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나는 처음에는 나한테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페르티티의 시선은 티르시 쪽에 꽂혀 있었다.
“네? 아, 그……”
티르시는 약간 당황한 듯 했다. 따로 뭔가 물어보려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그녀는 생각을 짜내듯 눈을 좌향좌 우향우로 굴리다가 말했다.
“말씀하기 싫으신 거면 상관은 없는데요……. 저번에 노르드가 얘기한 비밀이라는 건 뭐였어요?”
…움찔.
움찔한 네페르티티는 발을 눈이 헤엄치다가, 나랑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곤란한 기분이 들어서 웃음을 지었다.
“직접 말씀하시기 거북하시면, 제가 뭘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는지부터 들어보실래요?”
…끄덕. 고개를 까닥거리는 네페르티티였다.
나는 모닥불을 보면서 잠깐 말을 정리했다.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일단 기본 조건부터 말하자.
네페르티티는 영혼을 볼 수 있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영매 체질인 걸 수도 있겠지.
게다가 영혼에 대한 지식도 빠삭하다. 내가 모르던 영핵이라는 하던 개념까지 알고, 내 저주 파괴 작업에 조언을 해 줄 정도 아니던가. 그 이상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나와 네페르티티가 겪었던 어느 사건의 흐름을 되짚어 볼 필요를 만들었다.
나는 장작을 한 개쯤 더 던져놓고 말했다.
“네페르티티 씨. 기억 나십니까? 예전에 저희가 처음으로 같이 〈임모르탈리스〉의 흑마법사를 쓰러트리고, 그 자식의 연구실을 뒤적거렸을 때 말입니다.”
“……기억 나.”
우리가 사르가디스 길드장들과 유니콘 흑마법사의 공방을 찾아다녔을 때 얘기다.
“아니면 약간 더 예전 일을 꼽아도 되겠죠. 제가 영혼 동력로라는 걸로 움직이던 골렘을 무너트렸을 때, 라고 하는 게 더 나을까요?”
“……으.”
네페르티티는 옷을 여미며 두 발을 문질러댔다.
달리는 10층 건물 같은 골렘을 때려부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어른한테 혼나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골렘 하니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유니콘 흑마법사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울프헤딘의 힘을 사용했었다.
‘골렘이란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영혼에서 일시적인 마나를 흡수하고, 구신의 마나를 룬으로 치환했지.’
마나를 받아서 마나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영혼들의 힘을 빌려쓰는 형태다.
‘근데 존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흑마법 아닌가?’
영혼의 힘을 쪼옥 빨아 쓴다는 점에서는, 상호동의라는 걸 빼면 나나 그 유니콘 흑마법사나 도긴개긴이네.
게다가 시발 죽은 자의 마나면 그냥 어둠과 음의 마나 그 자체잖아. 그때부터 나 강북호가 암흑의 다크의 재능을 타고 난 저주받은 천재라는 게 드러났던 거였군.
아무튼, 그때는 그렇게 해서 거대 골렘의 동력로에 갇혔던 영혼을 성불시켰다.
내가 좆밥 시절이었는데도 네페르티티에게 결정적인 승기를 줬던 건, 오직 내가 오딘의 후계자인 울프헤딘이었던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건 후일에나 밝혀진 사실이었기에, 사실 최근까지 나는 그때의 일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냥 내가 오딘의 후계자라는 게 암시됐었던, 말하자면 당사자인 나만 몰랐을 뿐인 운명적인 복선 정도로 치부했다~ 이 말이다. 굳이 되짚어볼 필요성도 못 느꼈었고.
하지만 사실 그때의 과정에 조금 더 내막이 있었던 거라면?
뭔가 거창한 사실이 숨겨져 있던던 건 아니다.
더 간단한 일이다.
그때 영혼이 성불하는 걸 목격한 사람이, 나랑 아비두스만 있던 게 아니었다는 점.
“네페르티티 씨께서 영혼을 보실 수 있으시다면── 그때 거대 골렘의 파괴 중에 일어난 자초지종도 전부 보셨겠죠.”
그게 한 꺼풀 더 숨어 있던 과거 골렘 토벌전의 내막이다.
네페르티티가 영혼을 볼 수 있다면, 그때 뭐가 일어났는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좆밥 브딱이 노르드가 영혼들의 힘을 빌리더니, 그 힘으로 골렘을 퇴치하는 모습.
그 내러티브를 전부 봤단 얘기다.
