이게 누구야. 우리 여관에서 제일 가는 손 큰 손님이 돌아오셨군 그래.”

흉악무비한 얼굴의 여관 주인은 나를 보고서는 히죽대며 신문을 접었다.

“내가 왜 손 큰 손님이야. 라임 오지네.”

“공짜 아침식사도 거르고 외박까지 하잖냐. 너만큼 돈 안 들고 벌이에 보탬이 되는 손님이 없어요.”

“아, 그건 모험가라 어쩔 수 없지. 어제도 일 갔다 왔어.”

“크크크. 웃기고 있네. 갑옷이랑 무기도 두고?”

내가 그리 말하자 도르카는 가당치도 않다는 것처럼 신문으로 내 몸통을 가리켰다.

“별로 위험한 일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몸만 갔다 왔지.”

“네가 어디 그럴 위인이냐? 배달일 갈 때도 중무장으로 나갈 놈이 무슨.”

“어허. 이 아저씨가 나랑 와꾸 튼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실까? 댁 눈에는 내가 뭐 어떤 놈으로 보이시길래?”

“잡생각이 많아서 가까운 문제를 놓치는 타입이지. 멀리 있는 바위 뒤에 몬스터가 있을까 걱정하느라 발치의 돌에 걸려 넘어지는 놈 말이야.

“아니 씹.”

존나 정확한데?

내가 반박을 못하자 도르카는 낄낄대면서 말했다.

“자각은 있나 보군. 앞으로는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찾아 봐. 왜 이런 말도 있잖냐. ‘거인에게는 어깨에 올라탈 소인이 필요하다’고.”

“처음 듣는 말인데.”

“너 같은 타입한테는 꼼꼼하고 남을 잘 보살피는 사람이 있어줘야 한다는 거다.”

도르카는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기 어깨를 툭툭 쳤다.

“거인과 같은 방향을 보면서 거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 거인의 발에 뭉개지지 않고 거인의 귀에 말을 들려주는 소인(小人)이 말이야.”

“거인이라. 내가 이래저래 빅(Big)한 남자이긴 하지.”

“거인이란 표현은 그냥 비유니까 과한 자부심은 관두셔.”

“나는 자신감 빼면 시체인데? 나더러 뒤지라는 것인가?”

“얼씨구. 어째 가끔씩 골이 비어 보이더라니.”

“공백이란 이제부터 채워나갈 공간을 말하지. 세계 최고의 명화(名畵)도 빈 캠퍼스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거 주댕이 놀리는 걸 보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네. 그래도 네가 서커스단 단원이 아니라 모험가로 롱 런할 생각이라면, 등을 맡길 동료는 꼭 있어야 돼.”

굵직한 도르카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에 난 커다란 상처를 훑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려 드는 건 오만이다. 나만 해도 바쁜 밤 시간대에는 서빙이나 가게 운영을 아내한테 맡긴다고. 사람이 같은 꿈을 꾸지는 못하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잘 수는 있는 거 아니겠냐?”

“이 시발 세상에!! 단어 사이사이로 지성이 느껴지잖아!! 너 이 새끼 도르카 아니지? 내 친구의 몸을 돌려줘!!”

“크크크. 포기해라. 대신 이거라도 받아가시지.”

도르카가 두툼한 포장지를 던졌다. 약간 향기로운 것이 딱 봐도 훈제 육포였다.

“내가 여관업 하면서 3쿠퍼 내고 아침을 그렇게 걸러대는 새끼는 니가 처음이다. 내가 양심이 찔려서 따로 빼놨다. 스튜에 넣고 남은 거니까 그거라도 쳐먹어.”

“이제 하수도 갈 거라서 오늘은 못 먹음. 그래도 매우 땡큐베리머치합니다.”

“야야. 파리가 날리는 시체 옆에서도 하루 세 끼 다 챙겨먹을 수 있어야 진짜 모험가다?”

