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라니? 몇 번 만져보기까지 했잖아.”
아니 그런 걸로 어떻게 아냐고. 나는 네 가슴을 실컷 만졌지만 사이즈는 가늠조차 못 하고 있는데.
내가 내심 드워프의 치트 능력에 연전연승의 간판을 달아주고 있으려니 프랑이 내 옷차림을 살피고서 물었다.
“갑옷은 안 가져왔어? 이 로브 갑옷 입고도 입을 수 있게 만들어서, 시착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냄새가 덜 빠져서. 앞으로 탈취제를 사 오든가 마법을 배우든가 해야지.”
“응? 노르, 마법도 배우려고?”
“할 수 있으면.”
아무튼 완성된 옷을 입어 봤다. 입는 것은 프랑이 도와주었는데 혼자서도 입기는 어렵지 않았다. 완전히 입고서 거울 앞에 섰다.
프랑의 여관방에 있는 것은 금속 거울이었다. 이쪽 세상에는 보편적인 물건이다.
“잘 어울려, 노르!”
“흐흐. 누가 만들어 준 건데, 당연하지. 그나저나 가면은?”
“아, 가면은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조각은 처음이라 감을 잡기까지 시간이 걸렸어.”
“…저거 아냐?”
나는 침대에 깔린 천 위를 가리켰다. 톱밥과 조각칼 옆에 놓인 나무 가면은 이미 형태가 거의 다 잡혀 있었다.
“응! 이제 색칠하고, 말리고, 천에 끼워서 머리에 쓸 수 있게 만든 다음에 자수만 더하면 끝나! 그래도 말리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내일 아침쯤에나 써볼 수 있을 거야.”
“아니, 하루 걸린다는 얘기가 말리는 시간 포함이었냐.”
“헤헤. 약간 시간에 여유를 뒀었어. 나도 가면에 염료를 발라본 적은 없었거든. 다 마를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는 잘 몰라.”
로브 수선에 가면 제작까지 고작 반나절인가. 프랑의 솜씨는 이제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로브 입고 이리저리 움직여 봐. 불편한 데 있음 말하구.”
나는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청동거울에 여기저기를 비춰보았다. 언뜻 코스프레 복장 같기도 한데 퀄리티가 높아서 그런지 꽤 멋있었다.
“벡터-근엄하게 말하기.”
지구용사의 오의를 발동했다. 이것은 벡터-목소리 깔기보다 더 상위의 기술이었다.
이렇게 성우 뺨치는 근엄한 목소리까지 갖추자 거울 속의 다크 히어로는 갖추자 압도적인 간지를 뿜어냈다.
시발 이걸로 이세계 특촬물을 찍는 날에는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을 텐데. 빌어먹을 이세계 정보통신. 뭔 시발 플라잉 편지가 초고속 통신 수단이야.
“흠. 가명도 정해 둘까. …아서 웨인은 어때?”
“아서 웨인?”
작업장갑을 끼고 가면에 염료를 바르던 프랑은 입에서 그 가명을 몇 번 웅얼거리더니 키득키득 거리며 웃었다.
“아서 웨인. 좋은 울림이야. 노르랑 잘 어울린다.”
나는 프랑의 평가가 칭찬인지 아닌지를 한참 고민했다. 칭찬 맞겠지?
“그럼 아서? 가면은 이걸로 어때?”
가면 뒤에 손잡이를 달고 색칠을 마친 프랑이 말했다. 하얀 색으로 칠이 끝난 짐승 가면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퍼펙트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그럼 이대로 완성할게?”
“그래 줘. 얼마나 더 걸려?”
“음, 글쎄? 말린 다음에 천을 붙여야 염료가 안 묻으니… 이것만 다 칠하고 내일 마저 마무리하면… 되는… 데.”
프랑을 설명하다가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 말을 듣던 내가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 원인이었다.
─훌러덩.
“기다릴게. 천천히 해.”
“…빠, 빨리 끝낼게.”
