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009)

군인들이 이불을 접은 각, 삼선일치, 군복의 뻣뻣함에 집착하는 것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의 감성!

처음에는 왜 이 지랄을 해야 하나 생각하던 사람도 몇 년 뒤에는 계속 신경 쓰여서 수정하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랄 맞은 상사에게 계속 쿠사리를 먹게 되는 악습(惡習)!!

이세계 학자들이 추구하는 ‘가독성’은 그런 문화였다.

나도 지랄 맞은 교수들에게 글씨체 가지고 시달려 본 경험은 셀 수 없이 많아서 안다. 젊은 학자들은 내심으로는 ‘가독성’을 추구하는 문화에 학을 떼면서도 알게 모르게 연연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티르시의 집착은 나 이상의 영역에 있었다.

설마하니 1줄마다 글씨의 크기와 단락까지 생각해서 논문을 쓰다니!

그건 더 이상 논문이 아니라 일종의 페이퍼 예술이라고 해야 할 경지였다!

“그걸… 그런 논문을 빼앗겼다는 말입니까?”

나는 충격적인 사실에 말문이 막혔다.

─부르르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게 진짜로 사람 몸에 일어나는 거였구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본 내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 현실 자체를 못 따라가겠어.”

이것은 마치 내일이 휴가라서 군복을 각 잡아서 다리고 군화를 깨끗하게 닦았더니 타 중대 오대기가 생활관에 들어와서 밟고 구기고 뺏어입은 것과 같은 일이었다.

감당 못 할 분노로 인해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난 시간의 트라우마가 내 뇌를 휘저었다. 전동 드릴에 부착한 거품기가 뇌수에 꽂힌 것처럼 생각이 정돈되질 않는다!

난생 처음으로 레드불을 처먹었던 고삐리 강북호가 PC방에서 심장을 붙잡고 토했던 그 수능 다음날처럼 말이다!!

“푸흐흐흐.”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며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분노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으면 도리어 차분히 불타오르는 것이었다.

‘──아아, 그래. 그랬던 건가.’

하얀 분노에 감싸여 광소를 퍼트리던 내 뇌리를 모종의 돈오(頓悟)가 관통했다. 그것은 설원의 얼어붙은 강을 부수는 태양의 빛처럼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 도적 놈들도── 교수나 다름없는 거야.’

그게 현실인 거에요.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사람을 괴롭히는 자.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대가를 쥐어주지 않는 자. 사람을 험하게 대하면서 부려먹는 자.

그런 이들은 모두가 교수다.

이 이세계는 사탄마저 대학원생으로 삼을 교수들로 가득 차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렇다면 내가.

“──내가 교수 슬레이어(Professor Slayer)가 될게."

내가 이 세상에 정의를 구현하겠다.

“네, 네?”

일어선 나를 티르시가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티르시 씨.”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녀를 심유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저는 이제부터 그 도적단을 토벌하고 논문을 되찾으러 갈 생각입니다.”

“가, 갑자기요? 아니, 그것보다 어떻게요?”

“방법은 있습니다. 준비는 필요하지만 아마 저 혼자서도 놈들의 소굴을 찾아서 몰살할 수 있을 겁니다.”

오만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킹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됐다. 도둑질이나 일삼는 인간형 잡몹 새끼들이 강할 리 없으니까.

추격하기 전에 가벼운 사전조사는 할 생각이다. 하지만 저 도적단은 마피아 같은 거대 범죄조직이 아니다. 하지만 벌여대는 범죄의 스케일부터 좆 만한 놈들이다. 분명 단순한 동네 양아치들에 불과할 것이었다.

제대로 된 강자들로 꾸려진 집단이라면 왜 시골 도시의 행상인이나 털고 다니겠는가. 이번 일의 스케일은 동네 쿠팡 택배차를 훔쳐간 정도에 불과했다.

도망치거나 숨는 능력이 뛰어나며 조져 봤자 가성비가 구린 잡몹이라 방치되는 놈들.

저 좀도둑 새끼들은 촉법소년 법을 믿고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원 단골 범죄자들과 똑같다.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그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쌩쌩 돌아가는 엘리트-브레인으로 논리를 전개한 나는 티르시에게 물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나 혼자 가도 상관 없다. 티르시가 거절하면 프랑이랑 같이 가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티르시 역시 이 일의 피해자.

분노를 해소할 권리는 나 못지 않게 존재할 것이었다.

“방법이…… 있나요?”

티르시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유약해 보여도 그녀 역시 모험가. 자신의 적에게 복수할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 마법사였다.

그에 나는 확신을 담아서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내가 노예 시절부터 종종 쓰던 방법이었으니까.

“우선 사전조사부터 합시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티르시에게 모험가 길드로 가서 정보를 모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법사 길드 소속인 티르시가 가는 편이 길드 접수원들도 더 흔쾌하게 도적단의 정보를 내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운송 길드였다.

