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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536화 (536/1,009)

거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덩치를 쳐서 날렸다.

뒤로 밀려나는 틈에 창을 뽑고 공격을 시도했다. 오러까지 쓸 것도 없었다. 대부분 성체인 듯 생각보다 강했지만, 역시 한때 바이콘의 정원섬에서 만났던 놈 정도는 아니다.

‘그 놈처럼 무기를 뽑는 놈들도 없고.’

나한테는 좋은 경향이었기에 굳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쾅!

창으로 공격을 막고, 두꺼운 가죽에 심폐정지술을 걸어서 내부에서부터 사살했다.

위화감은 4마리 째의 서리 거인을 죽였을 때였다.

“……니들 좀 많지 않냐?”

“Qoau a!!”

5마리째의 서리 거인은 죽음이 무섭지도 않은지 용기 있게 달려왔으며, 1초 뒤에는 두개골이 으깨졌다. 하지만 바로 그 뒤에서 똑같은 놈이 달려드니 골치가 아팠다.

‘수가 많군.’

설마 이 좁은 곳에 수백 마리나 살 가능성은 적다. 그러니 이대로 싸워도 이기지 못할 건 아니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자.

최악의 경우는 마법으로 쓸어버려도 되고, 내가 이 새끼들보다 빠르니까 튀어도 그만이다.

‘석판이 이승과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21세기의 산물인 휴대전화도 중계기가 없으면 안 터지기 마련!

석판의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낼 순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 있을 아내들까지 그렇다는 실증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석판에 저장한 식량이나 회복템이 소지 아이템의 전부일 수 있다.

투팍─!!

결심한 나는 시체가 입구를 막아버리기 전에 밖으로 몸을 빼냈다. 앞을 막은 씹새는 걷어차서 자빠트렸다.

“오늘밤은 기록적인 한파가 예상됩니다!!!”

동굴 밖에 나오자 바로 추위가 몰려왔다.

거인들이 쫓아온다. 나와바리를 침범당한 것이니 빡칠 만 한가? 짐승 같은 새끼들.

근데 이 거인 새끼들은 추위도 안 타나?

‘아, 혹시 저 두꺼운 가죽이 그런 용도인가?’

내 장비는 이 새끼들 중에서 특히나 쎄던 놈의 가죽이다.

혹시 이것마저 없었으면 진즉 얼어 뒤졌을 수도 있겠군. 난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를 우연에 혀를 차고 주먹을 피했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새끼들, 뒤쪽에 자그만 생물을 쌓아놓은 상태였다.

사냥감이겠지. 아마 식량일 것이다. 먹을 수 있을까?

‘아니, 식량이 바닥나기 전까진 참자.’

무슨 독성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다가, 원래 지옥에서 뭔가 쳐먹으면 영혼이 지옥에 귀속된단 신화도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이상으로 전투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흥분했지만, 5마리나 썰어보고 나니까 싸움 자체가 비효율적이다.

‘야생짐승처럼 사냥한 고기를 먹을 것도 아니고, 움직여서 체온을 높여도 보온이 안 되면 오히려 땀을 흘린 만큼 잃는 온기가 더 많아.’

빡침을 참을 때와 참지 않을 때는 분간하자.

나는 가성비 좋은 속도로 서리 거인들에게서 멀어졌다.

혈수마공(血手魔功)

석사탈주(碩士脫走)

뽈뽈뽈뽈뽈─!!

내가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튀자 거인들은 흥분한 듯 하다가도 얼마 못 가서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게 꼭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라서 예감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동할까. 근처에 높은 곳은…… 저긴가?’

산은 표고가 높고 체력 소모가 심할 테니까 피하고, 별로 보기 좋지 않게 얼어붙은 나무를 목표로 삼았다.

─팔랑.

한 번 더 노트를 확인했다. 여전히 메세지는 없다.

‘싸움이 어떻게 흘러갔든 끝나기는 했을 시간인데.’

결국 못 참고 내가 먼저 메세지를 남겼다. 이쪽 세상에 대한 추측을 몇 줄 적고, 식량을 넣어줄 수 있느냐는 내용으로 글을 적어서 다시 석판에 넣어뒀다.

그 다음에는 석판에서 꺼낸 천을 몸에 둘둘 둘러서 보온을 유지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털장갑도 넣어둘 걸.’

쓰벌, 설마 사막 나라에 와서 추위에 벌벌 떨게 될 줄 알았겠냐. 겨울이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지옥이란 이름값 하네.