─슥. 팔짱을 끼고 있던 길다트가 문에서 등을 떼고 발을 옮겼다.
자기가 들을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눈치가 없진 않군.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그 뒤에, 연구실에서 그 자식이 흑마법의 소재로 쓰려던 시체들에게 정보를 청취했던 것도 그래요.”
내가 흑마법사 토벌대에서 이상하게 PPT 본능을 발휘했던 탓에, 길드장들은 나를 탐정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나한테도 뭔가 깨달은 게 없냐는 듯 눈치를 줬었지.
나는 그게 부담스러워서 실험실의 항아리에 들어 있던, 그 유니콘 흑마법사의 피해자들의 영혼을 불러서 정보를 후다닥 뭔가 아는 건 없냐고 물어봤었다.
덕분에 놈의 연구 기록 같은 것도 찾아냈던가.
“그런데 네페르티티 씨가 영혼을 볼 수 있으시다면, 그때 제가 피해자들의 영혼이랑 대화하는 것도 들으셨을 겁니다.”
나약한 영혼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어도, 나 못지 않은 영매 체질인 네페르티티라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시치미를 떼며, 마치 아무 것도 못 들은 듯 얘기를 흘러넘겼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영혼의 영 자도 꺼내지 않았다.
거기까지 말한 나는 새롭게 어떤 사실을 깨닫고 픽 웃었다.
“생각해 보면, 절 연구실까지 데려갔던 건 영혼에게 뭔가 묻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셨겠군요.”
흑마법사 토벌에 공로를 세워서 보수를 챙겨준다는 마음도 있긴 있었겠지.
하지만 내심 전투 중에 봤던 영혼과의 교류를 다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보수를 줄 생각이었으면 자기가 챙겨서 건네주면 그만이니까.
남들이 삥땅치지 않게 직접 보러 오라니. 교묘한 핑계였다.
네페르티티가 그만 참지 못하고 내 해체 과정을 지적해 줄 때까지는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얼마 전까지도 깜빡 속아넘어가고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그런 내막이 있었다면 앞뒤가 맞는다.
자기와 인연이 있는 적의 비장의 병기를 좆밥 브딱이가 펑 터트렸는데, 네페르티티는 어떻게 한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은근한 호의를 드러냈었다.
값비싼 미스릴을 선물하거나, 거리감이 이상하게 가깝거나.
‘이것들 간에 관계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네.’
영혼을 볼 수 있는 네페르티티다. 관련 지식을 찾아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영혼에 대한 박학다식한 면모에는 그런 귀결이 있었을 것이었다.
당연히 내가 흑마법사를 심문하는 걸 몰래 빠져나와서 본 것도 그 연장선이겠고.
“그러니까 네페르티티 씨가 제게 신경을 쓰시는 건, 제가 영혼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근본적인 이유는 저의 그런 능력에 뭔가 바라는 점이 있으셔서겠죠.”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마무리했다.
“제가 눈치챈 건 딱 여기까집니다. 틀린 부분이 있나요?”
“……없어. 전부 정답.”
네페르티티는 후드를 걷었다. 추위에 빨개진 코와 귓볼이 눈에 띄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건 감정 표현이 서투를 뿐, 손짓발짓이나 얼굴 미세한 변화까지 보면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다.
그러고 보면, ‘맨날 멍 때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한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던가.
그런 사람들도 절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게 아니다. 그 반대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 생각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멍하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랜다.
좋고 나쁘고 이전에, 자기 생각에 골몰해서 주변에 보이는 모습에는 신경을 덜 쓰는 사람들이 그런 타입이다. 멍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자기 생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중시하는 인물상.
그런 사람의 특징을 거꾸로 말하면…… 신경 쓰이는 상대 앞에서는 절대 멍 하니 있지 않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사람이라면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 감정이 희미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진짜 아무 생각이나 감흥 없이 살 리는 없잖은가. 게임 속 캐릭터여도 //감정표현 같은 명령어를 넣으면 호응은 해 줄 텐데.
티르시는 이야기를 곱씹는 듯 하다가 물었다.
“그니까…… 노르드의 능력을 보고, 감사 반 관심 반으로 주목하고 계셨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거면 왜 헤어지기 전에 부탁하시지는 않고?”
“……부탁하면, 휘말리니까.”
“네?”
티르시는 요령이 없는 설명에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갔다.