아들을 납치당했다는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대머리 대표는 내 물음에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도, 도적단을 퇴치하겠다고 하셨습니까?”

다시 불려나온 대머리의 대표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부탁드립니다! 제 아들, 제 아들을 구해주십시오!”

그러고는 울먹이면서 내 앞에 부복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보수는 물론이고, 본 상회가 구매한 손님들의 도난품까지 전부 드리겠습니다!”

도난품을 준다고?

나는 대머리의 말에 잠깐 그렇게 해도 되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도난품 중 일부는 손님들이 돈을 받고 소유권을 포기했었다.

손님들의 상품을 돈 주고 샀으니 되찾지 못하더라도 정식 소유권은 운송 길드에 있다. 그러니까 그걸 보수로 걸어도 별 문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돈을 더 준다는데 사양할 건 없지.’

나는 일단 요란스럽게 주목을 끄는 그를 손짓으로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십시오. 놈들의 은신처를 찾아내더라도 저 혼자선 퇴치하지 못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도적단이 알고 보니 골드 클래스 현상범 12명으로 이뤄진 여단이거나 했다가는 쿨하게 포기할 생각이다.

길드에 위치 정도는 보고하겠지만 다시 쓸 수 있는 논문 때문에 목숨을 거는 건 미친 짓이니 말이다.

“도적 놈들의 소굴만 찾아 주셔도 됩니다! 저희 길드에서 토벌대를 보내고 손님께도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머리 대표는 각서까지 작성했다. 모험가 길드에 넣는 의뢰서와 같이 법적 효력을 가진 물품이다.

내가 신분을 숨기는 입장이라서 ‘도적을 퇴치한 자’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 문서만 있으면 나중에 발뺌해도 낙장불입이다. 생각치 못한 부수입이 될 듯 하다. 모험가 노르드의 실적으로는 카운트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웨인 씨. 아우둠라 길드에서 정보를 모아 왔어요.”

각서를 챙겨오자 티르시도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다는 모양이에요. 파악되는 도적단은 대략 15명에서 20명. 개개인의 무력은 두목으로 보이는 자를 포함해서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더군요. 좋게 봐 줘도 브론즈 클래스 이하였다는 견해에요.”

“정보 증언자는 누구입니까?”

“길피 길드의 브론즈 클래스 모험가라고 해요. 마법사 길드에 이중 소속된 인물이라고 들었어요.”

“믿을 수 있겠군요.”

길피 길드는 무뢰배 비율이 높은 세크메트나 좆소 기업인 아우둠라랑은 달리 대기업급 길드다.

가입 기준도 높은 편이라 최저 브론즈 클래스부터 시작하며 철저한 신분 확인과 면접까지 걸친다고 한다.

그런 길드와 마법사 길드에 동시에 소속된 인물의 증언. 신뢰도는 높다. 거짓 정보를 뿌리기 위해 모험가 길드에 숨어든 도적단의 첩자를 의심하지는 않아도 되겠다.

“운송 길드에서도 보수로 10실버와 도난품 일부의 소유권을 내걸더군요.”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티르시에게 보수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다.

10실버는 큰 돈이지만 이걸 몰래 떼먹으려 들다간 반드시 뒤탈까지 생긴다.

운송 길드에서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티르시한테 내가 보수를 삥땅친 걸 밀고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냥 마음 편하게 말해버리자.

“성공 시의 페이는 어쩌시겠습니까?”

“웨인 씨가 7, 제가 3이라는 걸로 어떠세요?”

“괜찮으십니까? 저는 사양 안 합니다.‘

뒷말이 안 나오게 확실히 하려는 내 물음에 티르시가 머릴 위아래로 흔들었다.

“상관없어요. 그야 저도 금전적인 욕심은 있지만, 어차피 저 혼자서는 시작조차 못할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극적 타협 성공이다. 시발. 7실버 개꿀.

“저희 둘 다 준비가 필요할 듯 한데, 어느 정도 있다가 다시 뵈면 될까요.”

티르시는 실험복에 호신용 완드만 달랑 들고 나왔다. 저 차림으로 전투가 일어날 장소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로브랑 가면이 전부였고 말이다.

“2시간… 아니, 1시간만 주세요. 제가 만든 포션이랑 신분을 숨길 옷을 챙겨 올게요.”

“예. 그럼 피해를 본 곳은 북쪽의 산 인근이라고 하니, 북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약속장소를 잡은 우리는 준비를 위해 일시 해산했다.

북문으로 향하는 길에 프랑에게 들려서 사정을 설명하고 프랑의 무기를 빌렸다. 내 검은 티르시가 본 적이 있어서 챙기지 못했다. 그래도 갑옷은 로브 아래에 감춰지니 괜찮다.

‘무기 쯤은 없어도 무방해.’

지구용사의 힘 앞에 무기는 필수가 아니다. 프랑의 무기는 쓰기 편한 망치였고, 도적 몇 놈을 조져서 걔네 무기를 빼앗아도 되니 말이다.

