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큭!”
─벌떡!
라리루라의 경기 상대가 골렘을 자폭시켰을 때부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베로니카는, 조종당하는 인질들에게 공격을 받는 그녀의 모습에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프랑! 저 놈이 정녕 그때 죽었다는 흑마법사더냐?”
“……본인 말로는.”
귀를 누르며 프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루크레겐스에서 있던 일은 노르드와 라리루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난하는 관객들이 일으킨 소란 속에서 저 작은 대화소리를 붙잡은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관객 여러분! 수, 순서! 순서를 맞춰 피난해 주십시오!》
《지랄 마!! 저거 안 보여?! 흑마법사일 게 뻔하잖아!!》
《경비대도 잡혔는데 무슨 순서야!! 저리 안 꺼져?!》
거기다가 지금 당장 관객석으로 뛰쳐가고 싶어도, 앞뒤를 다투며 도망치는 인파를 뚫고 가기는 쉽지 않았다. 출구에다 수작이라도 부려놨는지 피난하는 속도가 이상하게 더뎠다.
라리루라의 전투를 내려다보던 티르시가 완드를 쥐었다.
“여러분. 힘을 써서 뚫고 가죠.”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만, 여길 이대로 방치했다간 문제의 번복일 뿐이야.”
무고한 시민의 죽음이나, 장차 노르드의 평판이나 사업에 생겨날 악영향도 문제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결계가 해제된 게 훨씬 큰 문제다. 인질의 목숨을 포기하고 공격해봤자 이대로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름 없을 것이니까.
꼭두각시 인질이 얼마나 파괴되든, 흑마법사인 코뤤투스는 피난이 늦어지고 있는 ‘무기’를 추가로 징집하면 그만이다.
“베로니카. 결계부터 새로 치자. 할 수 있지?”
“그래. 절반은 맡기마.”
베로니카는 다나의 질문에 대답하며 미스릴 메달을 꺼냈다.
프랑과 다나가 자신을 돌아보며 훈련하고, 라리루라가 새 꼭두각시를 만들며, 티르시가 〈강림〉 마법을 연구하던 동안, 베로니카라고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던 건 아니다.
이 메달은 그녀가 몇 달 사이에 연구/분석해서 만든 매직 아이템 중 하나였다.
트롤 킹과의 전투 중에 파괴된 석판을 새로 만들면서, 그 석판의 인벤토리와 연결된 다른 아이템도 제작했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 연결했기 때문에 단점도 있다. 노르드가 가진 석판과는 다르게 꺼낼 수 있는 물건의 크기도 한정되고, 또 마나 소비도 적지 않았다.
단, 그런 단점을 감안할 정도의 장점도 있다.
─지잉.
메달에 손을 집어넣은 베로니카는 오우거의── 아니, 훌드폴크의 옥새를 꺼냈다.
─슈오오오오!
베로니카는 옥새에 담긴 마나를 흡수했다. 노르드의 창을 억지로 분석하면서 쓴 마나를 회복한 것이었다.
“간다! 네 페이스대로 마법 써! 타이밍은 내가 맞출게!”
“부탁하마!”
마찬가지로 옥새에서 마나를 충전한 다나는 인파가 없는 저 앞쪽의 관객석으로 뛰쳐나왔다. 넓은 투기장을 완전히 결계 범위에 넣고자 건너편으로 빙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잉. 다나도 달리면서 자기 몫의 메달에서 노트를 한 권 꺼냈다.
이 노트의 존재도 가족끼리 인벤토리를 연결한 이유였다.
트롤 킹 사태 때에도 실감했던 연락방법의 부실함을 극복하려는 노르드의 새로운 시도다.
가족끼리 공유하는 아공간에 2권의 노트를 둔다. 그리고 그 노트에다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써서 다시 인벤토리에 넣는다.
그렇게 하면 공간의 제약을 넘어 빠르고 손쉽게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발상이었다.
“칫.”
하지만 다나는 노트를 꺼내보고 혀를 찼다.
실험을 통해서 메시지 교환이 가능하다는 건 확인했지만, 아공간에서 꺼낸 노트는 백지 상태였다. 노르드가 메시지를 남기지 않은 것이었다.
‘싸우고 있던가, 메시지를 확인할 생각을 못하고 있나?’
확인을 안 한 거라면 큰 문제는 아니다. 노르드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뜻일 것이니까.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이 습격에 대해 알고 그에게 밝혔다 치면, 그는 습격 사실을 알고서도 곧바로 메시지를 남기거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가정이 다나의 심정을 초조하게 했다.
‘그 멍청이, 조바심 내면 안 되는데……!’
자기 목숨은 곧잘 칩으로 걸면서, 아내들의 안위가 걸렸다 치면 금방 조급해지는 게 그녀의 남편 아니던가.
이전에도 그랬다. 그녀가 납치당할 위기라고 착각했을 때, 그는 만사를 전부 제쳐두고 연구소로 달려왔던 그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라고 다를까? 바라는 게 사치였다.
물론 그라면 초조해 하는 상황에서도 적절한 판단을 통해 행동할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근데 그 ‘적절함’의 기준이 우리랑 다른 게 문제지!’
1초라도 더 빨리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승부를 서두를 가능성은 컸다.
