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 에퀴녹스=상. 노르드입니다.》
나는 일부러 정중하게 인사를 되돌려주고 창끝을 내밀었다.
《피차 본의는 아닌 재회였군. 요청하지도 않은 자기소개 타임은 이걸로 끝난 셈 치고, 뭐하러 왔지?》
《이런, 그때보다 더욱 강성해지셨군요. 제 선물은 해석해 보셨는지?》
《읽다가 돌아버릴 것 같아서 손도 안 됐다. 도로 가져가.》
나는 노예들한테서 회수한 것 대신, 에퀴녹스가 던져주고 갔던 선물을 망령한테 내던졌다. 책은 바닥을 구르며 눈밭에 파묻혔다.
눈보라는 점점 거세져가, 어느새 망령의 뒤로는 스무 걸음 밖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나빠진 상태였다.
《그건 유감이군요.》
에퀴녹스는 자기가 쓴 책이 바닥을 굴러도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어떤 이유로 왔느냐고 물으셨죠. 제 용건은 간단합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군요.》
《제안? 좋지. 네 본체가 그 주변에서 자기 모가지를 싹둑 자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들어줄 수도 있어.》
오프툼이 으르렁댔다. 그는 당장에라도 불구대천의 원수를 공격하고 싶은 걸 상대가 부하 언데드일 뿐이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상체만 남은 망령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당신의 이야기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티스의 사냥개이신 오프툼 님이시군요.》
《아는 척 굴지 마라. 역겨우니. 네가 나에게 건네도 되는 건 말이 아니라 네 목숨 뿐이다.》
《흐음…… 잃어버린 가족 분들을 되살려 드릴까요?》
오프툼은 찰나지간 숨을 들이켰다가, 더 살기등등한 눈을 하며 뇌까렸다.
《내 가족의 생명으로 모자라, 죽음마저 능욕하고 싶으냐!!!!》
《실례했습니다. 관점에 차이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죠. 여러분께서 바라시는 건 제 목숨인 듯 합니다만, 저로서는 여러분과 싸워서 얻을 것이 딱히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 제안을 들어주십사 합니다.》
망령은 여봐란 듯이 팔을 벌렸다.
《이승과 이어지는 문을 열어드리죠.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최소한 노르드,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명계를 떠도는 영혼을 되살릴 수 있다는 걸.》
─쩌적!
말을 끝마치자마자 망령과 우리 사이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 너머에서 보이는 것에 나는 눈을 반개했다. 문의 건너편은 세헤테피브라의 피라미드였으며 한밤중에도 잠조차 자지 않고 입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아내들이었다.
저편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는 걸까. 그들은 문에 눈길도 주지 않고 사막의 밤의 추위를 모포로 견디는 중이었다.
《이런 제안을 드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8계층의 어딘가에 있을 에퀴녹스는 망령을 문 앞으로 이동시키며 말했다.
《저는 여러분과의 싸움에서 생길 소모를 피하고 싶으며, 여러분께서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지금 저와 싸우시려면 희박한 승산만을 믿고 목숨을 거셔야 하겠죠.》
그런 말이 들려왔을 때였다.
시야가 나빠진 눈보라에 떠오르는 것처럼 새까만 그림자가 끊임없이 일렁거렸다.
크고 작은 괴물들. 등골이 섬칫해지는 위압감은 틀림없이 언데드의 군세였다.
쿠웅, 쿠웅…….
어느 것은 인간만큼이나 작고, 어느 것은 거인보다도 훨씬 컸다.
숫자는 우리 일행과 비교하는 게 민망하다.
데스 나이트로 보이는 강자의 기척만 수십.
그보다 더 강할 듯한 위압감의 언데드마저 있었다.
저 정도라면 거의 일국의 군사력과 비등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미스릴 클래스의 전사가 저만큼이나 된다면 우선 약소국 하나는 일주일이면 폐허만 남을 것이다.
도저히 승산이 있다고 보기 힘든 전력차였다. 방금 전까지 살기를 불태워대던 오프툼마저 냉정을 되찾고 주먹을 으스러트릴 듯 쥐었다.
