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 양호한 듯이 보였느냐? 참을 이유가 생겼으니 참고 있을 뿐이다만.”
“아, 그랬어?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네.”
“내가 바라던 일이거늘 왜 그대들 탓이겠느냐. 그보다, 그대야말로 침울해 하던 것 치고는 회복이 빠르구나. 당분간은 축 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니라.”
아내들의 섹시 패션쇼를 놓쳐서 꿀꿀한 건 맞다. 나는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고향에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어. 나중에 볼 수영복을 기대하면서 오늘의 슬픔을 감내하는 거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후후.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로군.”
말하고 보니까 그렇네. 고진감래라. 바이콘들이 좋아할 듯한 사자성어였다.
“그대의 말대로 오늘은 고생 끝에 낙을 찾은 느낌이었다. 정말로 즐거웠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드는 생각도 많았고 말이야.”
진지한 얘기인 듯 해서 나는 잠깐 대답할 말을 생각했는데, 베로니카는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고양이 조각상을 하늘에 내걸었다. 보석을 빛에 비추는 것처럼 말이다.
“예지자로서 동포들 중에서는 가장 인간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거늘, 까놓고 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나만 인간 세상의 자유를 만끽한 듯 하여 동포들에게 미안할 지경이더군.”
“니 말마따나 고생한 만큼 보상받은 건데 뭐가 미안하냐?”
베로니카의 수난은 관광지에서 하루 논 걸로 땡치지 못할 정도였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그랬다. 맛집에서 밥 먹고 기념품을 사는데 100년 넘게 고생을 해야 한다니? 바이콘의 저주가 왜 무서운 건지 약간 실감이 된다.
“그대가 그리 말해주니 어인 일인지 마음이 놓이는구나.”
내 실없는 멘트가 위안이 됐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마음이 놓였다는 말이랑은 다르게 베로니카는 약간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허나, 이렇게 즐거울 때조차 나는 그만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내 용기가 부족해서 그대나 그대의 일행, 그리고 동포들에게까지 배려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말이야.”
“용기?”
“……만의 하나 있을 해주의 부작용부터, 그 외에도 여러 자질구레한 것들을 감당할 용기다. 일족의 저주를 반만 풀었다가 그 후에 해주법을 찾지 못하면 세대 간의 분란이 일어날 것 아니더냐.”
저주가 풀려서 인간 세상에 나가본 바이콘들과, 그렇지 못한 미래의 자손들이 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얘기일까.
내가 뭐라고 말해줄 수는 없는 장수 종족의 고민이었다. 그 세대 차이는 최소 2~300년은 지나고 발생할 것이니 말이다. 300년 뒤면 씨발 내 증손자의 증손자가 응애 하고 있겠네.
후환을 남기는 어설픈 변화 따윈 안 일으키니만 못하다.
그런 생각이라면 공감할 수 있지만 말이다.
“우습구나. 그토록 선택의 기로에 서고 싶었거늘, 정말로 기회가 주어지자 망설이고 있으니 말이야. 자유라는 건 무겁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아, 그거 비슷한 얘기라면 프랑이랑 다나도 했었어.”
“……그게 그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암컷의 공통점일지도 모르지?”
내 말에 베로니카는 보통 때랑 다른 느낌의 억양으로 그리 말했다. 그에 나는 씨익 웃으며 코를 닦았다.
“흐흐. 그러게나. 내 등이 워낙 믿음직스러워서 우리 아내님들이 믿고 따라오고 싶어지는 듯.”
“……하. 정말이지 잘도 돌아가는 혀로다.”
의미심장한 말을 농담으로 받아쳤기 때문일까. 베로니카는 걷다 말고 나를 째려봤다. 화가 나서 그렇다기보다는 삐져서 저런다고 보는 게 맞을 듯 했다.
“지금 대화로 확신했다. 그대는 친해질수록 상대한테 짓궂어지는 경향이 있군. 예외는 프랑 정도인가.”
“내가 생각해도 내 성격이 모난 데가 있긴 해.”
일단은 그렇게 능청맞은 대답을 해 둔 나였는데,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상대에게 이렇게 대하려니까 내가 존나 나쁜 새끼 같았다.
내가 어디 사는 바이콘 씨 말처럼 가만히 앉아서 여성이 굽히고 들어오길 기다릴 만큼 잘난 놈도 아니고 말이다.
이럴 때 적극적이지 못하면 시작하기도 전부터 위아래를 구분짓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도 나, 너랑 이렇게 떠들면 재밌는데.”
보폭을 늘려서 베로니카랑 눈을 맞췄다.
나는 공짜는 사양 않는 이세계 꼴마초. 하지만 받은 만큼 답해주는 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롱런하는 비결이다.