싸우다가 팔까지 잃어먹은 주제에 그런 점은 죽어도 낫질 않는 것이었다.
‘……그래, 반지!’
인파를 해치며 이동하던 다나는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에 결혼반지를 감싸쥐었다.
─우웅!
반지의 힘이 노르드의 상태를 여실히 전해줬다. 반려자의 용태를 살필 수 있는 쌍성의 호박의 능력이었다.
반지의 힘을 빌자 다나는 노르드의 몸 상태를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상처는 없어. 마나 소비가 격렬한 건 오러를 쓰며 싸우고 있어서인가? 저쪽에도 〈임모르탈리스〉 정규 멤버 급의 적이 배치돼 있다는 얘기야.’
다나는 혀를 차며 노트에 펜을 가져갔다. 그때 베로니카도 주문을 끝마치며 외쳤다.
“──전사들은 맥주 홀에 즐겁게 앉아 있으리(ðar wigan sittaþ, on beorsele bliþe ætsomne)!!”
베로니카가 지팡이를 찍은 곳에서 룬의 만다라가 펼쳐졌다. 그녀가 몇달 전 고르갈리아의 성지에서 아델라이데에게 새로 배웠던 룬 마법이었다.
《영광의 벽(Niwajmariz Veggr)!!》
“──지금!”
다나도 타이밍을 맞춰서 실드를 펼쳤다. 그녀의 어머니가 집필한 마도서를 통해 습득한, 얼스터의 옛 마법이었다.
─촤르르륵!
두 종류의 방어막은 돔 형태로 투기장과 피난이 끝난 관객석을 덮었다.
이걸로 더는 인질을 붙잡지 못할 것이었다. 다나는 실드를 유지하면서 노트에 글을 써내려갔다.
─투기장에 〈임모르탈리스〉 출현. 루크레겐스에서 싸운 흑마법사로 추정. 본인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주장.
프랑이 소음 속에서 어렵사리 잡아낸 정보를 적어내려가던 다나는, 잠시 펜을 멈췄다가 마지막 줄을 휘갈겼다.
─예정대로 대처하겠음. 쫄지 말고 니 일이나 할 것.
***
마나의 칼날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6호의 등에 발판을 밟고 올라타서 시간을 끌던 라리루라는 마법을 조작했다.
〈흐읍!〉
꼭두각시의 팔이 180도 회전했다. 마나의 손톱이 예리하게 바람을 갈랐다.
─카가강!!
아르마알스의 비검을 재현한 칼날의 폭풍우는 6호의 마나 손톱에 가로막혔다. 미처 막지 못한 참격도 5호가 전개하는 실드 마법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텅 빈 관객석을 달리는 라리루라를 적에게 조종당하는 인질이 쫓아왔다.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다. 언데드화 시키거나, 코뤤투스 자신의 마나를 사용해서 강화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걸 순전히 좋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근섬유가 찢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을 때, 라리루라는 재빠르게 달리는 방향을 우측으로 꺾었다.
《끄르르륵……!!》
피거품을 물며 건강한 갈색 피부의 여인이 공격을 가했다.
─촤악! 꼭두각시의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라리루라의 실드에 새빨간 액체가 튀었다. 덤벼들었던 인질의 팔근육이 엉망으로 찢어지며 튄 피였다.
평범한 시민인 듯한 여성은 색소가 짙은 갈색 피부인데도 불구하고, 눈에 선할 만큼 푸르죽죽한 피멍이 들어 있었다.
〈……윽!〉
라리루라가 아직 반격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상태다. 피거품을 무는 얼굴은 의식을 잃은지 오래인 듯 했다. 몸을 찢는 고통을 겪을 바에는 저 상태가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마나 고갈에, 근육까지 파열됐어.’
일반인에게 억지로 강력한 무술을 사용하게 만들어서였다.
조종하는 인질이 죽거나 말거나, 마나를 모두 사용시키고 근육이 부숴지도록 공격을 시키는 것이다.
저러다가 죽더라도 언데드로 변화시켜서 조종하면 된다는 생각일까. 멀리서 참격과 투창을 시도하는 이들도 흘린 피로 발밑을 적시는 상황이었다.
〈아, 정말! 관객의 난입은 매너 위반이에요! 시민 의식이 모자라다는 증거라구요!〉
억지로 농담을 뱉어봤자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코뤤투스는 그런 라리루라를 조롱하듯 말했다.
〈왜 그러지? 너나 다른 여자들의 목숨보다 생면부지의 타인이 더 중요한가?〉
〈그런 건, 아닌데요!〉
─퍽! 접근한 인질을 주먹으로 격퇴시킨 그녀는 땀 방울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자신 뿐이면 몰라도, 언니들의 목숨까지 저울에 올리다면 이들 전원의 목숨보다 가족을 우선시할 것이다. 이기적이라 할 것도 없이 당연한 생각이었다.
오히려 생판 남의 목숨을 가족의 안전보다 우선하는 편이 훨씬 이상하지 않은가. 라리루라는 가족의 목숨으로 위선을 떨기는 싫었다.
하지만──
‘──내가 마나를 소비하도록 유도하고 있어?’
이 인질극의 핵심은 그렇게 쉽기만 한 셈법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