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록스 티베리우스는 머리를 끌어안고 번민했다.
전쟁을 부르는 전쟁상인이라고 불리는 티베리우스의 수장이자, 27살의 나이로 미스릴 클래스마저 넘보고 있다는 남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왜 이렇게 사칭범들이 많은 건데?!’
티베리우스는 특유의 명성과 용병단이라는 특징에 의해서 사칭범들이 많았다.
용병과 모험가의 차이는 주 무대가 전쟁터인가, 몬스터의 서식지인가였다. 용병도 몬스터를 잡으며 모험가도 전쟁에 참여하긴 하지만, 주로 어딜 선호하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용병은 모험가에 비해서 수가 적다.
길드와 그 길드장이라는 뒷배가 존재하는 모험가들과 달리, 용병에겐 그런 게 없다. 버는 돈은 큰 편이지만 위험도 컸다. 사칭범이 좋은 예시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잖아!’
그의 귀에 들려온 건만 벌써 6번.
들키지 않은 놈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그 2배 정도는 더 있을 것이었다.
한둘도 아니고, 그들의 이름으로 사람을 노리는 병신들이 어째서 이렇게 많단 말인가? 이걸 운의 문제로 치부하자니 몰락귀족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록스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셀루스티아……!〉
이 지방을 다스리는 남작이 수를 쓴 것이었다.
악명으로 유명해도 티베리우스는 합법 단체다. 산적단 쓸어버리듯 주먹구구로 죽여버리지는 못하니까, 일에 앞서 멍에부터 씌우려는 것이었다.
‘좋아. 정말 끝내주게도 최악이로군! 울고 싶을 정도인데 그래!’
용병이 모험가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면, 한 탕 뛰는 걸로 버는 돈이 많은 것과 전쟁에 개입하는 특성 상 권력자들과 안면을 트기 쉽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록스 티베리우스는 과거에 벌어졌던 숙청으로 몰락한 귀족가문의 장손.
모험가로 사는 것보다 용병단을 이끄는 편이 더 출세하기 쉬우리라고 본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저 셀루스티아와 각을 세우게 되다니?
‘셀루스티아라고 하면 황실과 가깝다고 소문이 자자한 귀족이잖아……!’
남작이라는 직위도 신분을 숨기기 위한 직책이 아니냐는 풍문마저 있었다.
저 브리타니아의 울프헤딘인가 하는 백작이 그렇듯이, 지배자들은 유능한 신하에게 충분한 이익을 보장하는 대신에 낮은 직책을 주곤 했으니까.
애초에 록스의 목표도 그것이었다.
‘아르마슈나스의 생존자 같은 기사회생은 우리 남매한텐 불가능해.’
몰락귀족에서 명예귀족으로 돌아갔다는 영애의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흉내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남의 성공담을 그대로 흉내내려는 멍청이는 몇 년 안에 목을 매달게 되는 법.
권력이나 왕권 등에는 추호도 관심없다. 능력을 인정해주는 고용주에게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받는 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로마니아엔 록스 같은 이들이 꽤 많았다. 그는 몰랐지만 같은 시각 유적지로 향하고 있는 윈스턴과 플라부스도 록스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울프헤딘 백작이란 인간의 성공담을 듣고 배가 아팠던 건 사실이지만, 비슷한 나이에 인간승리를 거두며 세운 업적만 봐도 ‘이게 사람 새낀가?’ 싶을 지경.
흉내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착실하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고 용병단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네?.’
셀루스티아 가문.
권력을 멀리하는 대신, 황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황제의 끄나풀로 사는 이들.
그런 이들과 각을 세울 수는 없었다.
보통이라면 말이다.
‘제길…… 원로원의 제안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티베리우스 용병단은 원한을 너무 샀다.
악명도 명성이라면서 폐단을 감수한 건 록스의 선택이었고, 그건 정답이었다. 실제로 원로에게서 비밀리에 접선이 올 만큼 유명해졌으니 말이다.
─자네들을 고용하고 싶은데, 어떤가?
현직 원로 중 누구인지까지는 철저하게 감춰진 접선법 탓에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아마 가주 급의 인물 아니겠는가. 다신 없을 출세 찬스. 놓칠 순 없었다.
