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하는 것처럼 외치는 인파와, 울타리 안에서 그 자들을 째려보는 이들.
숫자 차이는 명백하다. 마을 밖에서 진을 친 놈들이 사람 숫자는 까마득하게 많았다. 3~4배는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세계에서 숫자 차이는 변수의 일부일 뿐이었다.
당장 저 소음공해 씹새들이 몬스터 무리였다면 나는 일단 번개부터 뿌리고 시작했을 것이며, 내가 아니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얼스터의 방계인 픽트 인들이다.
‘말하자면 저건 특수부대의 기지에 테러를 저지르러 가는 거랑 마찬가지란 말이지.’
저 새끼들이 단순히 병신이라서 저러고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저들이 얼스터 인 전사 여럿을 상대로 이겨낼 자신이 있어서?
‘아니, 그렇진 않겠지.’
힘으로 타파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전력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원흉은 저기에서 명치를 존나 쎄게 때려주고 싶어지는 벼락부자 콧수염 새끼일 것이었다.
“썩을 놈의 새끼들…! 아주 그냥 머리를 반으로 쪼개놔야 정신을 차리지!”
장인어른은 칼이 운다는 듯 칼집에서 시퍼런 날을 뽑아들락 말락 하고 계셨다.
나는 다나의 화끈한 천성이 어느 유전자에 기반한 건지도 대충 감이 잡히던 차였기에, 빡친 상사에게 보고를 하러가는 직장인의 기분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 저 놈들이 대체 뭐라는 겁니까? 딱 봐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장인어른께서 조금 얼굴을 일그러트리셨는데, 대답이 바로 나오질 않길래 나는 재빨리 눈치까고 말했다.
[에린의 말을 쓰셔도 됩니다. 저도 쓸 줄 알아서.]
[크흠.]
배려를 받은 게 멋쩍은 걸까. 장인어른은 헛기침을 하시고 설명을 시작하셨다.
[우리가 대대로 선조께 물려받아서 살던 이 땅의 소유권을 가진 자가 나타났으니, 우리더러 새 터전을 찾아 물러나라고 하더군. 아내와 족장도 그것 때문에 도시로 나가 있다.]
[……영지에서 쫓아내려고 한다고요? 그게 법률적으로 말이 되는…… 아, 그렇군요. 다른 귀족들이라도 영주들의 내정에 간섭할 자격은 없죠.]
브리타니아 왕가든 옆동네 영주든, 이 초라한 브리타니아 북부의 치정에 뭐라고 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상 귀족들의 연합체에 불과한 앰뒤 브리타니아 유나이티드 킹덤의 처참한 실태였다.
‘각 잡고 시비를 걸려면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겠다만, 그 짓을 해서 다른 영주들이 득 볼 게 없고.’
그래서 픽트 인들을 쫓아내겠다는 개짓거리를 해도 막으려 하는 권력자는 없는 것이었다.
왕권이 촉법소년 애미 마음처럼 뿔뿔이 찢어져서 동네 귀족들에게 따먹힌 봉건제 좆소국 답군.
[결국 원인은 영토 분쟁입니까? 하지만 반응이 격하신 걸 보면 예전부터 겪어오셨던 문제로는 안 보이는군요.]
[그래. 전대 영주 때까지만 해도 원만하게 지냈다.]
장인어른은 좀 다시 봤다는 듯 눈썹을 모으고 말씀하셨다.
나는 존나 오랫 동안 장고(長考)하다가 물었다.
[……세금은요?]
[우리는 브리타니아 인들과 교류가 거의 없고, 그들에게서 비호나 지원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싸움도 바라지 않는다. 신의를 표시할 만한 모피나 광석을 선물하는 정도는 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양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이 마을 크기와 사이어인 같은 스펙을 생각하면 세금이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는 쓰으읍 거리며 인상을 썼다.
‘불법점거라고는 하지만, 브리타니아에서는 영주가 자기네 영지의 모든 마을을 꽉 쥐고 있는 경우가 되려 드물 텐데.’
이세계인들은 토지의 소유 개념에 아득바득 물고 늘어지는 일이 적었다.
부동산법은 21세기 지구에나 있지, 이세계에서는 귀족들도 통치에 널널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뭣보다 연합국가의 면모가 큰 브리타니아 아닌가.
도봉구의 제왕 아서스가 자기 동네에서 초야권을 실시해도 옆동네에선 스와핑이 손님 대접의 기본 옵션일 수도 있다.
와 씨발 이게 같은 국가냐 싶은 중구난방의 정책들도 ‘응~ 문화 차이~’로 넘어가는 국가란 말이다.
근데 오랫 동안 잘 지내던 픽트 인의 마을에, 갑자기 ‘여긴 다케시마야. 우리 땅이지’ 하는 식의 개지랄을 떤다고?
