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48화 (647/1,009)

─붕! 붕!

아침에 흘리는 땀은 해-피한 하루의 시작이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근육을 힘껏 쥐어짜면, 별 일도 없는데도 오늘도 존나 근사한 하루가 될 듯한 예감마저 드는 것이다. 마초에게 어울리는 하루의 시작이다.

단점은 일어나서 씻지 않은 몸으로 훈련하면 좀 찝찝한 기분이 든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훈련 전후로 씻는 것도 좀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후우우우…….”

근육에 힘을 밀어넣으며 초식의 뜻을 복기하듯 천천히 반복동작을 실행했다.

뇌에 잡념은 필요없다. 무아무중의 상태에서 내 몸의 근섬유 한 올마다 집중력을 바르는 것이다. 내 정신에 복종하는 마나라는 에너지가 그 집중을 가시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장비는 루팅한 바위를 마법으로 변신시킨 돌 창.

각 초식을 반복하며 느릿하게 2번 반복.

─파파파파팡!!!!

그리고 그 원만함을 되갚듯 내 근육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속도로 초식을 펼쳐냈다. 창이 후려갈긴 공기가 터져나오며 허공을 흔들었다.

공중에 펼쳐낸 초식들은 전부 아슈카트에게 마무리를 지었을 때의 공격에도 필적하는 위력이었다. 그만큼 힘을 쥐어짜지 않으면 훈련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푸우우우…….”

한 세트를 마무리하며 다시 심호흡.

힘이 강해질수록 쇠질은 하기 어렵다.

3도류를 쓰는 해적처럼 1톤 짜리 바벨을 붕붕 휘두르는 건 현실적으로 좀 쌉에바고, 내 근섬유가 찢어질 만한 무게는 찾기도 힘들다.

그러니까 혹사하는 건 몸이 아니라 마나다.

마나로 강화된 몸놀림에 따라가면 며칠을 꼴딱 새도 괜찮은 내 체력에도 데미지가 온다. 욕조에 찬 물을 바닥내려면 밥숟갈 말고 바구니를 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파파파파팡!!!!

2번의 반복숙달. 1번의 전력 공격.

그렇게 3번의 반복동작이 한 세트다.

가진 힘과 정신력을 다 바위 창에 몰아넣으며, 개인적으로 구상한 단련법을 10세트 째 반복한 내 몸은 어느덧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 투성이였다.

“응?”

그러던 나는 어떤 시선을 느끼고 훈련을 멈췄다.

그러자 2층 방의 창문에서 내가 있는 앞마당을 내려다보는 졸린 눈의 여인과, 그 품에 안긴 창의 정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때문에 깨셨어요?”

처음부터 보지는 않았을 테고, 내 창질 소리에 깬 걸까?

…도리도리. 네페르티티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기만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침에 저혈압인 모양이었다.

“……………….”

하지만 그런 어머니(처녀)랑은 상반되게도 창의 정령은 세상 뚱한 눈으로 날 노려봤다.

‘씌불. 하룻밤 자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악화된 것 아닌가? 어제까지는 내 눈을 피하거나 ‘흥 나 삐졌어’ 모드였던 게, 오늘은 뭐 손을 내밀면 깨물기라도 할 것 같군 그래.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창을 거뒀다. 아침부터 손님이 많은걸.

『좋은 아침입니다. 아, 혹시 제가 아직 훈련이 덜 끝났는데 찾아왔습니까?』

방문자는 올라프였다. 본명이 뭐였는지 까먹고 말아서 조만간 아내들한테 몰래 물어보더가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땀을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 끝나가던 참입니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달인의 기술의 정수가 깃든 훈련을 훔쳐보는 건 예의가 아니니 말입니다. 소리를 듣고서 근처 풍경을 살짝 구경하다가 왔습니다.』

『아하.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본국에서 연락이라도 왔나요?』

벌써 사태가 끝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질문하자, 아니나가 다를까였다. 올라프는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는 것처럼 두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일주일 안에 정리가 될 듯 하다는 소식이었죠.』

『일주일? 상당히 빠르군요.』

『실리 코트에 오는 데 쓴 시간도 있으니까요.』

그렇군.

