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89화 (787/1,009)

─사박. 남자는 수풀을 밟았다.

로마니아의 평원은 윤택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풍요신 포모나의 신도가 받는 가호는 신성제국의 영토 전체에 내리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터전은 국력으로도 이어진다.〉

목에서 뿌연 마나를 뿜으며 그는 말했다.

〈넓은 땅과 자원은 축복이지. 인류의 기술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대부분의 인류는 속세의 굴레를 벗어날 힘이 없기에, 이는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없는 평원에서 생각을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융택한 삶은 진보를 방해한다. 한층 나아지고자 하는 생존본능을 거세하지. 그래서는 자유를 가진 듯 보여도 근본은 방목된 가축 같은 삶을 살다가 죽을 뿐이야.〉

사람은 욕망이 충족되면 움직이지 않는다.

아내에게 사랑받고, 안전이 보장받으며, 가족이 행복한 삶에서 ‘더 행복해지자’고 욕심을 부려대는 인간이 얼마나 있을까. 있다면 그 비율은 전체의 몇%일 것인가.

옛 에린의 신들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투쟁이야말로 인류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든다. 그 믿음은 실제로 수확을 거두고, 황금시대의 에린 인들은 신들이 죽은 뒤에도 불퇴의 강대국을 세우고 번성했다.

천공신의 신좌를 빼앗은 괴물의 저주가 옮겨붙을 때까지는.

목에서 마나를 흘리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드워프.〉

그가 역수로 쥔 검이 낫처럼 평원을 갈랐다.

─서걱.

참격은 빈 풍경에 실선을 그었다.

위장이 깨지며 마법이 풀렸을 때, 풍경에 많은 변화는 없었다. 단지 로브를 입은 드워프 마법사가 정좌하고 부유하고 있을 뿐.

그렇지만 만약 그곳에 그들 외에도 지성을 가진 생물이 있었다면 느꼈으리라. 보는 것만으론 알 수 없는, 놀라울 정도의 존재감을.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 한 폭의 풍경에 마치 거대한 성이 솟은 듯 했다.

〈진부한 논의로군. 말하는 너부터가 믿지 않는 듯 보이는데.〉

드워프는 겉모습에 비해 길게 기른 수염을 쓸어내렸다.

〈예전에는 믿었지. 지금은 아니다.〉

남자는 검을 역수로 쥐었다. 기다란 칼날은 낫 머리를 떼어낸 것처럼 이상하게 휘어 있었다. 그 칼날에 권능의 기운이 서렸다.

〈조언하지. 에른스트 에이트리센.〉

날카롭게 간 칼날처럼 섬칫한 기운.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 경계태세.

하지만, 그런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로부터 살기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쥐 죽은 듯 숨어 있어라. 은둔하면서 널 쫓는 변경백과 맞부딪히는 정도로 그쳐라. 별의 자손을 추종하면서 마법사 길드를 세웠을 때처럼.〉

〈고건 곤란하지. 조언을 하려면 남의 부끄러운 과오를 꺼내들면 쓰나.〉

드워프 마법사의 등 뒤로 수십 개의 영체(靈體) 팔이 솟아났다.

무기질적이어서 인형처럼 보이는 팔들은 제각각 다른 수인을 맺으며 마법을 장전했다. 유들유들한 태도가 거짓말처럼 그 마법에선 살기가 넘쳐났다.

〈너 광신도야. 미친 신을 따르는 독선자야. 네 왕의 목을 끼울 몸은 찾았느냐?〉

〈네가 자원하겠나? 신군께 바치기엔 비루하고 짧은 몸이다만.〉

비정한 자세와 희미한 투쟁심. 부드러운 태도와 넘쳐나는 살기.

거울처럼 대조적인 마스터 클래스들은 변경에서 그들의 권능을 부딪혔다.

콰아아아아아앙─!!!!!

그 직후, 초원은 화산이 터진 것처럼 소멸했다.

***

밤새도록 기사단장과 칼질을 한 나는 돌아와서 씻고 2시간 정도 잠들었다.

“충전 끝.”

이 강북호 바디에 과한 수면은 불필요하다. 난 일어나자마자 머리만 대충 만지고 프랑의 방으로 향했다. 지난 밤 완성한 단검술을 보여줄 생각으로.

─똑똑.

“프랑, 있어?”

“아으……?”

멍한 목소리. 자는 걸 깨웠나? 너무 일렀던 것 같기는 했다.

