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은 술 좋아하시잖아요. 비싼 거 아니어도 좋은 맥주라도 들고 오면 기뻐하실 것 같은데, 선배는 뭐가 좋으세요? 놀러올 때 가끔씩 선물 정도는 들고 오고 싶은데요.”
“……나?”
그 질문에 나는 입을 벌렸다.
약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일단 이세계에는 없는 것 같았다.
술을 그렇게 즐기는 것도 아니었으며─대학 나오자마자 끊은 것만 봐도 그렇잖은가─, 프랑처럼 뭘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나처럼 책 읽는 건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세상의 문학은 나랑 안 맞았다. 이세계 문학은 순문학 500배인가, 아니면 노꼴갑 야설인가 하는 죽음의 이지선다였으니까.
‘──아니, 진짜 없네?’
이세계를 떠날 생각으로 살던 여파였을까. 우리 아내들을 빼면 내가 여기서 순수하게 하고 싶은 건 아무 것도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배?”
라리루라는 자기 질문에 내가 멍을 때리자 이상해 하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나는 머리에 냉수를 끼얹어진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어, 아니. 생각해 볼게. 당장은 팍 하고 떠오르는 게 없다.”
“……그래요?”
눈을 깜빡거리던 라리루라가 문을 열었다. ─샤샤샥! 내가 거실로 돌아오자 문 워크를 써서 피했다. 겁 많은 고슴도치 같군.
나랑 눈이 마주치자 라리루라는 익살맞게 애교를 떨었다.
“아핫♡! 핑계거리가 없어도 된다면 해석은 오늘 중으로 다 해치워 버릴래요☆! 안 돼도 마법사 길드 도서관에 가면 저 혼자서 할 수 있거든요!”
“이 새끼 허락 받았다고 거침없어 지는군.”
그 생각을 못 했네. 마법사 길드라면 고대 로마니아 어 사전 정도는 있을 건데 말이다.
“실수를 하면 뭘 해도 부끄러운 거에요! 그럴 바에는 웃어 넘기는 게 일류 광대랍니다☆!”
“나 없는 사이에 얼굴을 꼭두각시 파츠로 갈아꼈냐? 세상 철면피네.”
핑계라는 걸 들키자마자 태세전환을 하는군. 얼탱이 없게 쳐다보자 뻔뻔하게 V자를 세우며 의기양양하게 구는 라리루라.
“흐흥. 선배가 저랑 떨어져 있는 게 쓸쓸하다고 하시니까~ 정말 귀찮지만 어울려 드릴게요♡? 저처럼 상냥하고 귀여운 후배가 있다니, 선배는 행운아시네요!”
아주 좀만 풀어주면 깝싸요. 나는 정색을 빨고 양손가락에 수도를 세웠다. 5지건×2로 지건 10연발이다. 까불던 라리루라가 얼굴이 굳었다.
“벡터-참교육 리턴즈.”
“앗잠깐만요선배그거오랜만, 앗! 읏…♡?!”
어 시발.
놀란 라리루라가 몸을 피해서 조준이 약간 빗나가버렸다. ─말랑! 옆구리를 찌르기는 했는데, 존나 내 손톱에 생각보다 부드러운 느낌도 느껴졌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했던가. 이건 설마…….
“……너 살쪘냐?”
“……때릴 거에요? 진짜루요?”
아니 그치만 가슴에 닿을 위치가 아니었다고.
니 옆구리가 예전에 비해서 말랑말랑한 거 맞다니까.
“흐흐. 뭐 어때? 살 쫌 찔 수도 있지. 1달 동안 일 나갈 때 말고는 먹고 자기만 했잖아? 먹고 싶은 것만 사먹어도 말릴 사람도 없었으니까, 몸을 앞으로 접으면 옆구리에 살짝 잡히는 군살이 생길 만──”
“……★!!”
─메다닥!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며 쫓아오는 라리루라한테서 도망쳤다. 목 위로 귓볼까지 시뻘개져서 그런지 내가 손가락만 대도 얼굴이 터질 것 같더라.
‘그치만 울린 건 내 잘못 아님.’