“호오. 도르카여. 내가 가짜 모험가라는 걸 간파하다니 꽤 하는구나. 경의를 표해서 이 고기는 내가 받아가마.”

“크하하하! 하여간 미친 놈.”

내가 기묘한 자세를 취하면서 말하자 도르카가 웃음을 빵 터트렸다. 나는 그를 따라서 낄낄대다가 한 마디 했다.

“흐흐흐. 아, 그리고 네가 말한 소인 운운하는 것 말인데. 딱히 찾을 필요는 없을 듯.”

“뭐? 왜.”

“──갔노라. 보았노라. 얻었노라.”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도르카는 존나 흥미 돋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히죽 웃었다.

“너 이 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야! 갔다 와서 얘기나 좀 해 봐!”

“1쿠퍼입니다, 손님.”

“하, 망할 놈. 훈제 따위 챙겨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나는 씨발데레 도르카와 낄낄대며 헤어졌다. 방에 가서 훈제를 두고 갑옷이랑 검을 챙겨서 길드에 대타를 뛰고 온다는 취지의 보고를 때렸다.

“알겠습니다. 프란체스카 씨는 이번 의뢰의 파티장도 아니셨고, 아예 펑크내는 것보다는 낫죠.”

접수원은 탐탁찮아 했지만 대타 자체는 허가해주었다.

“그래도 프란체스카 씨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평가에 흠이 생길 거라고요. 이번 일의 실적도 노르드 씨에게 넘어갈 겁니다.”

아예 대리랭처럼 남한테 대타를 시키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그렇게 조치를 끝내고 집합장소로 이동해 의뢰에 착수했다.

다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의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래도 이 날 있었던 하수도의 풍경에 대해서는 그닥 묘사하고 싶지 않다.

“구와아아아악!!! 개씨발 그레이트 빅 여치 스테이크다!!!!”

이 좆 같은 모험가 새끼들이 일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하수도 곳곳에 여치 구이 미디엄 레어가 그득그득 하더라. 존나 유독 가스 투성이인 곳에 화염방사를 해대면 어쩌잔 거야. 이 씹새끼들.

아무튼 내가 다시는 여기 하수도에 오나 봐라.

시발 냄새는 존나 고소한 것이 2배로 더 빡쳤다.

“완성했어!”

멘탈이 씹창난 상태로 ‘무타라트의 아이들’로 돌아오자 프랑이 말했다. 나는 지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로브의 모습에 감탄했다.

“오오…. 멋지네….”

“헤헤헤.”

목욕탕에서 욕을 쳐먹어가며 씻고 우리 여관에서 세탁까지 마치고 오느라 기운 없는 대답이었지만 프랑은 만족한 듯 했다. 자신을 가질 만큼 멋진 로브이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그냥 두기에는 밋밋하길래 실로 자수도 해 봤어! 검은 실이니까 어두운 곳에서 돌아다녀도 티는 안 날 거야!”

프랑의 말처럼 그냥 목욕가운 같던 검은 로브는 긴 망토와 그 안의 로브로 나뉘었으며, 접힌 포인트를 넣어서 간지나게 만들고 곳곳에 검은 실로 장식을 넣었다.

대충 봤을 때는 그냥 세련된 로브지만 유심히 보면 정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는 옷이었다.

“고마워, 프랑. 정말로 마음에 든다.”

“노르가 입을 옷이라고 생각하니까 잘 만들어 지더라.”

프랑을 끌어안고 감사를 담아 뺨에 키스하자 프랑은 수줍게 웃었다.

“아, 남는 천으로 장갑도 만들어 봤어. 이것도 껴 봐. 세상에는 손 모양만 가지고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도 있대.”

“흐흐. 어차피 난 그런 사람들이 아니어도 피부색 때문에 장갑은 껴야 돼.”

프랑이 준 까만 장갑을 받아서 껴 봤다. 손에 딱 맞았다.

“크, 완전 딱 맞네. 내 손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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