‘땅 주인이 실효 영토를 넓히려는 건 개가 영역표시를 하는 것처럼 본능에 가깝지만…….’
그건 이세계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세입자를 쫓아내고 주인 없는 공실을 늘려봤자 관리비만 더 깨질 뿐이다. 영지의 모든 부부한테 자식을 축구 팀 꾸리듯 낳게 하려는 것도 아닌데 땅만 남아돌아서 뭘 하겠다고?
땅이 비옥해서? 개소리다. 이 쬐끄만 땅이 해 봤자 얼마나 수확량이 좋다고.
지력(地力)을 회복시켜주는 포션도 있는 세상이다.
[……대충 알겠습니다. 우선 진정하시고 칼부터 넣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헛소리 말아라! 저 개자식들이 하루가 머다하고 아이들이 잘 시간에까지 찾아와서 저렇게 난동을 피워대는데,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럭군요. 족장이나 장모님께서 싸워도 된다고 하셨어여?]
[……………….]
장인어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픽트 인은 모계사회였다.
“저…… 다나 아버님?”
그때였다. 우리 프랑은 저 새끼들을 관찰하던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장인어른께 말했다.
“어? 아, 그래. 프란체스카라고 했었나?”
“네, 네. 저 사람들의 대처 말인데요, 혹시 저희 노르한테 맡겨 보시면 어때요? 노르. 뭐 생각해둔 거 있지?”
않이 시팔 어케 알았지?
이제까지 하도 엘리트 대갈통을 써먹었더니 내 뇌가 수냉 쿨러 돌리는 소리가 프랑한테도 들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 놈한테?”
“맡겨 봐. 얘가 잔머리 굴리는 솜씨는 봐줄 만 하니까.”
다나까지 합세하자 장인어른께서도 고민하는 눈치였다.
“알윈 씨. 손님께 맡겨보면 어떻습니까?”
팔짱을 낀 장인어른께 아까 항변하던 사제 계급의 여성이 말했다. 우리 얘기를 몰래 훔쳐들었던 듯 했다.
그나저나 장인어른의 성함을 남의 입에서 듣게 되는군. 미운 사위 새끼는 웁니다.
“자네까지 그러긴가? 자넨 이 놈이 누군지도 모르잖나.”
“예. 단지 자고이래로 시련의 때에 찾아온 방문자는 둘 중 하나입니다. 영웅이거나, 또다른 시련이거나. 선조께서도 창 만큼이나 지혜로 시련을 극복해 오셨잖아요?”
옷으로 가린 목 언저리에서 문신이 보이는 그녀는 나에게 눈길을 줬다.
이 사람들이 왜 옷을 입고 있나 했는데, 저 시위대 새끼들 때문이었나 보다.
“방문객. 자신이 누구인가는 남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랍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물러설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장인어른,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내게 허락까지 구할 것 없네. 우리 다나가 왜 자네를 골랐는지 보여줄 기회이긴 하겠군.”
이게 또 포인트를 딸 찬스라고? 그럼 절대 실패 못 하지.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지혜가 뭐니 말하던 사제 아가씨한텐 미안하게도, 이 문제는 머리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머리 좋은 걸로 따지면, 다나의 DNA가 어디서 나왔는데?’
내가 엘리트이긴 해도 얼마나 똑똑하다고 이 마을 사람들이 해결 못한 걸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지혜와 지능은 다르고, 사람은 저마다 적재적소란 게 있는 법 아니겠는가.
“실례합니다.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뉘십니까?”
참모 같은 마법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허연 얼굴이 창백한 남자였다.
“흐음……. 키타이 인이신가 보군요? 이런 변방에는 무슨 일이신지요? 고향으로 가는 방향을 착각하셨나요?”
노골적으로 평가하는 시선의 끝에, 약간의 비웃음을 한 스푼.
훌륭하다. 노리고 한 거든 아니든, 말싸움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벌써 도발기로 시비를 털어오는군.
하지만 언쟁은 냉정함을 잃은 쪽이 좆털리는 것! 나는 픽 웃음짓고 로마니아 어로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저 분들을 설득할 수 있을 듯도 해서요. 사정을 좀 들어 보고 싶군요.〉
“오호라.”
내가 구라를 까자 그는 의심하면서도 일단 넘어갈 가치가 있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선 여기 계신 벤자민 님부터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이 분으로 말씀하시면 당대 북부에서 가장 큰 영지를 보유하신 알윈 가문의 장남으로──”
나는 장황한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면서 요점만 짚었다.
‘영주의 친형. 장남인데도 영주 작위를 못 받았다? 대굴빡 수준도 알만 하군.’
권력분쟁에서 밀려나고도 포기를 못한 타입인가.