창의 정령을 생각하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장 이 올라프도 창문에서 엿보이는 창의 정령을 발견하곤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고.

『그러고 보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었죠.』

나는 올라프가 이상한 짐작을 하기 전에 화제를 바꿨다.

『……점혈을 알려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솔직히 점혈이 있는 세계관에서 자기만 점혈 못 쓰는 주인공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라. 인간적으로 이건 못 먹어도 고다 이거에요.

‘자격증은 많아서 나쁠 것 없잖아?’

너무 놀기만 하는 것도 영 아쉽고.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JLPT, 즉 점혈검정능력시험 1급을 따 두면 좋지 않을까? 부작용이 나지 없는 범위에서 알차게 써먹으면 괜찮을 듯 한데.

『혹시 외지인에게 전수하기는 어렵습니까?』

『아뇨. 노르드 님께 알려드리는 거라면 타타르니아의 무술 연구자들도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말로 설명드리기엔 복잡하므로, 글로 써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글로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손이 많이 갈 듯 한데……』

『염려 마시길. 제가 이래봬도 작문에는 약간의 소양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다는데 내가 억지를 쓸 건 없겠지. 나는 떠나가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며칠 남은 말미 동안에 배울 능력이 하나 늘었군.

그렇게 올라프를 떠나보내자 이번에는 2층에서 네페르티티와 창의 정령이 내려왔다. 정확하게는 혼자 내려간 정령을 그녀가 따라온 모양새였다.

도도도도도─!

창의 정령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뭐지? 눈매가 단호박인 걸 보면 호의는 아닐 것 같은데.

“……왜?”

“그거.”

“이거?”

정령이 그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

그건 다름 아닌 돌 창이었다. 정령은 손바닥을 쫙 펼치고 ‘주세요’ 하는 자세로 날 보았고, 나는 고개를 모로 꼬면서도 그 창을 건네줬다.

무거울 텐데 괜찮나, 하는 의문은 가지지 않아도 됐다.

“흥!”

빠지직… 콰득!

창의 정령은 10kg도 더 나갈 돌 창을 가뿐하게 들다 못해, 아예 그 창을 수수깡처럼 반으로 갈라 죽여버리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파스스.

비산하는 돌 파편!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머임?”

솔직히 부서지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이야 없긴 한데, 왜 멀쩡한 창을 부순다는 말인가?

창의 정령은 입이 벌어진 나를 손가락으로 딱! 가리켰다.

“바람둥이!”

“테에에에엥……!!!”

전조도 없이 들어온 불의의 일격…!!

치명타였다. 나는 명치를 처맞은 것처럼 쓰라린 가슴을 붙잡고 말았다.

그래, 맞다. 아내들은 처음부터 다 이해한 뒤에 나를 사랑해주긴 했지만, 나 강북호는 변론의 여지조차 없는 트루-바람둥이였다.

혹시 폭풍의 신의 후계자란 게 그런 뜻이었나.

폭풍의 신이란 건 즉, 바람의 신.

그러므로 나는 바람의 신의 후계자로서 마땅한 의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이어인의 유전자를 많이 퍼뜨려 이세계에서 ‘홍익인간’ 하는 게 Z-용사인 내 의무가 아닐까? 오히려 여자란 여자는 다 덮치고 다니지 않는 난 젠틀한 편 아닐까?

제국주의의 심볼인 영국도 신사의 나라인데 나 정도면 신사 맞다. 이건 영국 왕실도 인정해야 할 부분이지. 나그 생각이 맛는 거 같은디???

근데 시발, 불륜의 천공신이면 빼박 제우스네.