그런데 그 제안을 덥썩 문 결과, 이제는 황제의 칼과 맞서게 생기다니?
‘망했다. 이제 어쩌지?’
계약을 따르면 셀루스티아와 부딪힌다.
장사를 접고 튀면 원로에게 찍힌다.
진퇴양난이었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다. 록스는 참지 못하고 서랍을 열었다.
〈술!!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티겠어!!〉
〈오빠!〉
─쾅!
쓰라린 속을 달래고자 술병을 뒤적거리던 그는 방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동생을 보고 오만상을 썼다. 물론 그녀는 친오빠의 표정에도 꿈쩍 않았다.
〈……록시. 또 무슨 일이길래 그래.〉
〈평민들과는 천박해서 못 어울려주겠어! 대체 언제까지 밍기적대고 있을 거야?!〉
─뚜벅, 뚜벅. 기품 있게 걸어온 소녀는 록스가 앉은 책상을 소리 나게 두들겼다.
그리고는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시간 끌 것 없잖아. 원로랑 접선해서 후퇴할 방법을 확보받고 유적을 털어버리자? 응? 황실의 개들도 대놓고 우릴 죽이진 못할 거라고.〉
〈인적 없는 곳에서 습격당하면 어쩌려고?〉
〈원로원 상원의원이란 사람이 그러지 않도록 해 줄 능력도 없을까 봐?〉
당연히 원로라면 그럴 힘이 있겠지. 알고 있고 말고. 그러니까 지금도 그 누군지 모를 원로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록스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신중하게 굴렴. 그리고 지금은 너도 나도 평민이야.〉
〈신분 상으로나 그렇지! 우리랑은 몸에 흐르는 피가 다르잖아!〉
동생 교육을 잘못한 건 아닐까.
록스는 매일 하는 고민을 오늘도 반복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꽃 다운 여자애가 화장도 못 하고 땀내나는 남자들과 전장을 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신경질적이 될 만도 한가.
그는 동생의 여심을 이해하기보단 화제를 다른 곳으로 틀었다.
〈됐고, 애들 모아서 따라 와. 이 이상 주변에 안 좋은 소문이 돌게 둘 수는 없어. 티베리우스를 사칭하는 도적들부터 소탕해서 오해를 푼다.〉
〈뭐야. 또 사칭범들? 요즘따라 많네.〉
〈그래. 그러니까 떠들 시간 없다.〉
〈그럼 오빠는 왜 술병을 까고 있었는데?〉
〈……시끄럽고. 준비나 해.〉
여동생을 쫓아낸 그는 검을 차고 용병들을 인솔했다.
록시는 그런 오빠를 못 마땅하게 째려봤다.
〈……요 며칠 정신이 늘 딴 데 팔려 있네.〉
설마 어디 창관에서 여자한테 코가 꿰이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민감한 시기에 문란해지기 쉬운 용병들과 몸을 부대낀 탓일까. 록시는 성에 보수적이었고, 그밖의 용병들과 다르게 품위있는 오빠를 굉장히 따랐다.
남들 눈에는─오빠인 록스로서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절대 안 될 소리. 오빠의 신부는 최소한 백작 영애 정도는 되야 해.〉
‘평민 여성=여자 용병’이라는 오해를 떨쳐내지 못한 록시는 그렇게 다짐했다. 만약 오빠가 못난 여자에게 홀리면 어떻게든 떼어놓고 말겠다고.
〈록시. 아직이냐?〉
〈아, 갈게! 기다려!〉
록시는 활과 화살을 챙겨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사칭범들이 출몰한다는 곳에 도착했을 때, 록시는 보았다.
〈니르바나 누님! 마법사가 섞여 있습니다!〉
〈아니, 이제 없어.〉
〈엥? 진짜네!〉
〈마법사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저, 저 미친 년부터 잡아! 마법사들 죄다 뒤져나가잖아!!〉
아직 손발도 맞지 않는 급조된 집단에서, 홀로 군계일학으로 노니며 사칭범들을 학살하는 절세의 미녀와── 그 미녀를 보면서 입을 벌리는 오빠의 모습을.
〈……세상에.〉
록스는 아까까지 하던 고민이 싹 사라진 것처럼 헤벌쭉 웃었고.