뻔하구만. 나는 가오를 잡는 븅딱 귀족의 궁색한 수식어에 일일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크흠! 대마법사 셀틱이라는 과분한 호칭으로도 잘 알려진 마기마기의 간부입니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대마법사라.”
니가요?
미스릴 클래스의 흑마법사가 신장 30미터의 골렘을 타고 개지랄을 떨어대던 걸 본 몸으로써, 그 자칭에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나저나 이 새끼. 옷에 박은 문양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 마기마기인가 하는 표절집단 소속인가.’
이거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어떤 단체인지는 들어봤습니다. 셀틱 님은 로마니아에서 활동하시던 분이신가요?”
“예? 어, 아, 예! 바로 맞추셨습니다! 저희 마기마기는 로마니아에도 진출할 예정이죠!”
“그렇군요.”
나는 일당에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안녕, 다단계 회원 여러분.
브리타니아 인들이라서 그런지 나를 알아본 사람들도 있는 듯 했다.
모험가로 보이는 마법사랑 그 팀이 살짝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좀 전에 왜 내가 이 지랄을 하고 있지 하는 표정으로 이 대마법사님의 개소리를 복창하던 사람들이다.
“이런 훌륭한 분들께서 북부에 계신 줄은 몰랐군요. 헌데 어쩐 일로 여러분의 귀한 시간을 마을 영지민들을 축출하는 일에 쓰고 계십니까?”
“아, 저들은 역사를 빌미로 여기 계신 벤자민 님의 가문이 지배하는 영토를 점거한 이들입니다.”
내가 깐 구라가 통한 게 아니어도, 셀틱은 원래 주장하던 내용대로 입 아픈 설명을 지껄였다.
“본디 선대까지는 넓은 아량으로 이를 윤허하였으나, 저희 마기마기가 누굽니까? 이 땅의 정당한 소유주를 찾아내고서 저들의 불법점거를 끝내고자 온 것입니다.”
“소유주 말씀이시군요. 증거는 있으십니까?
그는 능글대는 웃음을 띄우며 실실댔다.
“물론입니다. 땅의 소유증이 있고 말고요.”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하. 제가요? 당신에게? 왜죠?”
와, 개꼴받네.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풀 파워 진상질을 맞으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한국의 알싸한 패드립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지금 주먹질이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더니, 이제 보니까 네놈 역시 저 추레한 죄인들에게 넘어간 잡배인 모양이구나!”
내가 멘탈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있던 귀족…… 이름이 뭐였지? 아무튼 그가 나서며 말했다.
“애당초 네놈은 또 뭐하는 놈이길래 우리 앞을 가로막느냔 말이다! 이건 저들과 우리의 문제다!”
“뭘 그러십니까. 귀인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을 모르는 건 모험가들의 습성 아닙니까? 벤자민 님께서 직접 나서실 일도 아닌 듯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셀틱은 니가 귀족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냐는 듯 입가를 비틀며 물었다.
“음. 제가 누구냐고요?”
“예. 뭐 모험가 플레이트 말고 신분증이라도 있으시면 좀 줘 보시죠. 제가 모험가 길드의 신분 보증은 제대로 믿지를 못해가지고, 보는 법을 배우질 못했거든요.”
“신분증이라…….”
나는 웃음을 참으며 갑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야말로 한 술 거하게 뜨라고 차린 듯한 밥상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로마니아에서도 활동할 생각이시라면 이런 걸로도 신분 증명이 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야부리를 털며 속주머니에서 목패를 1개 꺼내들었다.
물론 목패라고는 하지만, 귀금속보다 마나가 깃든 나무가 더 고급 소재로 여겨지는 이세계에선 순금으로 된 명패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내가 품을 뒤적거리자 셀틱은 귀를 후벼대며 혀를 찼다.
“아 거 참. 사람이 정말 눈치도 없이 귀찮게 하시네. 지금 이해가 안 되시는가 본데, 당신 신분이 문제가 아니──”
좆 같이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나불대던 그는 명패를 보고 아가리를 싸물었다.
“……………….”
─주륵.
셀틱의 띠껍던 표정이 싹 굳었다. 급격하게 시퍼레진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경찰한테 성을 내던 캣맘이 영장을 보고 사태 파악이 되기 시작하듯, 빠르게 죽상이 되기 시작하는 그.
‘이야, 시발. 효과 직빵인 것 봐.’
킬각이네. 내 예상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걸 눈치깐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몰라서 갖고 오길 잘 했네. 나는 아르마알스 가문의 문양을 흔들며, 마음 속의 동서남북으로 나의 빽을 서 주는 코르넬리우스 어르신께 감사의 구배지례를 올렸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그 토지 소유서라는 물건, 제가 조금 봐도 되겠습니까?”
상원의원이 회장인 국제대기업이랑 함 떠 보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