“그런데 저승사자가 온 것도 아니고, 무슨 이렇게 얼척이 없는 방법으로 저세상에 다 오냐.”

내가 지옥에 온 것 자체는, 지옥의 판사들이 꼰대에 인성 파탄난 원시 고대 똘게이들이라고 치면 넘어가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저승사자 같은 걸 보내서 데려오는 게 예의 아닌가?

공무원식 날림 일처리에 치가 떨린다. 천사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얼굴 허연 저승사자들이 갓 쓰고 찾아오는 것 정도의 퍼포먼스는 보여줘도 될 텐데 말이다.

‘……아닌가? 따지고 보면 천사도 저승사자의 일종이지?’

비슷한 하청끼리 일을 분담하는 거였던가.

그럴싸한 말이나 생김새로 사람을 홀리지만, 죽은 사람을 데리고 가서 지옥에도 쳐박는다는 점에서는 천사나 악마나 도긴개긴인 것도 같다.

천사 대빵과 악마 대빵이 형제지간이라는 풍문도 있던가.

흐음. 어린 시절에 네로와 파트라슈를 데려가는 천사들을 보면서 그러지 말라고 엉엉 울었을 때가 생각나네.

─사박.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금방 나무 아래였다. 나는 그걸 쳐서 눈을 털어내고 위험을 파악했다. 안전해 보인다.

샤샤샥─. Z-용사로서 원숭이의 DNA를 일깨우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

‘떨어질 때는 정신이 없어서 세밀한 부분까지는 못 봤어.’

이만한 높이면 일대가 대충 보이기는 할 것이다. 아파트와 산에 막혀서 지평선이 안 보이는 한국이랑은 다르니까.

그렇게 일반인이 떨어지면 뒤질 듯한 높이까지 와서, 주변 풍경을 뜯어살피는 나.

“……넓군.”

동서남북도 구분할 수 없지만, 한쪽에는 높은 고산지대가 있다.

거길 남쪽으로 잡으면 서쪽은 빛에 침식된 것처럼 완전히 하얀색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우수수 솟는 게, 가 보고 싶진 않은 장소였다. 위험도 별 5개.

‘……건물도 있네?’

춥고 황량한 자연 풍경 자체에 시달려서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주 먼 곳엔 건물이랄 것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건물이란 문명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문명이라…….’

여기가 지옥이라면, 죽어서 여기 떨어진 인간들도 있을까?

아니면 저 서리 거인들처럼 인류 외의 종족이 세운 곳인가.

그렇지만 거리 상으로 저기까지 가는 건 무모할 듯 했다. 엄청나 보이는 거리가 나무에 올라탔다고 보일 정도로 아무 장애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래서야 가는 길에 얼어 뒤진다.

‘좋지 않군.’

어느 한쪽 방향을 잡아서 실패를 각오하고 이동해야 하나?

‘아내들과의 연락이 우선이겠어.’

석판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다면 이동수단도 늘어난다. 내 걱정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메세지를 남겨두자. 이 세상에 떨어진지 30분이나 됐을까 모르겠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아니, 내려오려고 했다. 풍경의 한 구석에 쌩둥맞게 솟아나 있던 이상한 건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윽!”

내려오려다가 가지를 잡고 행동을 취소했다. 나뭇가지조차 차가워서 손가락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 다시 올라와 그 건물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럴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다.

눈처럼 하얀 벽면과, 첨탑에 붙은 금색 삼각뿔이 인상적인 건축물!

나는 그 건물의 익숙한 모양새에 입을 딱 벌렸다.

배경은 천지차이였지만, 틀림없다.

사막의 베이지색 모래 배경보다, 이 흰 설원이 몇 배는 더 잘 어울리는── 대리석과 황금으로 세워진 건축물!

“피라미드잖아.”

나르메르-나일의 왕, 파라오들의 왕릉이었다.

***

순장(殉葬)이라는 문화를 들어본 적 있는가?

귀족이나 왕족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신하나 노예, 돈이나 자산 등을 묘지에 함께 묻어버리는 장례식이다. 존나 야만스럽기가 하늘을 찌르는 산매장 민간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흔히 ‘죽어서 돈 싸들고 갈 거냐’ 같은 표현의 비아냥이 쓰이곤 했는데, 이 순장 문화가 있는 동네에서는 ‘엥 우리는 싸가는데용’ 하고 반론할 수가 있는 것이다.

21세기 지구인인 나는 그걸 미개하기 짝이 없다고 여겼다. 정치질에 당해서 같이 묻히는 사람들은 무슨 죄야. 야만인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혹시, 그게 정말로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면?