자기가 운 거지 내가 울린 게 아니잖은가? 고로 내 잘못은 실로 0%에 수렴한다 할 수 있겠다. 나는 남을 울리는 걸 좋아하는 변태가 아니다.
‘좋아하는 거라.’
라리루라한테 도망쳐서 정원으로 간 나는 떠오른 생각에 팔짱을 꼈다.
프랑이랑 다나는 말했다. 나는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나도 그녀들이 말해줘서 안 사실이지만, 아마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인 4년을 이세계에서 살면서 사적으로 좋아하는 취미를 찾지 못한 것은.
‘이건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이세계인 노르드로써 호호할배가 될 때까지 살게 될지도 모르는데, 좋아하는 것에 프랑이랑 다나라고 적어두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모름지기 마초라면 가정을 등한시하지 않는 선에서 쿨한 취미를 가져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나는 메모장에 ‘취미 찾기’라고 적어두었다.
이건 나중에 찾아보자. 혼자 앓아봐도 답은 안 나왔다.
‘생각하다 보면 생기겠지. 창술 연습이나 할까.’
거실로 못 돌아가지만 창을 꺼내올 수는 있었다. 룬 스톤과 창을 가지고 정원으로 갔다.
훔쳐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지만 주의 깊게 찾아보고 룬 스톤의 영상을 켰다.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집이라서 훔쳐볼 새끼는 없었다.
휘리릭─! 마나를 넣자 창술 강사 눈나가 소환되었다.
다시 봐도 개쩌는 기백이다. 작정하고 살기를 쐈으면 나도 부랄이 쪼그라들어서 빵빵하게 찬 내용물이 밖으로 새버릴 것 같다.
─게르튀르는 9개의 공격 자세와 9개의 반격 자세로 되어 있다.
물론 그래봤자 영상은 영상이다. 하는 말은 저번이랑 똑같다.
근데 그게 무섭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3D 공포 영화도 가짜란 걸 알지만 심장이 쿵쾅대곤 하니까. 누나 눈에서 힘 좀 빼요 씨발.
나는 전사의 위압감에 긴장하며 자세를 흉내냈다.
서두도 짧게 끝내고 할 말만 하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것도 빠르게 대충 보여주고 따라해 보라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음으로는 자세를 설명하겠다. 공격 자세의 첫 번째 형(形)은 이와 같다.
창 눈나가 창대를 휘둘렀다.
존나 놀랍게도 소리까지 지원되는 영상인데 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안 났다. 내 실력이 예전보다 일취월장해서인지, 그게 얼마나 미친 레벨인지 보였다.
‘쓰벌. 저세상 고인물이네.’
철막대기 하나로 물리법칙에 딜도를 꽂고 다니는 빤쓰맨 빤쓰걸들! 룬 스톤에 녹화된 창 눈나는 그런 개쩌는 테크니션 마스터였던 것이다.
하긴 그러니까 그 눈깔장애의 신, 닉 퓨리 얼터년이 좋다고 창술에 이름을 지어줬겠지. 현대 이세계로 치면 미스릴 클래스가 하한선일 것이었다. 내 부랄이 공포로 떨릴 만 하군.
‘아 시발. 집중하자, 집중.’
룬 스톤 인간은 인터페이스가 좆 구려서 일시정지 기능도 없다. 리얼 타임 교수의 필기-지우기 술법처럼 잠깐 딴 생각 좀 하면 진도에서 낙오되고 말 것이었다.
부웅─쯧!
기합을 넣으며 자세를 따라했지만 제대로 따라한 건지도 알 수가 있어야지. 나는 입맛을 다셨다. 겉보기로는 창 눈나도 나도 똑같이 휘두르는 자세일 뿐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다음은 반격 자세의 첫 번째 형이다.
창 눈나의 강의가 이어졌다.
니가 알아서 깨달으라는 듯이 설명은 대충이고 진도는 빨랐지만 자세를 기억하는 건 할 만 했다. 복잡한 자세가 없기 때문이었다.
‘1달 동안 창술 교본을 보고 연습했던 게 도움이 됐군.’
【게르튀르】는 자세만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특이한 창술은 못 됐다. 아니면 존나 틀딱들이 좋아하는 무협지처럼 초식마다 묘리가 담겨 있는데, 내가 병신이라서 눈치 못 깐 걸 수도 있다.