“바람둥이, 바람둥이, 바람둥이──!!”

창의 정령은 울먹거리며 또 한 번 쏘아붙이고는 메다닥 도망갔다.

뭔데 울먹거려? 울고 싶은 건 나야. 늦가을 헤라클레스 장수풍뎅이 같은 년.

“아…!”

정령을 따라나온 네페르티티는 방으로 가버리는 꼬맹이를 망연하게 떠나보냈다. 힘없이 뻗은 손이 처량하다. 대체 왜 내 양심이 찔리는 것이지.

“……잘 잤어?”

시무룩해진 네페르티티는 정령이 어디 멀리 간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힘 없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나는 뺨을 긁적거렸다.

“저야 잘 잤죠. 네페르티티는요?”

“나도.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꿨어.”

포근한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는 네페르티티.

그런 그녀의 눈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을 고이 간직하려는 사람처럼 둥글게 휘었다. 티가 잘 안 날 만큼 미미한 변화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날 보았다.

“……질문 하나 해도 돼?”

“네. 앞으로는 따로 허락받지 말고 편하게 물어보세요. 뭔가요?”

“저 애, 이름은 뭐라고 불러야 해?”

“……음.”

그건 저번에도 말했듯 나도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내 그 떨떠름한 리액션이 대답 대신이 된 걸까.

네페르티티는 조곤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무기일 때 부르던 이름은……?”

“따로 이름을 지어주진 않았습니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네페르티티. 마치 참으로 못난 애비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아니! 그니까 왜 내가 등골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하냐고!

“……나도 무기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지만, 저 애한테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제 잘못이 맞습니다.”

“……아. 따로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허둥대는 네페르티티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신경 안 쓴다는 것처럼 픽 웃어주고서, 내심 인상을 썼다.

이름이란 중요한 것이었다. ‘나’와 ‘남’을 분간하라면 필수불가결한 것이니까.

하물며 예르나도 나한테 이름 정도는 지어주지 않았는가.

‘……이런 쓰벌?’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그 예르나 년조차─속내야 어쨌건─ 노예한테도 적당한 이름을 줬는데, 나는 내 무기에게 멀쩡한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았었다니!

‘내가 예르나 년보다 못하다고?’

절대 그럴 순 없지.

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 찝찝함. 뭐라 말하기 힘든 불쾌함이었다. 마치 처음 치실을 쓴 사람이 이빨 사이에 낀 이물질을 신경쓰게 된 듯한, 그런 불편한 기분이다.

“……좌시할 수 없는 문제군요. 바로 해결하러 갑시다.”

“어?”

멍하니 대꾸하는 말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난 네페르티티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파트 1채 만한 바위도 채찍으로 붙들어 묶는 완력의 팔은 갈대가 된 것처럼 맥없이 끌려왔다.

─똑똑똑. 창의 정령이 있을 방문을 노크하는 나.

“들어간다.”

대답이 없다. 2번 더 물어봤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기에 그냥 열었다.

─힐끔. 침대 난간 뒤에 숨어서 나를 훔쳐보는 정령이 보였다. 진짜 행동 하나하나가 애 같은 게, 우리 아내님들이나 네페르티티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네 이름, 지어줄까?”

“……이름?”

“그래. 같이 생각하자.”

말 뜻을 되새김질하던 창의 정령의 얼굴이 확연하게 밝아졌다.

“정말? 정말로?!”

설마 진짜 이게 정답이었나?

나는 정령의 기분이 눈 녹듯 풀리는 걸 느끼며 재차 긍정했다.

“그래, 그래. 정말로.”

“……와아아!! 아빠, 최고!!”

도도도도─! 정령은 버팔로처럼 달려와서는 내 머리에 매미 매달리듯 안겨버렸다.

그래 시발, 아빠 하지 뭐. 내가 니 애비란다.