정말로 사후세계에 생전의 자산을 가져갈 수 있다면?

그 의문은 피라미드 앞에 왔을 때 더욱 현실미를 띄었다.

‘……순장, 할 만 하겠는데?’

산 사람을 같이 묻는 건 어쨌든, 재산을 묻는 것 자체는 꽤 끌리는 장례식이었다.

이 추운 설원에서 든든한 전셋집을 한 채 가지고서 금수저 지옥인행을 스타트 끊을 수 있다니?

한빙지옥의 추위를 잠깐 겪어본 나조차 갑자기 끌릴 만큼 끝내주는 유혹이었다.

나르메르-나일의 파라오들은 그것을 알고 한 걸까?

‘아니, 그보다 나르메르 인도 죽으면 니플헤임이나 발할라 같은 곳으로 가나?’

걔네 전용 사후세계는 없고?

일단 로마니아의 가짜 신들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엘리시온이라는 로마니아 특유의 저승세계는 구라일 가능성이 큰데.

‘……어쩌면 피라미드 자체가 이 니플헤임에 맞춰서 짜인 건축물일 수도 있겠어.’

생각해 보길 바란다.

피라미드만 찾았다 하면 몰려드는 도굴꾼이 얼마나 되던가. 파라오의 왕릉을 터는 도적들 문제는 고대문명 시절부터 횡행하던 문제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사막 한가운데에 흰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을 해 놓는다?

‘나 찾아줍쇼도 아니고, 이상하긴 해.’

마법을 써서 숨긴다고 해도 위장색의 개념이 없는 세상도 아니잖은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저 대리석 벽면은, 현세가 아닌 이 니플헤임의 설원을 염두한 위장색이었던 게 아닐까?

설원에 녹아들듯 숨어버린 피라미드.

이 눈밭을 대비한 위장색.

그리 생각하는 게 더 말이 된다.

나도 운이 좋아갖고 발견한 거였다. 건물 자체의 위장색이 개쩔어서 발견한 뒤에도 한순간은 무슨 플라잉 천년 퍼즐이 뎅그러니 하늘에 떠 있는 줄로만 알았을 정도다.

“근데 들어가도 되나 몰라.”

혹한을 뚫고 접근해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게 왕릉이면 그 안에는 진짜 왕이 있을지도 몰랐다.

죽은 파라오의 영혼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라면 내가 대뜸 들어가서 차 한 잔 줍쇼 하며 뻔뻔하게 굴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파라오랑 같이 순장당했던 병사들이 날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 나는 파라오한테 듀얼 한 판 뜨자고 명계까지 찾아가는 미친 카드쟁이가 아니란 말이지.

‘우선 좀 살펴볼까.’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여기가 낫겠지.

낯선 타지에서 익숙한 상대를 만나니까 친근감이 오졌다. 나는 느긋하게 피라미드 주변을 돌다가 인기척을 감지하고서 벽면에 밀착해서 숨었다. 내가 먼저 사람 기척을 찾아낸 건 오랜만이군.

“제길……!! 역시 안 돼!! 밖으로 빠져나오면 여기로 나올 뿐이야!!”

“씨발, 그럼 어떡하냐고! 안쪽으로 나아가게? 그 파라오란 꼬맹이가 말한 것처럼?”

“헛소리 마! 그 년 말을 어떻게 믿어!”

대화를 나누는 남자들이었다. 복장은 현대 이세계 느낌에, 그다지 망자나 죽은 영혼들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브리타니아 어?’

장비까지 보면 피라미드 도굴꾼인가.

도굴꾼, 좋게 말해서 탐험가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들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에 그들은 자지러지듯 놀라며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으헉?! 누, 누구냐!”

“사, 사람? 귀신인가? 아니면 지옥을 떠도는 영혼?”

“호만! 자꾸 개소리 할래?! 여긴 지옥 같은 게 아닐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아니, 여기 지옥 맞는 것 같은데.

대충 알겠다. 이 양반들은 나처럼 니플헤임 뉴비였다. 뜬금없는 확장팩 DLC 업데이트에 지금도 대혼란 중인 동지시다, 이 말씀.

“실례합니다, 여러분. 괜찮으시면 뭣 좀 여쭤봐도 될까요?”

“대, 대답하지 마! 망자의 말에 속아넘어가면 큰일 난다!”

“아까는 나더러 여기 지옥 아니라며!”

뭐라고 떠들면서 투덜대던 남자들은 마음을 굳혔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아, 안녕하쇼. 그런데, 혹시 뉘신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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