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59화 (658/1,009)

***

“다시 봐도 멋진 범선이네요.”

영주 대리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 째 되는 날.

항구 근처에 고대문명의 선박을 구경하러 왔던 나는 가식없는 탄성을 터트렸다. 며칠 전에도 본 배였지만 새삼 커다랗고 근사했기 때문이다.

‘어디 해외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선박이야.’

비바람을 막기 위해서 엄청 크게 깔린 건물 안.

바닷물도 들어오지 않는 육지에 고대의 선박은 있었다. 배를 들여놓고 건물을 댐처럼 삼아 물을 빼냈는가 본데, 덕분에 진짜 박물관처럼 보인다.

그 뭐더라, 게르마니아의 꼴페미─좋은 뜻으로 쓰는 표현이다─ 우르실라의 골든 뭐시기 호였나 하는 배도 멋졌지만, 저 흑갈색 범선은 그것 이상이었다.

‘저택보다 배가 더 큰 거 아냐?’

혹시 부숴지기 전에는 원시 고대 항공모함 정도 되는 물건이었을까?

밀덕후들의 기분이 아주 쪼오금 이해가 가는군.

존나 간지나는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남자는 크고 멋진 탑승물에 눈물을 쫙쫙 뽑으면서 박수를 치게 되는 생물 아닌가.

‘대리랭 뛰러 온 영지인데, 이래저래 마음에 쏙 드는 것들만 있네.’

나는 흐뭇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계륵이란 내가 먹긴 그런데, 남 주기도 아까운 부위를 말한다.

하지만 나 강북호는 21세기의 코리안이자 치즈 닭갈비의 민족 아닌가. 삼국지의 계륵이 닭갈비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이 배는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럴 수밖에요. 이 ‘암무나’ 호는 고대문명 황금시대의 범선이니까요.”

늙은 집사 웨스턴이 살짝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기분 알지. 대전 사람인 대학 동기가 학기가 시작할 때 쯤 성심당 빵을 사 왔을 때, 그걸 먹고 감탄하던 친구들을 보며 지었던 자부심이다.

나는 기왕 신세지게 된 거, 호감이나 쌓아둘까 하는 마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저라도 어릴 적부터 이 배를 보면서 자랐다면 태어난 가문을 자랑스럽게 여겼겠죠. 분명 전대 영주님께서도 그러셨을 듯 합니다.”

“예에. 하지만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이 암무나 호는 영주님 가문의 선조께서 제작한 함선이 아닌 줄로 압니다.”

“선조의 물건이 아니라구요?”

그럼 뭔데? 렌트카였나? 내가 눈을 껌뻑거리자 웨스턴이 말했다.

“저는 3대가 바뀌도록 영주님을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께서 말씀하시길, 암무나 호는 큰 은혜를 입고 빌려온 것이니 가문보다 배의 계승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하셨죠.”

쓰벌, 진짜 렌트카였네.

아니지, 말투를 들어보면 대출을 담보내서 빌린 스포츠카인가.

휴스로이트 영주의 선조님은 카푸어셨나 보다.

“빌려왔다니, 왕가에서 말입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확실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그.

그보다 영주가 3번 바뀌는 걸 계속 섬겨왔다니, 이 할아버지는 대체 몇 살이래. 나는 괜찮다면서 웨스턴을 만류하다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왕가가 줬다기엔 좀 이상하지 않나?’

외적을 대비하라는 가훈의 뜻은 알겠다.

사방이 바다인 섬 나라 아닌가. 바다는 익숙한 무대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바이킹 같은 적들이 ‘우효~ 허벌 항구 실화냐고~’ 하고 쳐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존나 쩌는 범선, 그것도 대출해서 얻은 배는 빡세게 A/S를 해야겠지.

하지만 브리타니아는 비교적 신흥국가다.

고대문명 시기에 브리타니아 왕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배가 왕가의 소유였으면 엘리자베트도 미리 알려줬을 것 같은데.

‘시발, 몰라레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냥 의문으로 남겨두고 넘어갔다.

영지의 역사서 같은 걸 뒤져보지 않는 한 모를 일이었고, 지금 할 일은 역사 조사가 아니잖은가. 대충 노트에다가 몇 줄 적어두고 손짓을 했다.

〈조선공 여러분. 작업에 들어가 주십쇼.〉

〈옙!〉

우르르─! 인맥 빨로 부른 로마니아의 인재들이 몰려왔다.

어르신의 연줄로 빌린 조선공들이다. 요금? 거 고대문명의 선박을 조사할 수 있는데 디스카운트 좀 받았지. 그리고 내가 부하가 없지, 돈이 없나.

나는 웨스턴에게 작게 말했다.

“저 분들이 뺑이치지 않게 감시 좀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영지의 문화재가 복구되는 걸 보면서 웨스턴은 감격에 젖은 듯 대답했다.