앞으로 나랑 베로니카가 어떤 관계가 되든지 말이다.
“얘기하면서 놀 때 마음이 맞는지 아닌지는 꽤 중요하다고 생각 안 하냐? 아니면 나만 우리가 같이 있을 때 편한가?”
“……흥. 뻔히 보이는 아첨은 바라지 않았느니라. 그대의 농담이나 능청은 비뚤어진 호의의 발로라고 받아들이마.”
머리를 넘기며 어딘가 만족스럽게 말하는 베로니카였다.
뭐,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진득하게 얘기하다 보면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충 눈치를 까게 되는 법이니까. 존나 속이 배배 꼬인 새끼라면 몰라도 말이다.
“하여간에 섬기는 주인이 이리도 악독해서야. 어쩌다 내가 섬겨야 할 분께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가 됐는지 모르겠구나.”
“웃기고 앉았네. 세상의 어떤 시종이 외출하고 싶다면서 떼를 쓰고 주인님 하시는 말씀에 토를 다냐.”
“이거 실례했습니다. 하찮은 신족의 말예답게 네 발로 기어가면 될까요, 주인님?”
“이 시발 우리 집 시종년 말본새 보게.”
존나 나는 왜 인간쓰레기가 되질 못하는 걸까. 여기서 얘 등에 올라타서 히햐-! 로데오-! 하고 놀아줘야 다시는 저딴 건방진 소리를 안 할 텐데 말이다.
“불만인가? 이 말투는 우리 주인님의 기벽(奇癖)이다. 나는 그 분의 충실한 심복이니만큼, 죄송스러운 마음을 참고 이런 몹쓸 말투를 견지하고 있지.”
선드러지게 웃은 베로니카는 프리마돈나처럼 360도 몸을 회전시키고 예의 바르게 치맛자락을 들었다. 윙크하는 눈에 존경심이 1도 없는 게 존나 열 받았다.
“지독하게도 우리 주인님께서는 오만한 말투의 종년을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게 취미이신 모양이야. 그러면서 평소에는 감동스러울 만큼 잘 대해주시니 장단을 맞춰드리기 버겁다.”
“알겠어. 교육에 참고하시라고 전해드려야겠네.”
“이런? 실언이었나. 뒷감당이 무섭군. 어떠한 방법으로 이 가여운 시종을 괴롭히실지.”
“니 밥은 집에 돌아갈 때까지 건초다.”
“외세의 산해진미를 맛보게 해 주고 갑자기 말 먹이로 전환이라. 그대는 정녕 악마로구나. …………진짜로 그러진 않을 거지? 조금 심한 농담이지?”
여관에 돌아가면 한숨 자야겠다. 우르실라랑 싸웠더니 급 피곤하네.
“저기, 왜 대답이 없느냐? 그대여? 주인님? 나는 건초 따위 입에 대 본 적도 없다고? 주인님의 충실한 심복이 미각 상실로 죽어버린다고? 후회할 거다? 빼빼 마른 내 시체를 붙잡고 후회하게 될 거다?”
“미뢰 좀 박살난다고 안 뒤져.”
이세계 시래기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뱃여행 중에는 채소를 챙겨먹어야 한댄다.
우리 시종님이 영양결핍으로 께꼬닥 안 하게 내가 영양 만점 K-비건 코스를 짜 놓고 만다. 나는 내 발을 잡고 늘어지려는 베로니카를 끌며 골목을 지났다.
존나 바이콘은 이제부터 초식동물이다.
이틀 뒤에 우리는 다시 우르실라의 저택을 찾았다.
준비는 만전이다. 내 창에 부여 마법을 바르고 라리루라의 꼭두각시를 수리했다. 이제 어쩌다가 적을 만나게 되도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
내 갑옷이 곱창이 났었기에 살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제는 내 피부보다 방어력이 높은 갑옷을 찾기도 힘들 수준이었다. 있어도 존나 비싸겠지.
야수회귀+【게르튀르】를 믿고 새 갑옷을 구하는 건 다음 기회로 해 두었다.
【어서 와!! 출항 준비는 끝내뒀어!!】
─펄럭! 우르실라는 어깨 견장에 걸친 코트를 펄럭이며 배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뒤로는 열일을 하는 선원들이 보였는데, 놀랍게도 그 선원들도 90%가 여성인 듯 했다.
푸드 챌린지 가게 점주의 얘기를 떠올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르마니아 바다 게이들은 여자들과 같이 타기 싫어한댔으니까.
“하암…….”
프랑이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강한 프랑이어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하는 건 벅찼던 것이었다.
그보다 우리도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왔는데 우르실라네는 벌써 출항 가능한 상태인 모양. 존나 몇 시부터 나온 거지.