〈……하?〉
록시의 눈동자는 그에 반비례하듯 차가워졌다.
***
클라리오룸.
히타이트의 유적이랑 가장 가까운 도시는 그런 이름이었다. 중앙신전에 솟은 신전에 신의 축복이 걸려져서 성수가 콸콸 솟는다던가.
저기에 잠겨서 받는 축복이 클라리오룸의 명물 중 하나라나 뭐라나.
신성제국 로마니아답긴 했다.
〈미녀! 덮친다! 끄악?!〉
〈씨발, 슬랜더 미녀 존나 꼴리갸아아악?!〉
가는 길에 계속 튀어나오는 씹새끼들도 말이다.
역시 판타지 종교국가는 부패해야 제맛이긴 해.
‘새끼들. 슬랜더의 꼴림을 알다니 제법이군.’
근데 왜 나한테 꼴리고 지랄이냐고, 역겹게.
─언니 가슴이 다나 언니보다 크긴 해요.
─가슴이 큰 게 아니라 가슴 둘레가 넓은 거야.
참고로 도적들은 촬영 후에 스태프들이 멋있게 죽였습니다.
나한테 멋져 보이려고 굴지 마, 개새끼들아.
─그보다 라리루라. 너희 나라 도적 존나 많다.
─그러게요. 제 서커스단 시절의 3배는 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가 생각하길 포기했다. 아는 것 없이 뭔가 추측하는 것도 시간 낭비였다. 오는 길에 아무런 수확도 없었고.
“그보다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오늘은 먼저 자.”
“네? 언니 혼자서요?”
“너 집에 돌아가서도 언니라고 부르면 묶어놓고 하루 종일 덮쳐버린다.”
진짜 되도록이면 이 얼굴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본심이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일이 생긴걸.
“윈스턴이 날 의심하고 있나 봐. 너무 설쳤어.”
날 힐끔대는 사실상 씹게이인 새끼들이긴 해도 사람이 뒤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힘 조절하면서 싸웠는데, 그래도 좀 지나쳤었나 보다.
“하여튼 이래서 좆간들은 안 돼. 하나같이 약해빠졌다니까.”
“누가 들으면 언니는 사람 아닌 줄 알겠어요. 앗! 그 얼굴로 말하면 설득력은 있네요♡!”
“너 옷 벗고 기다려. 갔다 와서 자지로 혼쭐을 내 줄 테니까.”
“아무리 저라도 여자한테 덮쳐지는 건 저항감이 있는데요~?”
“여자 아냐 시팔!! 가슴도 없고 자지도 멀쩡해!!”
“앗 그랬죠 참.”
아무튼 존나 유희하러 나온 양판소 해츨링이 된 기분이었다. 무슨 시발 플래티넘 클래스 모험가가 아무런 근본도 없는 나한테 궁술을 가르쳐달래?
남자였으면 그냥 반 죽여놨겠는데, 진짜로 반쯤 흠모하는 시선의 여자 모험가였기에 흑심이 없는 듯 해서 대충 알려줬다.
‘내 활 솜씨라고 해 봤자, 힘이 존나 많이 드는 아즈테카 곡궁을 쏴대는 건데.’
잡고 있으면 인지능력이 올라가는 유물 활이다.
아무도 안 쓴다길래 챙겨온 건데 이렇게 눈에 띌 줄은 몰랐다.
강함을 어필할 필요는 있었지만 야수회귀/창술/마법을 다 봉인하고도 이렇다니. 힘숨찐 놀이도 내 강함을 숨기진 못했나 보다.
대충 지구에 떨어진 슈퍼맨이 된 기분. 나 빼고 전부 좆병신인 행성에서 무쌍이라니, 그거 완전 이세계물의 정석이자너?
존나 상태창도 없는 이세계물인 셈인가. 작가가 풍류를 모르는군.
“아둔! 토리다스의 술!”
“선배. 제 이불 뺏어가지 마세요.”
“메달에서 좋은 거 꺼내서 써.”
─탓!
침대 모포를 두르고 투명 마법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발퀴리에들 부르고, 나한테도 연락 꼭 넣어.”
“네에~.”
“으휴. 대답은 잘해요.”