“〈임모르탈리스〉는 개인주의 집단. 1명을 해치운 정도로 철천지 원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 놈들과 원한을 진 네페르티티랑 제가 협력하면 저도 몸이 성할 거라는 보장은 없죠.”
네페르티티는 자기 말을 잘 알아주는 게 기쁜 듯, 어색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마피아 소속 깍두기 1명을 줘팬 거랑, 그 마피아 척결을 목표로 하는 형사랑 팀을 꾸리는 것 정도의 차이다. 당시의 개좆밥이던 브딱이 노르드에겐 특히 더.
부탁하면 거절당할 거고, 만약 내가 받아들이거나 했어도 애꿎은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상황.
“그래서 저한테 오시긴 했어도, 말씀은 못하셨던 거군요.”
“처음부터 말할 생각은 없었어.”
네페르티티는 그 점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즉시 대답했다. 딱히 오해하지는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여 두었다.
“미스릴을 주시거나, 무술을 가르쳐 주시거나 한 건…… 뭐, 제가 너무 약했으니까 훼까닥 죽지 않기를 바래서겠군요.”
“……꼭 그런 건 아냐.”
“흐흐. 제 말투가 나빴군요. 그래도 엄청 도움이 됐습니다. 그때 해 주신 말씀을 몇 번 복기했는지 모르겠네요.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하자 네페르티티는 얼른 후드를 썼다. 눈을 피하려는 걸까.
자기 속마음을 들킨 경험이 얼마 없어서 부끄럽겠지. 나도 무표정하고 멍해 보이는 그녀에게 저렇게 복잡한 행동원리가 있었으리라곤 생각 못했으니까.
네페르티티는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아?”
“알기는요. 그냥저냥 넘겨짚는 겁니다.”
“……여자가 많아서, 여심에도 빠삭해?”
“전혀 아닌데요. 그거 중상모략입니다.”
티르시. 댁도 갑자기 눈이 좁쌀처럼 작아지는 거 그만해.
이 4차원 아가씨가 말수도 적은 주제에 갑자기 급소를 찌르네. 난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아무튼 그러시던 중에, 제가 갑자기 급성장해선 〈임모르탈리스〉를 보이는 족족 죽여대고, 아예 완벽히 적대하려는 것처럼 나르메르-나일에서 대외적인 활동을 해댔으니…….”
─아, 이제는 내가 엮이더라도 노르드한테 피해를 끼치진 않겠다.
내 소식을 네페르티티는 대충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자기랑 엮이건 말건, 그녀랑 재회했을 무렵엔 나도 진작에 흑마법사의 철천지 원수가 됐으니까.
“그래서 저한테 바라시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요?”
“……영혼이 남긴 메시지를 읽어줬으면 해.”
“영혼의? 유언 같은 겁니까?”
네페르티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된 기록이지만, 나는 못 읽었어. 너만큼 영혼이랑 잘 대화하지도, 마법을 쓰지도 못하니까……. 그래서 조금만 더 친해지면 부탁하려고 했었어.”
“이해가 갑니다. 저희가 그런 부탁을 할 만큼 친해지기는 했죠.”
“……정말?”
네페르티티는 눈을 약간 동그랗게 떴다. 거의 변화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하도 표정근육이 굳어 있는 사람이라서 고작 눈꺼풀의 변화마저 극적이었다.
“……다행이다.”
동그래진 눈이 원래 크기로 돌아갔을 때는 마음이 놓인 듯 눈썹도 편안하게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픽 웃었다.
“뭐, 나머지 얘기는 또 기회가 됐을 때 합시다.”
대충 알 만한 이유는 알았다.
네페르티티의 호감이란 건 내 행적에 대한 호의였으며, 또 거리감이 거침없는 건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었겠지.
난 그렇게 일단 밖에 있을 사람들도 생각해서 얘기를 끝내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티르시가 툭 말을 던졌다.
“그것 말고는요?”
“넹?”
“……?”
우리가 고개를 모로 꼬자, 티르시는 뚱한 눈빛으로 말했다.
“친해지고 싶고, 그리고 나서는요?”
“그리고, 나서……?”
잠깐의 침묵. 네페르티티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결론을 유배한 듯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티르시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너는?”
“……………….”
그렇게, 또다시 침묵.
‘설레이는 이 마음은 뭘까~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나는 이유도 없이 대굴빡 안에서 자동재생되는 곡조에 두 눈을 감았다.
괜히 얘길 꺼냈나? 아니면 내가 존나 꼴마초답게 상황을 정리해야 하나?