【미네샤! 사다리 내려!】
【옙!!】
우르실라의 고함을 듣고 나무 사다리를 내려주는 선원.
짐을 매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황금 배’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범선 골데네 시프는 그냥 나무 배였다. 별로 큰 편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도 존나 비싼 배겠지.’
배 전부를 나무 몬스터 소재를 가공해서 만든 걸 테니까.
말하자면 바다에 떠 다니는 저택이다.
배가 크다고 섬까지 가는 게 편해진다면 모를까, 빌려타는 처지에서 배의 크기는 별로 상관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되걸랑.
내가 갑판에 올라타자 우르실라가 말했다.
【우리는 준비 다 했어. 식량은 충분하고, 부하 놈들한테도 어떤 일인지 설명해 뒀지. 그 섬이라는 곳까지 가는 지도는 가지고 왔지?】
【죄송합니다. 구전으로 들은 정보여서 실물은 없습니다. 말씀드리는 게 늦어졌군요.】
【그래? 별 문제 없겠지. 시간 낭비도 항해의 묘미니까.】
우르실라는 흑단 담배갑을 꺼내며 그리 양해해 주었다.
【물론 이게 장기 원정이라면 출항을 취소시킬 만큼 어설픈 계획인데, 주변 바다를 돌아다니는 정도면 가벼운 산책이랑 똑같아. 계획을 망쳐도 10일 쯤이야 굶으면 되거든. 아, 너도 담배 태울래?】
【아뇨, 저희 파티는 전부 비흡연자라서. 식량이 없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우르실라 님의 실력을 믿으면 어떻게든 되겠죠.】
【너희가 방향만 제대로 알려주면 우리가 북해의 해로(海路)를 헤매는 일은 없어. 너희들, 내 성씨인 쥬크세스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
【Ju Kudoses. ‘쿠드세스의’ 우르실라. 맞습니까?】
게르마니아의 성씨는 저런 식이었다.
‘지방 어디어디 출신 아무개’라는 명명법이다. 여기서 Ju는 여성형 전치사였다.
그러니까 우르실라 쥬드세스(Judoses)라는 이름은 ‘전북 익산의 강건마’랑 거기서 거기인 네이밍 센스다. 존나 야만인 느낌 오졌다. 팬티에 쌍날도끼를 넣고 다닐 것 같다.
군산 피바다 우르실라.
‘개씨발 쌈마이하군.’
게르마니아 인들이 3대 야만족에 노미네이트된 이유가 다 있는 것이었다.
참고로 옆나라인 니다벨리르도 도긴개긴이다. 예를 들어서 프랑의 풀 네임인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은 ‘에이트리의 후손 프란체스카’라는 뜻이었다.
우르실라는 시가처럼 생긴 담배를 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잘 아네? 그럼 믿고 맡길 수 있겠지? 이 북해는 우리 앞마당이야.】
【믿음직스럽군요.】
존나 자신감 넘치는 것 봐라. 개멋지다. 이 세상 상남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상여자, 다시 말해서 꼴페미다.
우르실라에게는 명예 꼴페미의 칭호를 주도록 하자.
이세계 꼴페미 우르실라! 북해의 마녀보다는 괜찮지 않은가.
─끼익, 끼익.
내가 대충 우르실라에게 가는 길을 알려주고 있자 파티원들도 갑판으로 올라왔다. 베로니카는 말린 풀을 빵빵하게 채운 가방을 매고 썩은 동태 눈깔로 사다리를 기어올라왔다.
“그대여. 이 가방은 너무 무겁구나. 내가 짐말이라도 된 것 같다.”
“네가 먹을 밥인데 왜 그렇게 죽상이야?”
“멍청한 소리 말아라. 그대 몰래 낚시대를 챙겨왔느니라. 내 물고기를 낚아서 먹고야 말겠다. 말린 풀 따위 먹을 쏘냐. 나는 안 먹는다. 아니, 못 먹어.”
“순항 중인 배를 쫓아와서 미끼를 무는 물고기가 있겠냐. 그게 되면 몬스터지.”
“밉구나…… 이 세상의 모든 건초장이가 미워…….”
건초라니 실례로군. 사람이 먹어도 되는 풀떼기야, 그거.
물론 나는 먹지 않습니다. 사람이 고기를 무야지, 웬 풀? 풀 같은 건 고기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된장도 고추장도 참기름도 간장도 없는 이세계에서 풀떼기는 샐러드랑 스튜 건더기밖에 안 되거든.
‘몽쉘리아인지 타르타르니아인지에 장독대 문화가 있기를.’
유목 민족이라니까 아마 버터를 바른 빵에 양젖 술이나 쳐먹고 있겠지만 말이다.
뱃여행이라는 건 존나 언제 해도 씹노잼이다.