픽 웃고 창밖으로 다이브. 아싸시노 노르드다.
─덱데굴. 천리안으로 인근을 훑었다.
‘윈스턴이 누군가랑 접선하고 있다.’
역시 이 탐사단에는 뒷배가 있던 것이다.
천리안으로 거리의 동태를 훑다가 우연히 우리 데장님이 안 보이길래 찾아본 건데, 타이밍이 딱 맞았다. 오딘의 눈깔이 참 편하긴 해.
‘저 접선이 자기네의 안전을 걱정한 결과라면 별 문제 없다.’
그런데 누가 아는가? 윈스턴을 뒤에서 부리는 게 우리의 적일지.
위험은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놓치지 않으려면 직접 가는 게 제일이고 말이다.
〈거기 좀도둑. 멈춰.〉
그래서였을까. 천리안으로 윈스턴을 살피는 데 정신이 팔렸던 나는 누군가가 걸자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여관 지붕에 있는 나를 무슨 여자애가 막 쏘아보고 있더라.
아니 시발, 근데 내 투명마법을 꿰뚫어봤다고?
‘〈편찬대대〉인가?’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자다 깨갖고 거실로 나왔다가 도둑이랑 마주친 것처럼 무심코 굳은 몸이 전투를 준비했다.
〈당장 내려와.〉
그런 내 모습이 수상쩍은 짓을 하다 들킨 걸로 보인 걸까. 금발 소녀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나는 대놓고 그 말을 씹으며 그녀에게 집중했다.
‘아마 〈인신〉은 아닌 듯 한데.’
레티티아 같은 경우도 있다. 내 눈으로 간파 못 할 권능도 있긴 할 것이다.
그래도 그냥 여자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무시할 거야? 가만히 있으면 들키지 않을 줄 아는 거라면 착각이야.〉
금발 소녀는 내가 계속 무시하자 빡쳤는지 활을 어깨에서 풀었다.
물론 정말로 그녀가 내 적이 아니라면, 수상한 짓을 하다가 들킨 주제에 오리발을 내며대는 내가 나쁜 놈은 맞지. 나는 경계를 풀지 않고 말했다.
〈누구야?〉
시발, 암컷 보이스 넘모 좆같애.
〈투명 마법부터 풀어.〉
대답하기 싫어서 시키는대로 마법만 풀었다. 아. 또 씹혀서 기분이 나빠진 모양.
〈야밤에 몸을 숨기고 외출이라. 수상쩍기 짝이 없네.〉
다시 씹었다. 미안. 변명하면 길어질 텐데, 나는 내 목소리가 너무 싫단다.
‘근데 어디서 본 듯한…… 아.’
생각났다.
‘이 도시에 오기 전에 슬쩍 봤던 일행인데?’
분명 우리가 도적들을 도륙하는 걸 힐끔 보고서 대빵으로 보이는 남자가 인솔해서 돌아갔었지. 딱 봐도 뭔가 있어 보여서 기억해뒀었다.
‘티베리우스 용병단이 복수하러 왔나?’
하지만 여자애 혼자서? 좀 이상한데.
─척. 여관의 연무장에 착지. 소녀는 나를 마구 째려보다가 편지를 던졌다. 무영창 바람 마법이다. 살랑거리며 날아온 편지를 낚아챘다.
〈우리 오빠의 초대장이야. 티베리우스, 알지?〉
〈초대?〉
말하긴 싫지만 물어봐야 하니까 참았다.
자기 이름도 안 밝힌 소녀는 오만상을 쓰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아마 당신한테……〉
〈?〉
〈당신한테…… 첫 눈에 반한 것 같던데.〉
〈………………〉
……뭐?
‘첫 눈에 반해?’
반하다니 무슨 뜻이지? 어떤 효과냐? 언제 발동하지?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오빠라매? 그럼 수컷이잖아?
남자가 나한테 왜 반해?
나는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듯 하다. 이야기의 흐름이 갈피가 안 잡히는 걸 보니.
〈말해두지만, 이 기회를 잡아서 오빠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관둬.〉
이해가 따라잡지 못한 나는 한동안 현실도피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사이에 소녀는 자신만의 망상을 계속 떠들어댈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내가 초대장을 건네러 온 건 그것 때문이야. 당신, 궁수잖아?〉
소녀는 활에 풀어놨던 현을 연결했다.