‘태도를 보니 내가 따로 부탁할 것도 없었겠네.’

나도 나대로 좀 돌아보며 배를 살펴볼까.

─까딱까딱.

손짓으로 메이드복을 입은 발퀴리에들 2마리를 대동했다.

아직 룬 어가 아닌 언어는 한창 인스톨 도중인 발퀴리에들. 당연히 웨스턴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손짓발짓으로 메이드 교육을 이수받는 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메이드들은 습득한 지식을 공유해서, 그림자 분신 수련법처럼 배우는 속도가 보통 사람들의 4~6배더라.

학생처럼 브리타니아 어를 배우는 게 셋.

메이드로서 청소법 등을 배우는 게 둘.

이렇게 다섯이서 빠르게 습득해가는 중이었다.

시부랄, 나도 분신들이 대신 공부하고 일해주면 좋겠네. 일은 전부 분신들 시키고 나는 아내님들이랑 놀고 먹기만 하는 미래. 존나 끝내준다.

그렇게 꿈 같은 상상을 하면서 선박을 살폈다.

〈배에 무장은 따로 없군요.〉

〈설치돼 있던 흔적은 있습니다. 떼어내서 판 게 아닐까요?〉

조선공 대표의 대답이었다. 아마 그런 모양이다.

졸라 아깝네. 마법을 쏘는 이세계 대포, 그것도 고대문명의 대포라면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을 텐데 말이다.

‘됐어. 까짓 거 필요하면 사서 채워넣던가 하지 뭐.’

바닥의 흔적을 발로 문지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관리비를 채우려면 어쩔 수 없었겠죠. 중요한 엔진은 남아있으니 됐습니다.〉

〈역시 호탕하십니다. 아, 그런데 영주님?〉

〈영주 대린데요.〉

내 직장을 이 시골 항구에 묶으려 들지 말라고.

영주 후보 겸 사업가에서 브리티나아 항구지부 관리인으로 강등된 기분이잖아.

〈앗,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뭔가요?〉

〈그, 듣던 것보다는 선박 상태가 괜찮습니다? 관리가 잘 된 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파손되거나 손실된 부분은 어떻게 매꿔져 있고요.〉

〈목재는 며칠 전에 수선을 맡겼거든요.〉

응~ 마나 존나 써서 칭카라 호이 하고 갔어~.

덕분에 나랑 옥새에 저장한 마나가 오링났다.

‘특히 배 아래쪽에 난 구멍이 쌉에바였지.’

무슨 타이타닉도 아니고 암초에 들이박았는지, 전에 살던 사르가디스의 집이 통째로 쑥 박혀버릴 듯한 구멍이었다. 복구하다 좆 빠지는 줄 알았다.

내가 대충 요정왕의 완드를 숨겨서 설명해주자, 그는 이마를 탁 쳤다.

〈아아, 어쩐지! 그러셨군요! 그럼 저희는 용골 부분이랑 금속만 고치겠습니다.〉

〈어떻게, 수리는 가능하겠습니까?〉

‘이 배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어……’라면서 고잉 메리호 당하면 어쩌지.

그러자 조선공 대표는 히죽 웃고서 뒤에다 대고 외쳤다.

〈얘들아, 들었냐!!! 우리 영주 대리님께서 니놈새끼들 실력이 영 미덥잖으시댄다!!!〉

아니 시발, 말이 왜 또 그렇게 돼?

자재를 옮기던 마초 조선공들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워매. 사람 1명 쯤은 걍 씹어잡수시겠네. 바닷사람들답게 눈깔 살벌한 것 좀 봐.

〈대답해 봐라!!! 고칠 자신 없냐!!!〉

〈그런 사실 없습니다!!!〉

〈새끼들 목소리 좆만한 것 봐라!!! 안 들린다, 개자식들아!!!〉

〈그런 사실 없습니다아아아악!!!!!!〉

〈그럼 빨리빨리들 움직여!!!!!〉

〈악!!!!!〉

내가 부른 게 조선공이 아니라 해병대 캠프였나.

부하들을 독려…… 어, 아무튼 복돋아준 조선공 대표가 날 보며 웃었다.

〈최대한 빨리 고쳐놓겠습니다. 마법까지 쓰면 세상에 못 고칠 배는 없죠.〉

〈옙. 파이팅 하십쇼.〉

악을 써가며 땀내나게 일하는 마초들이라. 보기 좋군 그래.

‘근데 옆에 있긴 싫은레후.’

아포크린 땀샘이 마구 오버웰밍 중이잖아. 에비, 드러운 거.

〈선박의 엔진은 남아 있습니다만, 그건 되도록 손 대지 않겠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고대문명의 귀중한 유물을 고장내면 안 되잖습니까?〉

〈예. 수복 이후에 기능실험만 합시다.〉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데, 이세계의 선박들은 엔진이 제일 중요하다.