“흐으으응…… 누구……? 노르?”

“넹. 사랑하는 남편인데용.”

“에헤헤. 노르다. 잠깐만~…”

밍기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나가 퍼졌다.

뎃? 고개를 모로 꼬자 골렘이 문을 열어줬다.

“어, 음. 안녕?”

“Ungogo.”

들어오란 소리인가. 골렘 어는 잘 모르겠네.

식물이랑 대화할 수 있다는 요정왕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호기심을 품으며 들어가자, 네글리제 차림의 프랑이 더듬거리면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머리부터 묶는 거야?”

“으응…… 몰라. 그럼 노르가 빗어줘…….”

“네이, 마님~.”

잠이 덜 깼나. 프랑답지 않게 무책임한 대답이 좀 귀여웠다.

“갑자기 떠오른 건데, 중전마마라는 호칭은 좀 마망 같지 않아?”

“노르, 뭐라는지 하나두 모르게써.”

“테에엥~ 중전 마망~.”

머리를 빗고 묶어준 나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래서 말인데 프랑.”

“응.”

고개를 끄덕이면서 프랑은 무릎을 두들겼다.

“………………?”

내가 눈을 끔뻑이자 ‘안 눕고 뭐해?’라고 말할 듯이 눈으로 묻는 프랑.

나는 브리타니아 제일 찌찌에 홀린 것처럼 하던 말도 멈추고 무릎 베개를 했다.

눈앞에는 밑가슴이 가득. 뒤통수에는 허벅지.

‘이게 섹스지.’

시발 근데 섹스하러 온 게 아닌데.

“어, 그래서 말인데 프랑?”

“아…… 노르 그새 또 머리 많이 자랐네?”

“……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빨리 자란대.”

뭐 설명할 틈이 없네. 내가 묻자 프랑은 졸린 듯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야한 생각……? 나로도 많이 했어?”

“뭐?”

아니, 무슨 질문이 저렇대. 내가 꺼벙하게 묻자 프랑은 세상 슬프게 축 쳐졌다.

“아니야?”

“아니긴! 내가 야한 꿈을 꾸면 거기 나오는 건 거의 다 너야.”

이건 팩트였다. 내 아다를 가져가고 성 취향을 좌우해버린 프랑이니까 본능적인 영역에서 별 수 없는 부분이다. 내겐 꼴림의 아이콘 같은 부분.

그나저나 우리 프랑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울프헤딘 후각 강화!’

나는 직감적으로 후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 달큰한 냄새……!! 코가 아프다면서 강렬한 향수는 잘 뿌리지도 않는 프랑의 방에서 나기에는 부자연스럽다!! 나는 침대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데구르르 데프픗.

술병이 하나 굴러나왔다.

유리병이다. 고오오급 양주다.

“프랑. 이거 뭐야.”

“술!”

아니 씨바 술인 건 보면 알아요.

근데 쓰벌 존나 귀엽네. 만세하면서 웃지 말렴. 꼴리니까.

“누가 줬어? 네가 가져와서 혼자 마셨어?”

“으응……. 그 애, 그 애. 머리 금발.”

“변경백?”

“변경백!”

들으셨읍니까? 원로원 상원의원 겸 변경백이자 마스터 클래스인 오델리아 씨?

그런 당신도 프랑한테는 그냥 금발 여자앱니다. 이거 프랑이 남자였으면 100% 반했다. 휴, 내가 미리 침 발라둬서 다행이지. 존나 포상금 받아도 되겠네.

프랑한테 술을 먹였으니 포상금 말고 위자료를 받아야겠지만.

“변경백이랑 술 마셨어?”

“밥 먹을 때 마셨어. 다나가 한 입 줬어…… 왜 그 술병이 침대에 있지?”

‘혹시 다나도 여기 있나?’하는 얼굴로 침대보를 들춰보는 프랑.

당연히 거기 있을 리가 없다. 아내들이 날 두고 같은 침대에서 꽁냥대며 잠들었다고 하면 그것도 나름 꼴리긴 하겠네. 보자마자 바로 쥬지로 벌을 내려주겠지만.

“쓰으으으으읍……”

다시 한 번 비강으로 한껏 프랑 성분을 흡수.

그리고 눈치챘다.

“프랑. 너 가슴골에서 증류주 냄새 나.”

“킁킁.”