〈나랑 결투해. 마나 화살을 쓸 줄 알면 비살상용으로도 뽑을 수 있지?〉
〈……결투?〉
〈나한테 이기면 당신 마음대로 굴어도 좋아. 단, 지고도 오빠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끼릭. 활 시위가 매섭게 당겨졌다.
〈무슨 수를 써서든 쫓아내 줄 테니까, 각오해.〉
세상 씨발, 내 처지야.
덜덜덜덜…!!
굴욕과 분노로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건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공포였다. 내 앞으로 보내졌다는 편지가 사람을 처먹는 미믹의 환영으로 보일 정도의 무한한 공포!
초대장이고 뭐고 읽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 편지를 열었는데 거기에 프로포즈나 고백의 문구가 적혀 있다면, 나는 공포를 못 이기고 샷건을 난사해대는 호러 게임 주인공처럼 살겁을 일으키고 말리라.
〈……내가 관심 없다고 하면, 믿을래?〉
〈미안하다곤 생각해. 하지만 우리 오빠, 최근 몇 년 중에 제일 들떠 있거든. 아마 당신이 포기하더라도 우리 오빠가 물고 늘어질지도 몰라.〉
……욕도 안 나온다.
내 표정이 진짜 좋지 않은 걸 알았는지 소녀는 좀 당황하다가 미안한 듯 말했다.
〈정 싫다면 나한테 이겨 봐. 그럼 오빠한텐 잘 말해줄게.〉
〈……그래. 가족이 소중한 건 누구나 그렇지.〉
나는 체념했다. 아무튼 생각이 단락적이고 많이 폭력적이긴 한데, 나쁜 애는 아닌 모양이니까. 나 역시 여동생이 있고 이런 상황이라면 가만히는 못 있을 것 같고.
키잉─! 천리안으로 윈스턴을 살폈다.
─조사, 잘 부탁하겠네.
─예. 윈스턴 님도 몸 조심하시길.
접선은 잠시였는지 금방 헤어진 모양이었다.
저 속도로 보건대, 내가 바로 달려갔어도 뭔가 알아내고 현장을 덮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따로 분노는 생기지 않았다.
‘오드리 죽인다. 돌아가면 절대 죽인다.’
미안. 거짓말이다.
대상은 다르지만 아무튼 분노는 늘었다. 밖으로 새어나간 살기에 금발 소녀는 흠칫하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배신당한 듯한 표정이다.
〈것 봐! 이길 생각 만만이잖아! 역시 우리 오빠한테 흑심이 있는 거지?!〉
〈……너, 오빠한테 바보란 소리 자주 듣지?〉
〈그, 그걸 어떻게…! 아, 됐어! 승부야!〉
소녀는 빼액 소리를 치고 활을 겨눴다.
분명 극혐하고도 남을 인성인데, 왜일까? 하도 좆 같은 놈들한테 시달리다 보니까 얘도 은근 봐 줄 만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사촌동생처럼 귀엽게 보일 정도다.
‘그래. 날 때리려 드는 여자가 나한테 꼴려하는 남자보다 백 배는 낫지.’
하물며 그 여자애가 나보다 한참 약하다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좋은 기회 아닌가. 나는 해맑게 웃었다.
〈사실, 나는 남자한테 관심없어. 그래서 네 오빠보단 오히려 너한테 더 관심이 가네.〉
〈……어?〉
스윽….
나는 의식해서 소녀의 전신을 찬찬히 훑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기면…… 친하게 지내자?〉
〈자, 잠깐! 스톱!! 취소!! 결투 취소!!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 꺄아아아악?!〉
걱정 마. 고딩도 안 된 듯한 애를 덮치진 않아.
대신 잠깐, 내 스트레스 해소에 어울려주라. 응?
〈이히히히!! 이─히히히히히히!!!〉
〈꺄아아아아아악?! 오지 마!! 오지 마아아앗!!!〉
나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으며 밤하늘에 높이 뛰어올랐다.
곧 죽어도 나만 죽을 순 없지.
니들도 동성한테 노려지는 기분을 느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