《저는 세상의 멸망이나 정복 같은 걸 원하지 않습니다.》
소멸하기 직전의 망령이 에퀴녹스의 말을 전했다.
《그렇지만 제 솔직한 꿈을 전해드린들,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저희 사이에 믿음이란 눈송이보다 덧없는 것. 진심을 비웃어질 뿐이라면 여러분들께서도 보다 철저한 전쟁을 준비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 1번 말을 멈춘 에퀴녹스는, 눈보라조차 멈춰버릴 듯한 살기를 흘렸다.
《──나의 1000년의 비원을 무너트릴 기백이 없노라면, 이 세계를 떠나라.》
─후우욱!!
살의를 타고 몰아친 한기는 거짓 니플헤임의 추위보다 더 차가웠다.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냉기에는 모닥불도 공포에 떠는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굳은 얼굴로 아이 컨택트를 했다. 의견은 나눠볼 것 없이 똑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대표로 말했다.
《너를 못 믿는데 그 문은 어떻게 믿냐? 빡통 새끼야.》
《과연. 저보다 자신들의 실력을 믿으시는가 보군요.》
에퀴녹스는 소멸해가는 망령의 입으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교섭 결렬입니다.》
《Vuuuuuuuuuoooooooooooooo──!!!》
에퀴녹스가 만든 문이 사라지고, 언데드의 군대가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엘리자베트는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저거 언데드들 환영 같은 거 아니지?!”
“존나 120% 진짭니다.”
나는 뇌를 거치지 않고 대답하며 부적을 꺼냈다.
어차피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전력 차이는 넌센스였다. 정면에서 덤비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 언데드 바위로 인간 계란을 으깨는 꼴이 날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도출해야 하는 답은 1가지 뿐이었다.
“삼도류 오의!! 360계 줄행랑!!”
ᚦ(Thurisaz)의 부적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외치자 풍경이 확 변했다.
휘오오오오─!!
눈보라가 거칠게 몰아치는 하늘 위!
일행을 통째로 상공 수백미터 위로 전이시킨 것이었다. 말 한 마디 없이 행한 짓이었기에 당황할 만도 하련만, 그들은 제각각 마법이나 무술 따위로 자세를 유지하며 냉정을 찾았다.
《노르드, 뭘 한 건가!! 유실된 고대의 〈공간이동〉 마법이라도 쓴 건가!!》
《시팔 방법이 중요합니까!! 일단 우리 어떡할지 생각이나 해 봐요!!》
나는 성질을 내며 외쳤다.
패기롭게 말하자면, 솔직히 나한테도 에퀴녹스 새끼를 족칠 계획은 있었다.
물론 저 미친 군사력을 봤으니 나도 승산을 대폭 하향조정하긴 해야겠지만, 나 강북호는 노 플랜으로 꼴박하는 타입은 아니다. 방법이 있기는 했다.
있기는 한데…… 애미 터진 에퀴녹스년이 지금 어디 있는지부터 불분명한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태양의 십자!!!”
내가 두뇌 풀가동을 하며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완전 참신한 의견이 나왔다. 티르시였다.
그녀는 옛날에 나랑 하수도를 탐사할 때와 비슷한 절체절명의 위기에─당연히 위험도는 지금이 훨씬 높지만─, 악을 써 가면서 외쳤다.
“이 계층에서도 태양의 십자는 사라지지 않았잖아요!!”
“티르시!! 왤케 개똑똑해요!!”
나는 비명처럼 칭찬하며 태양의 십자를 꺼냈다.
이 아이템에 날씨를 개는 힘이 있다면, 눈보라도 개일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 이 계층에 눈보라가 불지 않았다면 내가 이 아이템을 들고 온 게 트리거가 되었을 것이고!
‘이 높이에서 눈보라가 걷힌다면, 피라미드의 위치가 보일 거다!’
7계층의 키 아이템이 다음 계층에서 쓰이는 것이다. 나는 태양의 십자를 치켜들었다.
