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009)

잔뜩 사온 식료품이 싹 사라졌지만 그럴 만도 했다. 하루 종일 싸우고 도망치고 피 말리는 하루를 보내면서 쫄쫄 굶었으니까.

뒤늦은 식사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프랑에게 말을 해 두고 혼자 크림소스 서커스장이 있던 곳으로 갔다.

고양이들의 시체가 있었을 법한 장소에는 이미 누군가가 그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게르마니아 양식의 무덤은 사람이 만들었다기에는 몹시 어설픈 솜씨여서 누가 만들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바이콘 녀석이군.’

그 망아지, 제대로 도시를 빠져나갔으려나 모르겠다. 아무리 룬 마법을 빵야빵야 쏴대는 놈이라도 성벽을 넘거나 경비를 빠져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무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한테는 미안했다. 부족한 보수겠지만 이거라도 받아다오.”

두 고양이의 무덤의 앞에 보수인 생선을 두었다. 한 마리 당 생선 3개씩이다.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생선 중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너희 복수는 했다.”

내가 중얼거렸다. 체포된 로만와 아나시스는 심문이 끝난 뒤에 처형을 당할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인이라지만 국내에서 저지른 범죄가 너무도 많아서, 로마니아에서 집행관이 찾아와 처형식을 벌일 거라고도.

‘집행관은 이단 심문관의 다운 그레이드 버전이니 살아날 공산은 없겠지.’

귀족도 집행관이 나서면 똥꼬쇼를 하다가 몰락하거나 목이 달아나서 뒤지는 법이다.

재산을 압류당한 전직 서커스단장과 광대가 살아날 구멍은 하늘이 무너져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손을 모아서 고양이들의 명운을 빌었다.

지구에서도 그렇듯이 이세계에서도 고양이는 사랑을 받는 생물이었다. 신화에서도 여신의 마차를 끌거나 하는 호화로운 직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거기에서라도 좋은 주인을 만나기를.

무교인 나였지만 그걸 바랄 자격 정도는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고양이들의 무덤에 방문했다가 돌아오니 금방 서커스가 열릴 시간이 됐다.

“아직 7시도 안 됐지만 말이야.”

“늦게 갔다가 자리 없으면 말짱 황이니까.”

나와 프랑은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 공연 시작 시간보다 좀 빨리 콜로세움으로 갔다. 가면과 로브도 갖춰입었다.

“아앗! 거기 계신 남녀 커플 분들은 혹시?!”

그런데 입구에서 사람들을 안내하던 서커스단원이 우리를 보고 두 팔을 벌렸다.

“실례합니다! 웨인 씨와 그 일행 분이십니까?!”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 물었다.

납치사건을 해결한 우리는 익명 보호를 부탁했다. 하지만 경비대에서 말이 새나갔다면 혹시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도 하지 않는가.

그래도 다행히 서커스 단원이 꺼낸 말은 다른 것이었다.

“아니오, 그게요! 단장님께서 여러분이 찾아오시면 특실로 모시라는 전언이 있어서 말이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일부러 콜로세움의 특실 하나를 전세내셨거든요!”

“아아, 그렇습니까.”

다행히 이 단원은 알렉산드라 씨의 지시를 받았을 뿐인가 보다.

그나저나 우리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특실까지 전세를 내 두다니.

나는 약간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얌전히 따라갔다. 빈 좌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당히 일찍 나왔는데도 ‘공짜 공연’이라는 말에 넘어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단원을 따라 특실이라는 곳으로 안내받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샴쌍둥이의 거한(巨漢)과 외팔 남녀, 하반신이 없는 남자와 두 팔이 없는 남자까지!

그들은 다름 아닌 프릭쇼의 출연자들이었다.

“오, 오셨군요!”

그들은 나와 프랑이 나타나자 기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몸이 굳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는 못했다.

이유는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장애인으로서 살아오던 그들은 우리에게 혐오를 받거나 공포심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내 쪽에서 악수를 권했다. 나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뻐킹 레이시스트가 아니니까.

“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아서 웨인입니다.”

“스, 스파이크 올즈라이언입니다. 왼쪽 머리가 동생인 브라보고, 말하고 있는 제가 스파이크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파이크 씨. 브라보 씨.”