이제 입양아라는 사실만 밝히면 되겠구만. 나는 젖살이 남은 허리를 받치며 정령을 안았다. 창의 정령이 헤벌쭉 웃으며 내 턱에 뺨을 비볐다.

“에헤♡ 아빠 턱 까칠까칠해!”

“아침이라 면도를 안 했거든.”

“면도? 그러면, 그러면! 내가 해 줄게!”

“살려듀세요.”

이 녀석 이거, 날 암살하려 드는 걸 보면 아직 화가 덜 풀렸군. 내가 쓴웃음을 짓자 마냥 좋다고 웃던 정령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빠~. 엄마는 왜 저래~?”

“니 엄마?”

불현듯 내가 잡고 있던 손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걸 눈치채는 나였다.

정령을 안은 채로 180도 턴.

“……후으으으으….”

네페르티티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어버린 걸 빼면, 뭐 무표정하다고 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얼굴, 안 뜨거워요?”

“뜨거워…… 어지러…….”

입술을 달싹거리는 네페르티티. 꼭 쿨러가 고장난 안드로이드 같다.

─꼼지락.

샌들을 신은 그녀의 맨발은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연신 꼬물거렸다.

이 아가씨는 뭔데 갑자기 귀엽고 난리지.

“엄마, 엄마.”

그게 어린애의 눈으로 봐도 안쓰러웠는지 창의 정령은 손을 방방 흔들어댔다.

내가 무슨 뜻인가 싶어서 쳐다보는데, 네페르티티는 그 사인을 알아들은 듯 팔을 벌렸다. 아항. 지 안아달라는 뜻이었군. 나는 정령을 그녀에게 맡기려고 했다.

“앗! 아니야!!”

“켁.”

깜짝 놀란 정령이 내 목을 조이듯 안겼다. 아니 말도 할 수 있으면서 왜 뇌를 거치지 않고 행동에 들어가는 것이지? 애들의 사고회로는 이해할 수가 없네.

“따님아. 니가 그러고 계시면 네페…… 엄마가 널 어떻게 안겠냐.”

“일케! 일케 일케 하면 되잖아!”

타잔처럼 내 목을 감고 손을 흔드는 딸내미.

흐으음. 이 집 딸내미는 자기만 알아먹는 표현을 애용하는 전형적인 타입이군.

지시사항의 절반 이상을 ‘시발’이랑 ‘거시기’랑 ‘알겠지?’로 끝내는 회사 상사나 일용공장 매니저들은 사실 누구보다 동심을 간직한 사람들이 아닐까.

─얘가 대체 뭐라는 겁니까?

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했고, 네페르티티는 그 어깨를 살짝 떨었다.

“……움직이지 마.”

“넹?”

“가만히 있어. 절대로야.”

들릴락 말락 중얼거린 그녀가 내게 안겨들었다.

아니지. 내가 안은 정령을 그녀 역시 안은 걸로 볼 수 있을까. 만족스럽다는 듯 헬렐레 웃는 꼬마 아가씨의 미소를 보면 ‘일케 일케’라는 말은 이런 뜻이었나 보다.

그리고 당연히, 나랑 그녀는 딸내미 하날 두고 안겨붙은 모양이 되었다.

정령에게도 심장은 있는 것일까.

철학적으로까지 들리는 의문의 어린애답게 높은 체온을 타고 전해지는 작은 박동 소리로 해소됐다. 기억에 없는 딸내미는 행복한 듯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콩닥, 콩닥….

“……………….”

나와 그녀는 아이를 함께 안아든 부부처럼 숨이 섞이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입술이 찬찬히 열렸다.

“……나, 조금 이상하지.”

머뭇거리는 눈동자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그래?”

나를 껴안은 네페르티티의 손이 깍지를 꼈다.

폭…. 그녀는 내 어깨에 어깨를 묻었다.

“그렇다면, 기쁘네.”

나는 자유로운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것 봐. 역시 좋은 하루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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