그때 내가 장비를 착용하는 것을 도와주던 프랑이 말했다.

“노르. 나 가지고 싶은 게 생겼어.”

“뭔데?”

“얼굴을 숨길 가면이랑 장비.”

내 다리 보호대 끈을 강하게 조이는 프랑.

지금 프랑은 근처 골목길에서 내가 아서 웨인으로 다시금 변장하는 것을 도와주는 중이었다. 여관에 들어가서 프랑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1번 노르드로 돌아왔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목소리에서 약간 불만이 묻어 나오는 느낌인데.

“프랑…? 혹시 화났어?”

“화는 안 났지만 노르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 앞으로는 이런 일을 대비해서 나도 신분을 감출 뭔가가 필요할 것 같아.”

아마 나랑 같이 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걱정이 샘솟는 모양이었다.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하지 않는 것은 프랑이 내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말하기 미안한데…… 프랑 네 경우는 키랑 체형 때문에 얼굴만 숨겨도 의미 없지 않을까?”

“………붕대 매고 키높이 신발을 신으면 될 거야. 아마.”

“그런가? 갔다 와서 시험해 보지 뭐.”

저렇게까지 말하니 1번 해 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듯 했다. 나는 무기를 제외하고 모든 장비를 튼튼하게 완비하고서 프랑의 뺨에 키스했다.

“안 다치고 다녀올게. 해 뜨기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말고.”

“바보. 어떻게 걱정을 안 해.”

프랑은 뾰루퉁하게 말했다. 뭐라 돌려줄 말이 없어서 그냥 안아주었다. 내 목에 손을 감은 프랑은 잠시 그렇게 있다가 내 품에서 내려왔다.

“얼른 다녀 와. 위험할 때는 꼭 도망치고.”

“그래. 무기 잘 쓸게.”

나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약속장소로 달렸다. 북문 앞에서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로브를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한쪽 어깨에는 가방을 맸다.

“웨인 씨. 저예요.”

후드와 목도리로 얼굴이 안 보이는데다 목소리도 달랐다. 그래도 손으로 목도리를 내려 드러낸 눈은 내가 잘 아는 하늘색이었다.

“오셨군요. 성함은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가명 말인가요? ‘애시’로 하죠.”

로마니아의 유명 역사 인물이다. 그 나라는 ‘시’로 끝나는 여성명이 많으니 이름으로는 추격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애시. 갑시다.”

“후후. 암만 가명이라지만 말까지 놓기에요?”

“신분을 숨기는 데는 이러는 편이 낫죠. 당신도 저를 아서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아서.”

통성명을 마치고 우리는 북문을 빠져나갔다. 각자 신상을 감추는 신분증이 있었기에 신분검사는 낙승으로 통과했다.

문을 빠져나와 소굴이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근처 산으로 올라갔다.

3번의 습격 피해는 모두 산 주변의 평야에서 발생했다.

제 자식들도 소매치기를 시켜서 상납금을 모을 도적 새끼들도 먹고 잘 장소는 신경을 쓰겠지. 경비대한테 걸려서 척살 당하기 않기 위해서는 백이면 백 이런 산속의 동굴에 은신처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외의 방법을 생각해 낼 정도로 똑똑한 새끼는 도적단이 아니라 용병단이라도 꾸릴 테니까.

“아서. 이제 그만 그 ‘방법’이라는 걸 알려줄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산길을 올라 인기척이 사라지자 티르시가 그렇게 물었다. 시내에서는 주변의 이목을 염두해서 묻지 않았던 건가.

“알겠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곧장 시작하죠.”

대답하면서 근처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치려 들지도 않는 야생의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때마침 1마리 있군.’

가방에서 챙겨온 빵을 꺼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선택한 호밀빵이었다.

이세계 조류 치고 이거에 눈이 안 돌아가는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쮸쮸? (밥?)”

이름도 모를 새가 호밀빵에 반응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벡터-조류언어를 사용하여 신중하게 말을 건넸다.

“짹쯔? (안녕?)”

도적 놈들의 소굴을 찾는 방법.

그건 카르미네 대학 시절부터 남들 모르게 유용히 사용해 왔던── 나의 번역능력의 응용이었다.

노르드 명명(命名), 생체 드론 대작전이다.

“째액 짹 쩩? (인간이 우리 말을 하네?)”

빵에 관심을 보이던 새대가리의 흥미가 나에게도 향했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도 언어 수준이 너무 낮다. 티르시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이제부터는 몹시 유치한 대화가 오갈 테니까.

“쯔쯔 째짹. (부탁이 있어.)”

그런데 벡터-근엄하게 말하기를 유지하면서 짹짹대려니까 말뜻을 알아먹지 못해도 쪽팔려서 뒤질 것 같다. 등 뒤에서 티르시가 무슨 얼굴로 쳐다보고 있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쯔쯔? 째쯕? (부탁?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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