‘자세가 18개인 이유는 오딘이 만든 18개의 룬 문자를 리스펙한 건가?’
그래도 구색 맞추기로 대충 끼워넣은 자세는 없었다. 전부 로지컬하게 짜인 기술이다. 어떤 상황에 대응해서 쓰는 건지 말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늘에서 마법을 쏘는 적을 격추하는 자세다. 창대 중간을 쥐고 날아서 꿰뚫어라.
존나 도움은 안 됐지만 말이다.
“개씨발아. 그래서 어떻게 나는 건지를 설명하라고.”
천재라고 설명도 잘 한단 법은 없다는 걸 몸으로 배웠을 따름이었다. 룬 스톤의 촬영에도 불가능한 게 있는지 3차원 공중살법은 시범도 안 보여주더라. 알아서 깨우치라 이거지.
아, 그치만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게 된 것도 있었다.
이 창술은 ‘최소한’ 자기 마나를 수족처럼 다뤄야만 따라할 수 있다는 거다.
“마나를 못 쓰면~ 싸움을 못 해요~.”
18개의 자세를 몸에 익히고자 따라하는 나. 조합해서 응용하라는 말대로 창술은 기초 자세였다. 모양만 흉내내는 것은 대충 끝났다.
붕─쯔!
내 창이 바람의 빵댕이를 찰지게 쳐댔다.
나는 자연을 강간하는 지옥의 드루이드 노르드.
오늘은 바람을 강간했다. 내일은 물을 강간할 거다.
암만 자세를 흉내내 봤자 싸그리 싹싹 헛수고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처럼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자 잡념만 생겨났다.
나는 창을 바닥에 꽂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땀. 야수회귀를 안 켜서 그런지 몸이 땀범벅이었다.
‘마나야, 왜 움직이지를 못 하니.’
【게르튀르】를 펼치려고 하면 몸에서 마나가 움찔대는 것 같은 느낌은 들었다.
그런데 그게 존나 뻑뻑해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마치 전분물이나 진흙을 물총에 넣고 쏘는 것처럼 짜증만 났다. 초식을 따라할 때마다 이러니까 집중도 계속 흐트러졌다.
존나 그냥 똥 매려운 상태로 벤치 프레스를 하는 기분.
머리를 식히자 떠오르는 것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탑 클래스의 고인물이다. 웃통을 까고 노트를 꺼냈다.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것을 즐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라리루라랑 이계의 바다에 빠지고 나서 여기 어디에 옮겨적었었는데…….’
──있다.
네페르티티가 남겨준 꿀팁이다.
나는 손땀을 바지에 대충 닦고 눈으로 글을 읽었다. 네페르티티의 무표정한 얼굴과 억양 없는 목소리가 음성 재생처럼 떠올랐다.
─마법의 술식처럼 체계적인 공격을 만들어.
─네 마나가 가장 움직이기 편하고 익숙한 길을, 몸 안에 틀면 돼.
─그렇게 만든 기술이 가장 강하고 빨라.
‘마나가 움직이기 편하고 익숙한 길?’
존나 지금이 나한테 딱 맞는 팁이 아닌가! 나는 노트에 눈을 부라렸다.
현장에서는 교과서 백 권보다 유경험자의 팁이 몇 배는 큰 도움이 되는 일도 흔했다.
네페르티티의 말이 맞다면, 마나가 뻑뻑하게 움직이는 듯한 기분은 내 몸이 【게르튀르】의 기술에 덜 익숙해서일까?
이 똥 매려운 기분을 참은 끝에 쾌변의 창술이 손에 들어온다고?
‘그건 약간 다른 것 같은데.’
내 기분으로는 마나랑 기술이 호환이 안 되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한국 콘센트에다 미국 돼지코 플러그를 꽂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엘리트 대갈통이 당질을 게걸스럽게 쳐먹으며 내 지혜를 높였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누구에게 배웠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싸우다 보면 다 자기 성격이나 몸에 맞는 기술을 만들게 되니까.
체질.