프랑은 말과는 달리 내 알몸을 힐끔힐끔 훔쳐보느라 작업 속도가 더뎌졌지만, 그날 중으로는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늘 낮에 하다 만 섹스도 실컷 즐겼고 말이다.
다음날, 코스튬을 완전 장비한 나는 마법사 길드에 왔다.
“이 바닥의 국룰대로 탑 형태일 줄 알았거늘.”
나는 벡터-근엄하게 말하기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소리를 내어 말했다.
마법사 길드라는 말만 듣고 당연히 매지컬한 느낌의 탑일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방문한 마법사 길드는 의외로 멀쩡하게 생긴 곳이었다.
‘존나 대학부지 같아서 PTSD 도질 것 같애.’
철창으로 된 길드 정문에는 경비가 서 있고 안쪽에는 푸른 잔디밭이 엿보였다. 꽤 넓은 지역을 통째로 길드 부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휘이이잉─.
그때 바람이 불어서 내 로브의 망토를 휘날리게 했다. 그 근엄한 모습에 지나가던 모험가 차림의 남자들이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야. 저기 저 꺼먼 놈 봤냐? 뒤지게 무섭게 생겼네.
─이 씹새야! 조용히 해! 들리면 어쩌려고 그래!
“않이 왜지.”
근엄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는 나. 어딜 봐도 멋지기만 한데. 설마하니 무섭다는 인상을 줄 줄은 몰랐다.
‘얕보여지는 것보다는 나은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로브라고 하는 옷은 퀄리티에 따라 패딩과 양복을 오가는 옷이었다. 손이 많이 들어가고 좋은 원단을 쓴 로브는 양복이지만 그러지 못한 로브는 패딩이었다.
아무 로브나 입었다가는 그냥 집 앞 편의점 갈 때 옷 챙겨 입기 귀찮아서 입은 패딩처럼 꼴 사납게 보일 수 있다.
암튼 좆밥으로 보이지만 않으면 됐다. 나는 브로치를 제대로 맨 것을 확인하고 길드 앞을 경비하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하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내가 브로치를 내밀며 용건을 밝히려고 한 순간이었다.
“이놈, 도적이렸다!!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끼요오옷!!”
기합과 함께 경비원의 창이 날아왔다.
슈슈슉!!
재빠른 3연격! 창날은 없었지만 목, 명치, 그리고 부랄을 노리는 잔혹무도한 습격이었다!! 저걸 맞았다간 호흡장애 고자새끼가 되어 버린다!
나는 그야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기에 정신이 나가버릴 뻔 했지만, 거듭된 실전으로 단련된 반사신경을 최대치로 발휘해 공격에 반응했다.
“영천류(影天流) 벽계(碧溪)!!!!”
채앵!!
빠르게 뽑아든 검으로 창을 쳐낸다. 3연격이고 지랄이고 결국 창은 하나다! 후려쳐 버리면 연격은 의미가 없다!
“크윽! 듣던 대로 도적답지 않은 힘!”
“허나 우리 세 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사살 허가를 받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도적!”
내가 공격을 쳐내자 다른 경비병 놈들까지 달려와 창을 겨눴다. 나는 그 행태에 어이가 나가버렸다.
“이 시발 무릎장애 놈들이 누구한테 도적이래!”
이 시발롬들이 무슨 착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면서 훔쳐본 것이라고는 초등학생 시절 짝꿍이 가져온 제티 뿐이었다!!
차라리 도둑질을 당하면 당했지, 해 본 적은 없었다!!
어릴 적 운동회 때 학교에 가져갔던 디지바이스가 떠올랐다! 전설의 황금 디지바이스! 못생긴 길몬을 듀크몬으로 바꿔주는 기적의 아이템!
그것을 훔쳐간 범인 후보 중 최고의 용의자였던 짝꿍 놈의 못생긴 얼굴이 저들의 얼굴에 오버랩 되었다!
나는 그때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날 듯한 기분에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경비병들이여! 나는 결코 도적이 아니오!”
“흥! 자기가 도적이라고 말하는 도적이 있겠는가!”