그들은 어색해 하면서 나랑 프랑과 악수를 했다. 양팔이 다 없는 남자와는 목례를 주고받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프랑도 처음에 그들의 모습을 무서워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하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어두운 천막 안과 여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긴 했다.

나는 그들과 인사를 마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에 오셨는지요?”

“그……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샴쌍둥이 스파이크가 일행의 대표인 듯, 나와 프랑에게 허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리루라 양에게는 인사를 할 수 있었는데, 두 분은 얼굴도 제대로 뵙질 못해서…….”

“아, 그 점은 괘념치 마십시오. 말씀드리기 죄스럽지만, 솔직히 저는 여러분들의 처우까지 책임질 자신은 없었습니다.”

나는 굳이 사실을 밝혔다. 저들의 감사인사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나도 프랑도, 장애인인 저들이 프릭쇼라는 직장을 잃고서 어떻게 살아갈지까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저희는 그저 로만과 아나시스의 행동을 묵인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런 저희가 여러분에게 감사받는 것은 번짓수가 잘못됐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입니다.”

스파이크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같은 몸에 붙은 동생 브라보가 말을 받았다.

“저희는 아이들의 죽음이나 고통을 묵묵히 못 본 척 하며 살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저희는 죄책감을 애써 무시하며 서커스단 놈들의 폭력을 자신들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아픔 따위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서커스단의 비리를 고발해주신 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다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기로 했다.

나도 번역능력 없이 어디 전쟁터에 화살받이 노예로 끌려갔더라면 저들 못지 않은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똑같은 고통을 받던 피해자들끼리 죄를 덤터기 씌우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장애인 일동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정론만을 이야기했다.

“주제 넘게 참견하자면, 지금 하신 사과는 납치된 아이들에게 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거듭 사과했습니다. 그 애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이곳의 고아원에 맡겨진다더군요.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서 치료를 받고 자세를 교정하면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요?”

프랑이 무심코 말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그걸 듣고 안심했다.

“다행이군요.”

그러면 로잔나의 굽은 등도 나을 수 있는 걸까? 저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이 사람들과 다시 만난 의미가 있었던 기분이었다.

자신을 니웨라라고 소개한 외팔이 드워프 여성이 말했다.

“저희들도 알렉산드라 씨의 권유로 이곳의 서커스단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실력을 증명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고용해 주신다고도 하셨구요.”

“여러분들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힘내겠습니다. 동물들은…… 조금 미안하지만, 다음 주인들을 찾게 됐다고 합니다. 야생에 풀어줄 수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와 함께 자유혁명에 도전한 동물들이니 챙겨주고 싶기는 했지만, 들판에 풀어줬다가 사람을 해치면 존나 아이러니한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야생에서의 생존투쟁인가, 동물원의 안락함인가.

어느 쪽이 좋은 건지는 때와 장소 나름일 것이었다.

“게르마니아에서 동물 상인이 온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이 도시에 남아 있겠죠.”

“여러분들 모두에게 좋은 미래가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이런 말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스파이크를 비롯한 일동은 감동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이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저희는 쇼에는 출연하지 못하지만, 여러분들은 서커스를 즐겨주십시오.”

“예.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프릭쇼의 출연자였던 일행은 우리에게 감사인사를 하면서 떠나갔다. 프랑은 텅 비어버린 넓은 특실에서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네.”

“나도 그래. 잘 됐으면 좋겠다, 저 사람들 전부 다.”

무책임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없었다.

우리는 남의 일에 책임을 져가면서 성인군자 행색을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숨을 고르는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은 또 있었다.

“두 분. 오늘은 저희 서커스단을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실에 온 사람은 빳빳하게 세운 연미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서커스가 시작하기까지 30분도 안 남았는데, 무려 단장인 알렉산드라 씨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서커스가 끝난 뒤에 오셨어도 상관 없었는데요.”

“여러분의 바쁜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죠.”

알렉산드라 씨는 능숙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라리루라는 근신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쇼에는 출연하겠지만, 여러분을 다시 찾아뵈는 것은 내일에나 가능할 듯 하네요.”