이번에도 체질이다. 이 좆 같은 혈통빨 이세계에서는 자기 몸에 안 받으면 불법을 꿈꾸는 마법사도 냉법이 돼 버리고는 하지 않던가.
‘기술이 내 체질에 안 받는 건가?’
아니, 너무 속단하지 말자. 선학들이 이르시길 좆은 뜨겁게, 부랄은 차갑게라고 하였다. 짜증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나에도 종류가 많아.’
벌레구멍 송송 난 흑마법사들이 쓰는 음(陰)의 마나.
풍요의 사제들이 쓰는 풍요의 마나.
보통 일반인들이 알아서 습득하는 평범한 소모성 마나.
그렇게 존나 바리에이션이 풍부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라면보다 많은 것 같다.
‘【게르튀르】의 기술은 내가 가진 보통 마나를 안 받고.’
이건 몇십 번째 하는 말인데, 현대 이세계의 마법은 룬 문자를 기반으로 마법사 길드에서 만들고 배포하는 마법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이 단련과 명상으로 얻는 마나에 최적화된 술식이고 말이다.
옛날에는 차량의 속도를 마력(馬力)으로 셌다. 왜냐면 그게 가장 보편적이었으니까.
이세계의 마법도 똑같다.
내가 <타오르는 손길(Burning Hand)> 같은 마법을 대충 배워서 썼던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 인간─인간족부터 엘프, 드워프까지 전부─에 맞는 마법이 현대 이세계의 마법이다.
‘근데 이 창술을 만든 시대에는 안 그랬지.’
【게르튀르】라는 이름은 오딘이 지어줬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창 눈나가 창질하던 시대는 그 궁니르를 든 궁예가 일 하라면 일 하고 절 하라면 절 하는 기원 전 우가우가 랜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저주를 받기 전이었던 시절에 인간들에게 제일 좆 쩐다고 평가받던 마나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룬의 마나겠지.’
천공신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문자의 힘! 경건한 신자라면 이건 못 참지. 창 눈나가 창술에 활용한 마나란 룬의 마나가 아니었을까?
‘──이거다.’
나는 창을 빨랫대처럼 들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휘리리릭! 룬의 마나를 끌어올리며 【게르튀르】의 공격 자세 1형을 취했다. 그러자 룬의 마나가 내 몸 속의 마나-카테터를 타고 움직였다!
‘됐나?’
─퉤엣!
“아니었네 씨발.”
룬 마나는 쪼끔 움직이는가 하다가 튕겨나와 버렸다.
하긴 나랍시고 어떻게 맨날 정답을 맞추겠는가.
내가 주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진짜 천재는 아니니 틀리는 날도 있는 거겠지. 그리고 룬의 마나는 따지고 보면 보통 마나랑은 다르다.
소모성 마나가 전기라면, 룬의 마나는 USB형 충전선!
이렇게 비유하면 내가 오우거 새끼한테 정품 충전기를 도둑맞고 빡친 거에도 공감이 가지 않을까. 아무튼 룬의 마나는 소모되거나 그러는 게 아니어서, 기술에 사용한다는 건 이상했다.
‘그래도 접근법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게르튀르】에 쓰는 마나가 신화시대부터 존재하던 존나 유서 깊은 마나일 거라는 생각은 적절한 것 같았다. 나는 내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문질렀다.
바닥에서 룬 스톤을 집어들었다.
쥬지를 뜻하는 ᛏ(Teiwaz)가 새겨진 뻘건 룬 스톤이다.
‘내가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건, 자격을 채웠단 소리야.’
자신의 이름도 안 밝힌 창 눈나는 【게르튀르】가 후대에 전해지라고 이 룬 스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영상 해금 조건을 채운 나는 【게르튀르】를 배울 기반이 있단 소리였다.
‘일단은 자세만 기억해 둬야겠군.’
그리 생각한 나는 만에 하나라도 내가 자세를 잘못 기억한 게 없을지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룬 스톤에 마나를 넣기 전에 정원에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다. 깜찍한 키에 귀여운 얼굴은 우리 프랑의 전유물이니까.
“프랑? 왜?”
“아, 미안해. 끝난 줄 알구 왔는데, 방해했지?”
“아냐. 근데 혹시 내가 연습하는 거 보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