“우리가 무릎을 다친 것을 알다니 정보력은 뛰어나군!”
“사르가디스 경비병식 3인 1창의 오의를 받아라!!”
대화의 여지가 안 보였다. 존나 경비병들 뽑을 때 인성검사는 안 하고 뽑나?
“스톱 라잇 데얼, 시티가드 스껌 새끼들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야수회귀를 켤 준비를 했다. 암만 그래도 3대 1, 그것도 나름 칼밥먹고 산다는 경비병들을 상대로 마법 없이 비벼보는 건 자살행위나 진배가 없었다!
싸웠다간 졸지에 진짜 도적 취급 받게 생겼으니 어떻게 정당방어 수준으로 제압만 하자. 시발 저 양심 터진 새끼들 때문에 내 아나콘다가 킹기드라가 되게 생겼다!
“《천공신께(yáǵeswō)》──”
“그만하시죠.”
일촉즉발의 상황을 제지한 것은 길드 안쪽에 있던 어느 마법사였다. 후줄근한 로브를 입고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한 회색 머리의 남자다.
“아니, 마법사 님?”
“그쪽 분은 아마 손님이실 겁니다. 고고학자시군요?”
그 마법사는 내가 낀 브로치를 보고 말했다. 이 브로치는 존나 과잠 같은 거라서 모르는 편이 병신이다. 즉, 여기 경비병들을 병신이 맞다.
“예? 도적이 말입니까?”
“도적 고고학자… 도굴꾼?”
뇌세포에 치명적인 블루 스크린을 띄우는 삼병신들. 오류 뜬 프로그래밍 코드처럼 도적인데 어떻게 고고학자지??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하오. 여기 이 친구들은 몸을 단련하는데 열심히여서 그런지 머리가 영 부족한 모양이거든.”
나는 대학물 먹은 이세계인의 패시브 스킬, ‘못 배워먹은 놈 무시하기’를 사용했다. 그러자 경비병신들의 표정이 즉시 썩어 들어갔다.
새끼들 효과 확실하구만. 역시 몸 쓰는 일 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학력 콤플렉스가 있는 법이었다. 나도 웬만해선 남들한테 이렇게 굴지 않지만 저 삼병신들한테는 괜찮았다.
그리고 이런 시츄에이션에서는 벡터-근엄하게 말하기가 효과적이다.
“표정이 왜 그리 썩창이시오? 혹시 많이 꼽소이까? 꼬우면 개겨 보시오. 카르미네로 오십시오. 이빨 강냉이 털어줄 수 있소. and also 합의금 좋아.”
“…들어가십시오, 학자님.”
병신들.
왜 애먼 사람들 도둑으로 몰았는지는 몰라도 다짜고짜 창질부터 했으니까 저 새끼들은 나한테 병신을 취급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시발 목이랑 명치까지는 제압용이라 넘어가도 부랄은 아니지, 부랄은. 지들이 뇌 고자라고 남까지 고자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튼 이 일은 나중에 정식으로 항의할 테니 감봉쯤은 각오하시오.”
“쯧쯧.”
나는 혀를 차고 마법사 길드 부지로 들어갔다.
신분을 확인받고 안으로 들어가 나를 도와줬던 마법사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감사인사 정도는 하려고 했는데 아쉽다.
혼자가 된 나는 잠시 동안 어디로 가야 하오 상태가 되었다가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대충 삘이 여기가 접수처 같은 곳으로 보였다.
“어서 오십쇼.”
세상 히스테릭해 보이는 안경 찐따남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존나 평생 공부만 하다가 학비 때문에 조교일을 하는 사람처럼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왜 초면부터 이딴 악담을 하느냐면 저 인간이 나를 보자마자 ‘아 씨발 또 일해야 되네’ 하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 씨발럼이 인상 팍 쓰고 말이야. 어?
나도 좆 같이 구는 새끼들이랑 오래 얘기할 마음은 없다. 접수처에 가자마자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카르미네 대학 소속 고고학자요. 오늘은 마법사 길드에 자문을 구하러 왔소.”