자기 가슴을 들춰서 코를 갖다대는 프랑. 대체 무슨 컵이여야 저게 가능하지.

가슴 냄새를 맡던 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모유는 알코올이 있어.”

“네가 술병을 갖고 와서 다 마시고 안고 잔 게 아닐까 싶으요.”

“그렇구나! 노르 똑똑해!”

와. 대화하는 나까지 IQ가 낮아질 것 같아.

“잠이 덜 깬 게 아니라 술이 덜 깬 거였네.”

누가 할망구 아니랄까 봐 ‘술 1잔 마신다고 안 죽어’거리면서 마시게 했을 게 눈에 보였다. 존나 식사 자리에 같이 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래서는 기술을 알려주고 뭐고 못 하게 생겼군.

“으…… 노르, 나 머리 아파……”

“숙취인가 보다. 누워있어.”

‘너 진짜로 드워프는 맞니’하고 물어볼 뻔 했다. 말했다가는 울 것 같고.

나는 프랑을 눕혀놓고 시종을 불렀다.

“숙취에 도움이 되는 포션 같은 건 없나요?”

“숙취해소 포션은 부작용이 있어서 가주님께서 치워버리셔서요. 케이크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단 걸 먹으면 숙취가 풀리긴 합니다.”

“그럼 그걸로라도 가져다 주세요.”

진짜인지는 몰라도 몸에 나쁘진 않겠지. 당분을 섭취하면 머리가 돌긴 할 테고.

잠깐 끙끙 앓는 프랑을 쓰다듬어주며 기다리자 시종이 금방 케이크를 만들어왔다.

생크림 홀케이크였다. 너무 많은데 싶지만, 조각 케이크를 만드는 게 더 힘들겠지.

어쩔 수 없나. 먹다 남기지 뭐.

“프랑? 먹어.”

“아앙~♡”

“음.”

나는 말없이 포크로 쪼갠 케이크를 떠먹여줬다. 아침부터 침대에 앉아서 케이크라. 조금 방탕하긴 하지만 내가 남말할 처지는 아니군.

“다 먹고 차도 있으니까 마셔. 속 좀 풀면서 자. 옆에 있어줄게.”

숙취의 원인은 분명 아세트알데히드가 뇌혈관을 건드려서였지? 괴도 자매들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지금 프랑한테 스킬 캡쳐를 주입했다간 아파할 게 확실했다.

‘자고 있는 동안에 주입하면 꿈에도 모르겠지.’

그리고 일어났을 때 적당히 대련 한 번 하자고 꼬드기면 ‘어? 어어?’하면서 내가 자는 동안 듬뿍 넣어준 사랑의 결실을 깨닫고 프랑도 감격할 게 분명하다.

“아~”

나는 완벽한 계획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내 포크질이 멈추자 프랑은 비틀거리며 케이크를 푹 물었다가 찐득한 크림을 떨어트렸다.

“에헤헤. 맛있다♡”

“에고. 아주 아기가 다 됐네.”

입에 묻힌 크림을 닦아주고 침대에 쏟은 크림도 닦으려고 하는 나.

그런데 어째 침대보는 깨끗하다. 분명 잔뜩 쏟아졌는데?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잠깐 벙쪄버리고 말았다. 집중을 되살리자 프랑의 가슴에 한가득 묻은 생크림이 보이는 게 아닌가? 아마 크림이 전부 가슴에 쏟아진 모양이었다.

“이 괘씸한 턱받이 같으니. 대책없이 야해갖고.”

“앗♡”

밑에서 퍼올리듯 가슴을 주물거리자 달짝찌근한 신음을 흘리는 프랑.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신혼인 우리 부부. 결혼식을 올린지 1년도 안 된 20대 남녀가 이런 분위기에서 인내가 가능할 리 없다.

프랑은 넘어지듯 누우며 다리를 쭉 뻗었다.

“에헤헤♡”

이거 흥분했네. 나는 짐짓 엄격한 척 굴었지만 자지는 솔직했다. 좆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며 우뚝 솟자 나는 그냥 가슴골 생크림 토핑에 자빠졌다.

“프랑, 아침은 어쩔래?”

“…………♡”

프랑은 대답 대신 내 자지를 살살 훑었다.

그리곤 ‘베에~♡’하고 입을 벌렸다.

“……그래, 오늘 아주 배 부르게 줄게.”

생크림의 원조는 러브젤이었다던가.

언제나처럼 진위여부는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팩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