‘운행부터 공격을 막는 실드까지 전부 엔진부가 책임지니까.’

게다가 이 배는 특히 더 그랬다.

내가 휴스로이트에 온 결정적인 이유도 선박의 엔진부에 있으니 말이다.

〈자동항해 기능은 괜찮겠습니까?〉

며칠 전에 살짝 둘러봐도 엔진에서 플라잉 더치호의 망령 같은 게 나오지는 않더라. 쬐까 아쉽네.

운용법은 전해지고 있어서 사용법이야 어떻게든 알 수 있었는데, 마나를 넣어도 전원이랄 게 켜지지 않는 느낌적인 느낌.

촥─! 조선공 대표가 단면도의 사본을 펼쳤다.

설계방법은 아니고, 그냥 지도 같은 것이다.

〈선박만 제대로 수복하면 됩니다. 내부구조만 보면 알죠. 엔진의 원리는 몰라도 거기로 흘러들어가는 연료만 제대로 통하면 기동할 테죠.〉

그럼 됐네.

로스트 테크놀로지인 엔진을 빼면 다른 구조는 현대 기술로 커버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출력은 좀 낮아질지도 모르지만 눈 감아줄 문제였다.

나는 그들과 작별해서 부두를 나왔다.

“끼룩꾹! (여기야!)”

갈매기 1마리가 근처 간판에 앉아서 끼룩댔다. 힐끗 보고 쫓아가자 골목길에서 후드와 가면을 쓴 여인이 자기 모습을 보였다.

“수상한 사람을 찾으라니까 자기가 제일 수상한 꼴을 하고 있네.”

“일할 때 쓰라고 가면을 준 건 사장님이면서.”

룬 마법 가면을 벗자 나타난 건 캐서린이었다.

ᚲ(Kenaz)의 룬을 새긴 매직 아이템인데, 잘 쓰고 있는 모양이다. 근데 얘도 언니 따라서 날 사장님이라고 부르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남의 집 천장을 달리던 시절에도 이런 게 있었으면 편했겠어요.”

“나는 가끔 보면 너희가 바로 손버릇을 고친 게 은근 신기해.”

“이 일도 옛날만큼 스릴이 있어서 생각보다 제 취향에 맞거든요. 돈도 받고 있고, 소문과 지식을 훔치는 일이고. 저희 언니도 지금 생활에 만족한 모양이고요.”

그녀는 나를 안내한 기러기에게 북어포 같은 걸 먹여주며 말했다.

돈과 스릴을 찾아서 괴도 짓을 하던 자매인데, 캐서린은 스릴 있는 조사를 더 선호했다. 반대로 오드리는 제 손으로 뭘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에 성공한 셈일까?

내 선행 리스트에 한 줄 더 업적이 추가되었군. 탐관오리를 노리던 괴도를 어엿한 사회인으로 갱생시키다니. 이력서 끝에 적어둬도 되겠지.

“조선공들은 계속 주시하고 있을게요.”

“일하는 데 어려움은 있냐?”

“딱히 없는데요? 사장님이 새로 고용한 새들도 있고.”

“알겠어, 맡긴다. 너희 언니도 나중에 여기 올지 모르니까.”

아마 오지 않을 확률도 높지만 말이다.

듀나미스 공방은 날 따라올 예정이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사르가디스랑 가까운 곳에 왔으니 ‘굳이 이사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게 지금의 본심이었다.

솔직히 여긴 인프라도 아직 덜 개발됐고, 그냥 일 있을 때마다 내가 찾아가는 게 나았다. 사르가디스에도 동물 드론 감시망은 남아 있고.

“네, 네~. 그치만 담벼락도 없는 영지라서 치안 유지는 좀 어려울 듯 한데요?”

“그래, 영지 개발 일정에 참고할게.”

나는 심시티 놀이에 관심이 없으니까, 전문가들한테 토스하고 결재만 하겠지만 말이다. 하긴 해야 할 일이어도 아직은 까마득하군.

그리고 얼마 후.

배를 다 고친 조선공들은 가끔 술집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 외에는 사고 치는 일 없이 집으로 돌아갔고, 우린 완벽하게 복구된 선박을 볼 수 있었다.

“오오오!! 이젠 돌아가신 영주님께서도 여한이 없으실 겁니다!!”

“그러게요.”

혹시라도 여한이 남았으면 나오십시오. 천공신 명의로 성불시켜줄 수 있다.

빤쓰를 찢으며 울부짖을 기세로 감격하는 늙은 집사의 오열을 들으며, 나는 해안에 정박한 원시 고대 인공지능 함선을 쳐다보았다.

개인 명의로 요트도 아니고 크루즈 선을 갖다니.

나는 왜 이렇게 졸부 같은 업적만 쌓이나 몰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