“…카르미네 대학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있소?”
“아뇨, 없습니다.”
내 신분을 듣고 약간 자세를 고치는 안경남. 대학의 네임밸류에 밀린 것이 아니라 자기한테 혹시라도 불똥이 튀지 않게 처신을 잘 하려는 것이었다. 역시 마법사들이 똑똑하긴 하다.
“신분증을 주시겠습니까?”
“받으시오.”
브로치를 받아서 마법도구 같은 곳에 올리고 확인받았다. 안경남은 헛기침을 하고 브로치를 돌려주었다.
“확인되었습니다. 오늘은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유적에서 발견한 마법의 역사와 증세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자 하오. 에린과 그 이전의 선사시대에 준하는 마법으로 추측되오만.”
“알겠습니다. 담당자를 부르죠.”
그렇게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렸다. 얼마 안 가서 안내인으로 보이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고맙소.”
이번에도 안경을 쓴 남자다. 옷도 똑같은 로브였다. 역시 로브는 이세계의 양복 패딩이 맞다. 존나 편한데 격식 있는 자리에서 입어도 욕을 안 먹는 옷이라니 완벽하지 않은가.
앞서 걷던 마법사가 말했다.
“에린의 마법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저희 길드에는 전공자가 없습니다. 때문에 역사에 해박한 마그누스 학파의 제 7성급 연금술사님께서 협조를 자처하셨습니다.”
“그거 영광이로군.”
시발, 제 7성급이면 거의 박사급 아닌가? 최소 10년 이상을 길드에서 활동한 수준의 마법사다.
그냥 말만 꺼냈는데 그 정도 되는 양반이 왜 튀어나와? 나는 벡터-근엄하게 말하기로 대답하면서도 내심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입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착한 어느 건물의 앞에서 안내인이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시오.”
안내인을 돌려보내고 나는 목의 옷깃을 여몄다. 코스튬은 내 맨살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옷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나는 피부색 하나만으로도 존나 눈에 띄니까.
끼이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마치 교장실 같은 느낌의 방이었다. 거기에서 자리에 앉은 어느 안경 쓴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백 머리에 양복+갈색 조끼를 입어서 약간 집사 같은 느낌도 났다.
“오셨군요. 어스레이트 멕로이버입니다.”
“아서 웨인입니다.”
할아버지고 신분도 높은 사람이라 나는 존댓말을 쓰면서 통성명을 했다. 인상은 무척 온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앉으시지요. 차를 내놓겠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실 수가 없는 입장이라서요.”
근엄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가면을 툭툭 쳤다. 그것만으로도 신분을 밝히기 어려운 입장임은 전해졌을 것이다. 어스레이트는 알겠다는 듯이 착석을 권했다.
그렇게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았다.
“그럼… 사정이 있으실 테니 사담(私談)으로 서론을 꺼내는 것도 쉽지가 않겠군요. 이대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멕로이버 님의 시간을 뺏는 것도 죄송하니 그렇게 하죠.”
“양해 감사합니다. 매너 있는 분이시군요.”
우리는 적당히 상대방 얼굴에 금칠 좀 해 주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참고로 브리타니아에서 상대를 성으로 부르는 경우는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의를 차릴 때 뿐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의식해서 거리를 두는 셈이다.
혹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존경은 이해와 가장 거리가 먼 감정이라고. 마찬가지로 브리타니아에서 남을 성으로 부르는 것은 친근함을 거의 배제한 말투였다. 그렇기에 되려 존경의 뉘앙스를 띄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오늘 찾아오신 것은 이곳 주변에서 발견된 유적의 마법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모험가 길드 아우둠라가 발견한 그 유적이 맞습니까?”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군요.”
뭐 대충 소식 정도는 들었을 것이다. 마법사 길드 사람 쯤 되면 고블린 던전보다는 새로 발견된 유적과 흑마법사의 예전 은신처 쪽에 더 관심이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