“노르드. 오프툼을 찾았다.”
나의 정처없는 고민을 끝내준 것은 길다트였다.
즈엔장, 순정마초!! 믿고 있었다고!! 이게 유부남의 상부상조일까. 나는 얼굴이 펴지지 않게 신경쓰며 얼른 일어섰다.
“오고 있습니까?”
“마침 근처였다더군. 직접 봐라.”
보라면 봐야지. 밖으로 나가자 오프툼이 정령을 뒤따라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먼 발치에서도 보이는 딱딱한 얼굴에 눈치껏 아가리를 쌉쳤다.
《무사하셨군요. 오프툼 씨.》
《그렇지. 지금만큼 무사하길 잘 한 날은 없었어.》
눈발에 파묻히듯 걸어온 오프툼은 입과 분위기가 표리부동이었다. 마치 1분 전까지 사람을 한 명 묻고 온 듯 하다.
《마나를 느꼈네. 어둠과 음의 마나. 익숙한 기척이었어.》
건물로 들어온 그는 희열인지 고양감인지 모를 감정을 푹 하고 토해냈다.
《이 눈으로 범벅된 허허벌판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원수를 찾은 거야. 내 여정의 끝이 지옥이라니. 생각이라면 해 봤다만 이런 형태일 줄이야.》
《그러셨군요. 이제는 살아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꽤 덤덤하군? 설마 알고 있었나?》
《이곳에서 알아낸 정보가 있었거든요. 결과적으론 그럴 것 같았습니다.》
〈임모르탈리스〉는 에퀴녹스의 흑마법 주식시장이다.
그 주식은 지금은 상폐해버렸고, 그나마 남은 놈들마저도 다 뒤져버렸다지 않은가.
《오프툼 씨의 원수가 〈임모르탈리스〉랑 무관한 흑마법사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 남은 마지막 한 놈이 그 쳐죽여도 모자랄 원수 놈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내 지난 날들이 헛다리가 아니었다는 건 다행이지. 헌데 내가 추위랑 씨름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나 보군.》
《대충이라도 설명해 드릴까요?》
《부탁하지. 내가 요 며칠 간 한 건 식량을 축내며 눈밭을 돌아다닌 것 뿐이었으니.》
나는 오프툼을 데려다가 모닥불에 앉혔다. 불의 정령들은 모닥불에서 원기를 충전하려는 듯 돌아다녔고, 그런 판타지 특유의 캠프파이어를 보며 적당한 설명 타임을 가졌다.
《……과연. 에퀴녹스인가.》
오프툼은 긴 얘기를 다 듣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네페르티티에게 말했다.
《잘 됐군. 우리도 곧 있으면 은퇴할 준비를 해야겠어.》
멍한 표정의 네페르티티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리액션이 불쾌하지도 않았는지 오프툼은 씨익 웃었다가, 문득 돌아보는 것처럼 건물 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중에서 가장 흑마법사를 감지하는 일에 탁월한 그의 행동 덕분에, 우리도 그것을 발견했다.
하얀 설원. 발자국도 없는 방향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다.
─팟!!
오프툼은 생각하지도 않은 것처럼 막힘없이 움직였다. 문을 박차고 나가서 오러의 차크람을 거의 집채만큼 키워서는 그림자에게 던진 것이었다.
─서걱!
저번에 봤던 것보다 확실하게 강한 위력! 좁은 지하에서는 쓰지 못했던 큰 기술을 쏘아내자 그림자는 피하지도 못하고 잘려나갔다.
상하체가 분리되면서 떨어진 하체가 녹아내리듯 소멸했다. 하지만 상체는 소멸을 앞둔 것처럼 일렁거리면서도,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뵈어서 영광입니다. 각국의 용사 여러분.》
《……미행은 없었을 텐데.》
《굳이 표현하자면 감시, 라고 하는 게 더 옳겠군요. 저는 여러분이 한 곳에 모이길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언데드의 푸른 등불 같은 눈이 나한테서 잠시 멈췄다. 그 눈빛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몸이 반토막난 탓에 긴 얘기는 나누기 힘들겠군요. 말을 할 수 있는 언데드가 이것 정도였으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또한 필요 없으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인삿말 삼아 소개 드리겠습니다.》
망령 같은 언데드는 좌중을 돌아보며 주인의 말을 되읊듯 전달했다.
《흑마법사 에퀴녹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