멀티미디어에 중독된 21세기인한테는 런닝머신도 좆 같기 마련인데, 360도 상하좌우전후가 싹 다 퍼런 물 웅덩이니까 존나 뒤져버리겠다.
“하늘은 만물을 움직인다!! 다이스 롤!!”
그래서 우리끼리 모여서 이세계 보드 게임을 했다.
남들 일하는데 놀고 있냐고? 아, 프로의 업무를 방해하고 그러면 안 되지. 다른 선원들도 3조 3교대로 돌면서 노가리 까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개꿀! 눈나 말 땄다! 등골 쪽쪽 빨게 등에 올라타야지!”
“니 말 저번 차례에 함정 걸려서 못 움직이잖아 병신아.”
“아 씨발. 이 빡대가리 말대가리 새끼.”
“그대여. 그만해 다오. 왠지 내 가슴이 아프구나.”
비타민이 부족해서 그래. 풀을 더 먹으렴.
마법서를 읽던 베로니카가 책을 덮었다. 이틀 만에 보드 게임도 질려버린 라리루라는 해먹에서 슬립 모드였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서만 놀고 있었다.
솔직히 프랑이랑 다나하고만 할 거면 옷 벗기기 내기 같은 걸 하면 더 재밌을 듯 했는데, 시간이나 장소가 맞질 않아서 그러질 못 했다. 존나 아쉽네.
“자, 노르. 노르 차례야.”
입맛을 다시고 있자 내 턴이 돌아왔다.
프랑이 주는 주사위를 받아드는 나. 이제 슬슬 이 놀이도 현자타임까지 온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의 게임 중에서 재현할 수 있는 걸 만들어 보자는 생각까지 하게 됐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럴 짬은 나지 않았다.
【적습!! 적습!! 해적단이다!!】
【동서쪽에 적선 1척 출현!! 급속 습격함이 붙은 상선 나포선이다!!】
─우당탕!! 문 밖에서 소리를 치는 선원들. 나는 주사위를 굴리려다가 이마를 탁 쳤다.
“그래 씨발, 왜 안 나오나 했다.”
바이킹 서식지에서 평화로운 뱃 여행을 바라는 게 멍청한 짓이었다.
무릎을 털고 일어나면서 주사위를 던지자 6이 나왔다. 꼭 이럴 때만 좋은 숫자가 나온다니까. 갑판의 소란을 진정시키듯이 우르실라의 고함이 울러퍼졌다.
【모두 전투 준비!!】
“우리도 나가 보자. 라리루라! 일어나!”
선빵을 갈긴 적이 얼마나 쎄거나 많은지 모르는 상황인데 선실에서 노름이나 하고 있을 순 없었다. 같은 배에 탄 이상 우리는 운명공동체 아니겠는가!
‘배가 가라앉으면 좆 된다.’
이 해역은 배로 3일이나 나온 망망대해다. 여기서 육지까지 돌아갈 방법이 어딨다고 똥배짱을 부려?
【게르튀르】를 운용하면 3일 정도는 헤엄칠 수도 있다.
근데 체온을 유지하면서 육지까지 계속 헤엄친다고? 그런 망상은 뇌에 빵꾸난 새끼들도 안 하겠다. 배로 3일 걸렸으니 물장구로는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고 말이다.
─쿵쿵쿵!
무장해서 갑판으로 나오자 적이 어디 있는지 분명해졌다.
여기는 고기잡이 배가 나오기에는 애매하고, 먼 바다! 그런 곳에서 직진으로 다가오는 중소형 선박은 누가 봐도 수상한 느낌이었다.
【저게 해적선입니까?】
【그래. 그것도 인가받지 않은 불법 약탈선이야.】
우르실라는 선수(船首) 기준으로 우현에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가 그리 말했다.
나는 청산유수로 나오는 국가 공인 해적이라는 개념에 좀 머리가 띵해졌다. 밀렵꾼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멧돼지 사냥꾼이랑 아프리카 밀렵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두자.
【위험합니까?】
【글쎄다. 해적이라는 티를 내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겠지. 배도 신형인 걸 보니 초짜인 모양인데, 나를 노리는 놈은 오랜만인걸.】
망원경을 빌려주길래 해적선을 관찰해 봤다.
최근에 막 새로 뽑은 배라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골데네 시프가 관리를 존나 한 앤티크 가구라면 쟤네는 선박 모형을 크게 만들어서 배에 띄운 신품 같군.
그때였다. 해적선 놈들이 깃발을 바꿨다.
돛은 그대로였지만 그 돛대에다가 검은 해골 깃발을 꽂은 것이었다. 뭐 때문에 저런 짓을 해서 어그로를 끄는 걸까. 가오가 온몸을 지배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