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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각….
아가미에 화상을 입은 어인이 바닥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짓무른 혈액이 원시적인 문양을 그렸다. 문양의 곳곳에서는 스스로의 가슴에 비린내 나는 칼날을 꼽고 죽은 어인들이 문양의 도료를 채웠다.
사각….
생선 대가리를 강판에 가는 것처럼 붓으로 쓰던 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툭 튀어나온 눈에 혀를 빼물고서 절명한, 그와 닮은 작은 어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어린 어인의 물갈퀴에 잡힌 칼날도.
【Uuuuu…….】
생물 본연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까득, 까득!
슬픔이 분노로 바뀌어갈 무렵, 강인한 손아귀의 힘에 문양을 완성시켰다. 지독할 정도의 비린내가 혈액에 예민한 이족(異族)의 비강을 아찔하게 후벼댔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문양 바깥에서 무서운 것을 둘러싼 것처럼 떨던 그의 동족이 머리를 조아렸다. 화상을 입은 어인이 가슴에 손을 쑤셔박았다.
이곳에는 일족을 포근하게 감싸줄 바다가 없다.
비늘이 돋아난 팔다리는 쩍쩍 마르며 해저와는 다른 농도의 공기가 아가미를 따끔하게 파고든다. 그들이 ‘세상’이라는 단어로 지칭하던 바다 밑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밤하늘이 있었다. 별이 있었다. 별의 존재조차 잊혀진 어둠 속과는 다르게 그들을 인도해 줄 성좌가 있었다.
단지, 이 선택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굶주리지 않은 상태를 지칭하는 표현이 잊혀진 그들도 이토록 배를 곪은 적은 없었다.
다른 종족보다 잠이 많은 그들이다. 굶주린 배를 붙잡고 잠에 들려 할 때마다 폭발하는 소음이며 빛, 그리고 뜨거운 무언가는 극도의 스트레스였다.
아틀란티스의 모래시계는 뒤집혔다. 이젠 죽을 때까지 남은 시간을 계측할 뿐이다.
적은 도망쳤고, 이젠 승기를 잡을 때까지는 이 땅에 돌아올 리 없다.
긴 시간, 때를 기다리던 그들은 기어이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우연이라는 이름의 운명과 외적에게 절멸당할지, 하다못해 잠에서 덜 깬 미숙아답게 목숨을 걸고서 알 껍질을 깨부술지의 갈림길에 말이다.
“……Tha Uearthy.”
아가미의 화상을 매만지던 어인은 어느 인간의 얼굴을 떠올렸다.
발을 디딜 갈림길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가슴을 열어젖히듯 찢으며 울부짖었다.
【Uuuuu──!】
【Uuuuu──!】
【Uuuuu──!】
합창이 기도처럼 하늘 위로 뻗어나갔다. 어인들만이 들을 수 있는 음역의 초음파는 섬뜩하게 울려퍼지고, 바다 생물들을 떨며 도망치게 만들었다.
자신의 힘으로 타파하지 못할 난관을 마주했을 때, 생명은 의지할 존재를 찾는다.
그들을 굽어살필 신을──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뤄서라도.
─쩌억.
별의 바다가 쿡쿡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
“……에취!”
셰이드의 꿈에 들어온 나는 코털을 간지럽혀진 것처럼 재채기를 했다. ─훌쩍. 코를 훔치는 나를 티르시가 신통방통한 표정을 구경했다.
“꿈속인데 재채기도 하고, 콧물도 나오나요?”
“흐흐. 그럴 수도 있죠. 어린애들은 오줌을 싸는 꿈도 꾸는데.”
“현실에서 재채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물론 나처럼 착한 대학원생이 어디서 욕을 먹을 린 없고, 단순한 생리현상인 게 확실하다. 나는 콧잔등을 훔치고 가이드처럼 깃발을 흔들었다.
“자~! 제 꿈에 못 들어온 사람 손!”
대답은 없었다. 나는 흡족스럽게 팔짱을 꼈다.
“다 왔군. 그럼 출발합시다.”
“너는 세미나 가면 나 가는대로만 따라와라.”
어이없어 하는 다나에게 윙크를 해 주고 휘파람 한 번. 현실에서는 할 줄 모르지만 꿈속에서라면 이깟 좆간식 초음파 발생법은 누워서 떡 먹기다.
─푸드덕!
하늘의 점처럼 보이던 까마귀가 원근감이 이상해질 속도로 급강하했다. 애초에 꿈에서 거리가 얼마나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만.
“삐엑─!”