“그렇군요. 곧 떠나신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예. 서커스는 도시의 분위기에 주의해야 해서요. 저는 늘 저희 서커스단의 에이스가 그걸 이해해줬으면 하고 있죠.”

씁쓸하게 웃는 알렉산드라 씨. 나는 그 은근한 고집쟁이의 호승심과 중구난방함을 겪어봤기에 저 심정이 이해가 갔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희도 오늘은 작별인사를 드리러 온 거였으니, 이렇게 얼굴을 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거 정중하시군요. 일부러 찾아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품위 있는 인사─아마 귀족을 상대로 공연하기 위해서 배운 거겠지─를 선보이는 알렉산드라 씨.

그녀는 정중한 태도인 채로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

“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다시 뵐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때에도 두 분께는 요금을 받지 않을 테니, 공연장에 있는 단원들에게 제 지인이라고 전해주십시오.”

“예. 아아, 그렇지. 오늘은 이런 특실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구경하겠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 두 분의 앞길에 축복만이 있기를.”

인삿말을 남기고 알렉산드라 씨도 떠나갔다.

‘어째 하나둘 씩 여기서 만난 인연이 정리되는 것 같네.’

나는 로잔나와는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지만 그 애도 프랑이나 라리루라랑은 인사를 나눴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걸로써 이번 사건에서 엮인 사람들과는 대부분 인사를 나눈 셈이었다.

우리는 조용해진 특실에서 약간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쇼의 개막을 기다렸다.

그리고 때는 무르익어,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콜로세움의 무대에 나타난 알렉산드라 씨는 좌중을 돌아보면서 인사를 올렸다. 박수소리가 이어지다가 그쳤다.

“──오늘. 이 도시, 헤이스벤트를 어지럽히던 간악무도한 악당들이 정의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알렉산드라 씨는 평소와는 다르게 멘트를 길게 뽑았다.

“익명을 희망한 영웅들은 시민 여러분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크뤼소스 서커스단의 악행을 밝히고, 세상에 정의가 남아있음을 오롯이 증명하였습니다. 납치됐던 아이들도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말에 좌석에 퍼진 분위기는 특실에서도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환희와 기쁨이었다.

어느샌가 다들 우리가 벌인 일의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선보일 것은 저희들 플랑쿵쿨라 서커스단의 마지막 쇼가 되겠습니다.”

짧은 말에 객석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알렉산드라 씨는 그 탄식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했다.

“미흡하게나마 헤이스벤트의 경사에 한 송이 꽃을 올리기 위하여 성심성의를 다한 서커스를 펼치겠습니다. 그럼 부디 즐겨주십시오.”

눈을 꾹 감고, 분위기를 일신하여 텐션을 높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세우는 그녀.

발을 척 모은 알렉산드라 씨가 검지로 밤하늘을 가리키며 드높게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신호탄으로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어제 한 번 봤던 서커스는 내용물도, 순서도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그래도 더없이 아름답고 즐거우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아, 그런가.’

프랑과 함께 서커스를 즐기면서 나는 깨달았다.

서커스를 펼치는 단원들도, 진지한 분위기가 아닐 때는 미소를 지으며 쇼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웃음 짓는 서커스.

분명 그것이야말로 강요나 폭력으로는 절대 만들지 못할── 최고의 서커스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나는 킹 사이즈 침대에서 눈을 떴다.

15쿠퍼짜리 여관의 침대는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웠다.

“12시간 램수면 OFF.”

회중시계를 닫았다.

12시에 잠들었는데 일어나니까 12시다.

즉, 오전 12시부터 오후 12시까지의 12시간 수면.

시발 게슈탈트 붕괴 올 것 같애.

“우웅…….”

게다가 존나 드물게도 프랑보다 내가 일찍 일어났다.

우리 프랑이 12시간을 자고도 일어나질 않다니.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해서 저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양심이 찔려서 심장이 쿡쿡댔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라리루라는?”

벌써 오후가 지났으니 서커스단이 도시를 나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마 우리가 늦잠을 자느라 인사도 못 하고 출발을 해 버린 것인가? 나는 1층으로 내려가서 물어보려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프랑을 깨울 필요는 없었으니까.

─달칵.

근데 문고리를 열고 밖에 나가니까 입이 찢어진 광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더라.

“이 씨부랄 머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