쏴아아아─!
그러자 눈보라로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폭풍 속, 한 줄기의 빛이 길을 그리듯 나타났다.
오직 눈보라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길!
─퍼엉!!
내가 환호성을 지르려고 했을 때였다.
기뻐할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뒤쪽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뻗어왔다. 부지불식간에 돌아보자, 눈보라가 걷히지 않은 어둠에서 무지막지한 무언가가 손을 뻗고 있었다.
언젠가 디아볼로를 데려갔던 거대한 손!
그 손 너머에서 날 꼬라보는 고래만한 눈깔! 구멍이 숭숭 난 주제에 하늘을 날아제끼는 박쥐 같은 피막의 날개! 나는 그 즉시 마나를 쥐어짜며 입으로는 일행에게 경보를 외쳤다.
“씨이이이발!! 좀비 드래곤이다아아악!!”
“〈거신의 휘수(Etten's Refusal)〉!!”
뭉게뭉게 순보를 전개하려던 나보다 티르시의 영창이 훨씬 빠르고 적절했다. 거인이 손으로 휩쓴 것처럼 우리는 바람을 타고 90도의 예각을 그리며 지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쿠와아아아앙──!!!
믿겨지지 않는 덩치와 그보다 더 구라 같은 스피드!
언데드 드래곤의 손톱이 우리가 있던 곳을 휘젓고 지나갔다. 덩치가 큰 새끼가 속도마저 빠른데다 눈보라로 가려지자 진짜로 무슨 코즈믹 호러의 한 장면 같았다.
“──있다!! 피라미드!!”
“티르시는 속도를 유지해!! 섬세한 방향은 내가 잡을게!!”
길다트가 외치자 엘리자베트가 정령을 불렀다. 바람의 정령떼가 우리의 방향을 비틀었고, 나는 눈보라를 뚫고 대가리를 쑥 내미는 거대한 시체 용의 얼굴에 집중하느라 뒤를 보지도 못했다.
내 팔을 붙든 네페르티티가 채찍을 뽑으며 속삭였다.
“노르드! 견제!”
“옛슴다! 씹창!”
나는 눈을 부릅떴다. 쫄면 안 된다. 덩치로는 예전에 본 그 거대 골렘보다 조금 큰 정도일 뿐! 혹시 아는가? 이 세상에서 드래곤은 마법도 못 쓰는 동네북 수준의 플라잉 도마뱀일지!
우리는 각자의 외침을 기합 삼아서 눈깔을 노렸다.
─카앙!!
하지만 드래곤은 이 세상에서도 드래곤인지, 급소인 눈알을 쳤는데도 방어마법이 마법진을 띄우면서 우리들의 공격을 막아버렸다. 무려 오러가 감긴 마법을 쳐낸 것이다!
나는 기겁하면서 내 품의 부적을 쥐었다.
“공주님!! 드래곤은 존나 토벌 난이도가 어떻게 되요!!!!”
“최소 기준으로 마스터 이상!!!!”
니미 시발, 묻지 말 걸 그랬다!
아니, 막 양판소마냥 그랜드 마스터도 뚝배기가 터지는 좆 터진 밸런스가 아니라서 다행인가? 막 에이션트 드래곤 로드 같은 게 나왔으면 불평할 틈도 없었을 것이었다!
─펄럭!
우리를 놓친 언데드 드래곤은 한 박자 늦게 홰를 쳤다.
둔한 듯한 반응속도에 비해서 비행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쩍 벌린 입에서 날카롭게 갈린 이빨이 번뜩였다.
“존나 왤케 빨러 미친놈이!!”
나는 운석처럼 접근하는 드래곤을 보고 기겁하며 룬 부적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피라미드 앞까지 순간이동합니다!! 문 좀 부숴줘요!!”
그렇게 말한 나는 다시 세헤테피브라가 창조한 세상에 개입했다.
“나의 능력을 조심해라, 그린 랜턴 빛──!!!”
번쩍─!! 내 마나의 색인 녹색이 하늘에서 폭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