귀엽긴 해도 까마귀답지 않게 운 브류나크는 난 거들떠도 안 보고 바로 네페르티티에게 날아갔다. 거의 매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 같은 동감이었다.
“삐엑! 뺘! 뺘뺘!”
“……응, 브류나크. 안녕.”
네페르티티는 재롱을 부리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라리루라가 그런 그녀들의 1미터 바깥을 어슬렁거리며 눈을 빛냈다.
“이 애가 말로만 들었던 선배의 분신이군요?”
“분신 아냐. 딸”
“선배의 분신이군요!”
그 점만은 절대 양보 못 하겠다는 듯 쌉무시한 라리루라가 나더러 외쳤다.
“선배, 선배~. 저 애 지금 뭐라는 거에요~?”
“몰? 루?”
창이랑 어떻게 대화를 하니. 동물이면 모를까 이 녀석의 본질은 창이다. 나와 어보미네이션식 퓨전 합체를 했다고는 해도 난 식물이랑 대화 못 해.
─짝! 내가 박수를 쳤다.
내 의붓 창딸에게 정신이 팔린 아내들의 이목이 다시 나한테 모였다.
“다들 모여. 브류나크랑 놀아줄 시간은 나중에 또 있을 테니 지금은 움직이자.”
손바닥을 뻗으며 의식을 집중했다.
요령은 창세의 권능과 같다. 이 드림월드는 내 의식이 창조한 것! 그렇다면 이 세상을 입맛대로 바꾸는 것도 얼마든지 내 자의였다.
“나의 마음을 Unlock!”
─파칭! 손바닥에 황금 열쇠가 맺혔다.
대충 휘두르자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네페르티티랑 처음으로 셰이드의 꿈속에 들어왔던 날에도 봤던, 신좌로 통하는 문이었다.
프랑은 브류나크를 힐끔대는 자신을 말리려는 듯 자기 뺨을 두들기고 말했다.
“그냥 열면 돼?”
“해 본 적은 없는데, 자격이 없으면 안 된대.”
출처가 출처라 신뢰성은 인터넷 찌라시 기사만 못하긴 하다.
시험해볼까. 나는 열쇠를 구멍에 꽂아넣었다.
─찰칵.
들어가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여러 미디어매체를 섭렵해왔던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이 열쇠를 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문제인 게 분명──
─달칵.
“허미 씹?”
……돌아가네?
나는 한순간 당황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자물쇠가 완전히 열린 건 아니다. 절반 쯤 돌아간 열쇠가 더 이상 젖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격이 있는 자일수록 많이 열 수 있나 보군.”
열쇠를 빤히 보며 말하는 베로니카. 나는 왠지 약간 안심하면서 자리를 양보했다.
“먼저 시험하마.”
교대하듯 들어온 베로니카는 주저 않고 열쇠를 돌렸다.
─턱!
그녀의 손에서 황금 열쇠는 1mm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베로니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이상 노력해 보려는 시도도 않고 물러났다.
“많이 부족하긴 하다만, 바이콘 신족은 명색이 아스가르드의 준신(峻神)이다.”
우리 눈빛을 읽은 베로니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말석이나마 자리에 앉은 자가 남의 좌석을 뺏을 순 없는 법이니라. 정말 후계자에 걸맞는 자격과 인정을 받았다면 모를까, 나로서는 역부족이지.”
“그럼 저도 마찬가지겠군요.”
티르시는 편해서 좋다는 듯 열쇠를 돌렸다.
─턱! 물론 그녀의 손에도 열쇠는 꿈쩍 않았다.
“저는 저희 가문 조상님의 신좌로 충분하겠죠. 솔직히 애물단지기는 하지만요.”
나를 보며 친근하게 웃은 티르시가 물러났기에, 이제 남은 건 절반이다.
“포기.”
네페르티티는 열쇠를 돌리고 1초만에 기브 업. 브류나크가 그녀를 다독이듯 뺫뺫 울어댔다.
“흡!!”
다음으로 도전한 라리루라는 거의 문에 스파이더맨처럼 달라붙었다.
노력은 가상하다만, 열쇠의 단호함은 여전했다. 우리 후배님이 진땀을 빼도 자물쇠는 1mm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무삼.
근데 얘는 관련 신좌 같은 것도 없는데.
“잠깐만요!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나랑 같은 생각을 한 듯 라리루라는 바로 얼굴 가득 울상을 짓고 외쳤다.
“미희신이면 프레이야님!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여신님 아니에요?! 그런데 따로 흠결도 없는 저한테도 전혀 여지를 안 주잖아요?! 여자로서의 자신감을 잃어버릴 것 같은데요!!”
“미희신의 정체성은 외모와는 별개의 것이니까.”
눈물 고인 눈으로 칭얼대는 라리루라를 안고서 다독여주고 있자, 베로니카가 말했다.
“얼굴만 가지고 구신으로 꼽혔겠느냐? 정녕 그랬다면 신좌의 능력도 매혹처럼 외견과 직관적으로 연결되는 힘이 발현했겠지.”
“힝잉……. 그럼 그 정체성이란 게 뭔데요……?”
“잘 생각해 보거라. 아름답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일지. 신화에는 비유가 많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턱을 쓰다듬은 베로니카.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꼬았다. 라리루라는 생각해 보려는 듯 끙끙대며 내 팔을 깨물었다.
“비유…… 비유가 뭐가 어떻단 건가요?”
“여인의 아름다움은 육체와 품행에서 갈리지. 자, 프랑. 일단 너도 열어보거라.”
“으, 응? 나?”
프랑은 당황하다가 일단 시키는대로 열쇠를 젖혀보았다.
─찰칵! 그녀의 손에 자물쇠가 1/3 정도 열렸다. 프랑이 입을 헤 벌렸다.
“어……? 내가 2등이야?”
우리 모두가 놀랐지만 베로니카만은 침착했다.
베로니카는 프랑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간단한 일이지. 우리 중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여인은 프랑 네가 아니냐.”
“어, 어? 으, 고마워?”
“천만의 말씀을. 아무튼 이렇듯 ‘여성스럽다’는 말은 칭찬이다. 하지만 ‘계집애 같다’는 말은 남성에게 있어서 모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지. 안 그러느냐?”
어떤 짝눈 여신처럼 빙빙 돌아가면서 설명하는 일 없이, 바로 친절한 해설 모드에 들어가는 그녀. 꼴마초 강북호는 선뜻 긍정했다.
“당연하지. 사람마다 달라도 앵간하면 빡칠걸.”
“그 연장선이다. 신대에서 ‘남자다움’이란 육체 본연의 강함과 용맹함, 전사로서의 실력을 의미해. 여기 있는 나의 그대가 좋은 예시 아니냐.”
내 뺨을 만지작댄 베로니카가 픽 웃었다.
“……브류나크도 여자애 같은 이름은 싫어했어.”
가만히 얘기를 듣던 네페르티티가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면 그랬지. 은부리 까마귀는 뭔 얘기냐고 묻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은 무기니라. 그것도 남성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무기. 여성스러움이나 지혜와는 약간 거리가 있지.
“창을 무기로 쓰던 오딘은?”
“그만큼 완전한 존재였기에 주신이셨던 것이다.”
충격의 오딘 후타나리 설.
아니, 여자한테도 남성스러운 면은 있으니까 뭐 그런 뜻이겠지. 남녀의 분간을 나누는 건 핑크색 필통을 쪽팔려하는 잼민이 때나 할 짓이기도 하고.
“그럼 반대로 생각해 보도록. 남자다움의 반대, 여성스러움이란 뭐겠느냐?”
“계집애 같다는 비유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잔꾀?”
티르시가 무심코 흘리듯 중얼거렸다. 생긋 웃는 베로니카.
“바로 맞췄느니라. 그것도 마침 우리 주인님의 면모로군.”
아니 쓰벌, 잔꾀라니?
엘리트한 지능이라고 해 주시겠어요? 내가 약간 표정 관리를 못하자 라리루라와 티르시가 이제 좀 알겠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핫♡! 바로 이해가 되네요!”
“정말이에요. 확실히, 저 옛날 옛적에는 작전을 세우고 머리를 쓰는 행위를 ‘계집애처럼 군다’면서 깔봤어도 이상하지 않구요.”
“다행이구나. 그럼 이제 프레이야님의 정체성을 되짚어 보거라.”
“네! 정답!”
즐겁게 거수한 라리루라가 특유의 총기를 발휘하면서 외쳤다.
“가장 아름답다는 건 외모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던 거에요!”
“그래. 프레이야 님의 정체성은 그것이다. 해신의 딸, 바니르 신족의 사절, 아름다움과 지혜로 애시르 신족을 홀리던 지고의 무녀──”
잠깐 말을 끊은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수녀’나 ‘사제’로 불러도 되겠구나.”
“……신박한 해석이네.”
아까 전부터 말 한 마디 않던 다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