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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노르드를 지켜보던 베로니카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훅. 소리를 없애는 결계가 사라졌다. 가까이서 권능을 발휘하던 라리루라가 한 건을 끝낸 것처럼 개운하게 기지개를 폈다.
“끝난 모양이네요☆!”
“……어? 아, 아아. 음. 그런가 보군.”
딴 생각을 하던 차였기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좀 어리벙벙했다.
친위대원 차르투스의 영혼을 심문한 노르드는 그 시체를 코르넬리우스가 보낸 사람에게 떠넘겼다. 권력을 동원한 용의주도한 입 막음이었다.
‘인간 사회의 흐름은 여전히 알기 어려워…….’
베로니카는 약한 소리와 한숨을 억제했다.
인간의 요리를 맛 보고, 인간의 이론을 배우며, 인간이 쓴 글을 읽어봤지만 아직까지도 인간들의 정치나 생활 습성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바이콘 신족이 인간의 터전을 떠난지도 한참.
그 시간의 간극을 쉽게 메울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떤 얘기가 오갔길래 이런 유인작전이 된 걸까요~?”
“……귀족 사회, 복잡해. 이해 불능.”
“선배랑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전 듣고 배워도 실천은 못 할 것 같아서!”
……아니, 정치와 권력이란 같은 인간끼리라도 어려운 것일까?
인간은 어떨 때는 알기 쉬울 만큼 단락적인 듯 하면서도, 가끔은 같은 인간들끼리도 이해 못 할 어려운 사고력을 발휘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본능과 지성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나도 남 일이 아니긴 한데……’
베로니카는 그렇게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일부러라도 더 철저하게 안전을 확인하고 나자 생각은 또 삼천포로 빠졌다.
‘성세성사(聖洗聖事)의 방법은 알아냈어.’
성세성사.
신을 섬기는 무녀가 되는 방법.
무려 그 신대의 아스가르드에 내려온다는 유서 깊은 세례였다.
물론 문헌을 남기지 않는 바이콘들이다. 당연히 베로니카가 전승받지 못한 지식은 거의 없었기에 고작 며칠로 과거의 유산을 얻는 건 불가능한 일!
그렇지만 다행히 베로니카의 곁에는 그 지식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었다.
─찡긋. 베로니카와 마주친 로키가 윙크를 했다.
‘……다행, 인 거 맞겠지?’
로키가 알려준 방법을 떠올린 베로니카는 노르드에게 받은 지팡이를 꼭 쥐었다.
불안불안해 하던 그녀는 금방 머리를 털었다.
어디 감히 로키 님을 의심한다는 말인가. 피에 새겨진 일족의 특질이 베로니카를 단호하게 했다. 무한정한 충성심과 헌신은 슬레이프니르 때부터의 전통이다.
모든 바이콘들은 노르드에게 자유를 하사받았다.
저주로부터의 해방. 미래를 꿈꿀 자유.
자비심 가득한 주인님 덕분에 바이콘들은 자기 자신만의 목표를 바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유를 선물받았기에 비로소 그녀는 꺼리낌없이 노르드를 섬기고자 마음 먹었다.
그 선택에 슬레이프니르가 물려준 봉사 본능의 영향이 없다고는 하기 힘들다.
섬기고 싶어진 상대방에게 우마처럼 부려지면서 행복을 느끼는 천성.
하말이라고 불리는 슬레이프니르의 다른 혈통, 그라니들도 가진 특성이다.
아니 그것보다, 따지고 보면 그 신마(神馬)가 가진 헌신의 마음가짐은 로키한테서 유래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피는 못 속이다더니.
‘……그리고 애당초, 나라도 본능에 조금 굴복할 수도 있지 뭐.’
인간들도 성욕, 식욕, 수면욕 같은 거에는 맨날 충실하잖아.
모든 본능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인간들도 모성애나 부성애를 언급할 때는 본능에 굴복했단 식의 표현을 쓰지는 않는 모양이었고.
그러니까, 음. 이 정도면 좋은 본능이 아닐까?
노르드가 바이콘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남자였어도 베로니카는 충성을 바쳐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그녀의 주인님은 얼마나 선량한가.
머리를 조아리고 【신】으로 섬길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는 주인님이었다.
‘……응.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지 않고 말고.’
그 ‘방법’을 듣고 나서부터 오싹오싹 흥분되는 건 종족의 천성일 뿐이다.
그녀는 절로 뜨거워지는 숨을 토해내며 차분한 척 가장했다.
‘……베로니카, 또 변태 같은 걸 생각하고 있나 보네.’
제 3자인 프랑이 보기엔 그저 밤 일을 앞두고 달뜬 숫처녀 같았지만 말이다.
…꼬물꼬물.
아랫배를 만지작대는 베로니카를 보면서 프랑은 다짐했다.
‘끝나면 나한테도 알려달래야지.’
국적의 뿌리가 닮은 바이콘과 드워프여서일까.
노드르의 아내들 중에서도 취향이 가장 비슷한 두 사람이었다.
***
황제의 늑대굴을 알아낸 나는 짬을 내서 영지로 돌아왔다.
“근데 솔직히 나는 아직도 여기가 내 집 같지가 않아요, 눈나.”
“밖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이 집에서만 1년 정도 갇혀 살면 소감이 바뀌지 않을까?”
“그건 시발 올드보이 메타잖아. 돌아버린 것?”
군만두는 없지만 미녀들이 산해진미와 미인계로 보살펴주는 올드보이다. 오대수 씨가 봤다간 나는 장도리에 불알이 터져나가겠는데.
아무튼 〈공간 이동〉도 있으니까 시간 문제는 고려할 게 못 된다.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고 캐서린을 통해 영지의 상황을 살펴보는 나.
─똑똑.
바이콘들에게 지시를 몇 가지 내리고 있으려니 집무실이 노크됐다.
투시안으로 살폈다. 가운을 입은 베로니카였다.
평소랑 다른 옷이었기에 조금 더 투시했다.
─스륵.
흰 가운이 사라졌다. 투시는 남자의 로망이지.
놀랍고 괘씸하게도 로브 밑은 알몸이었다. 발기 불가피.
‘……아니 근데 알몸에 가운만 입고 왔다고?’
아무리 저택 안에는 가족+에이션트 광대 할매 뿐이라지만 좀 안일한데?
이건 집무 탁자 밑에 가둬넣고 범행동기를 취조할 수밖에 없겠군. 쥬지를 빨면서 아나운서 급의 발성이 가능해질 때까지 불구속 입건이다.
“들어와.”
“으, 음. 바쁜데 미안하구나.”
양산 체계에 들어가서 상품화 코스를 밟고 있는 짭 옥새에 마나를 불어넣던 나는 하던 일을 빨리 정돈했다. 베로니카가 이걸 노린 거라면 책략가가 달리 없다.
“그, 주인님을 신으로 섬길 채비가 끝났느니라.”
“아, 과연.”
뚫어지게 바라보면 윤곽이 보일 듯한 가운 위의 유륜에 눈이 못 박혔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름 진지한 얘기였기에 발기는 감췄다.
아쉽게도 두껍고 기장이 긴 가운이라서 겉으론 티도 안 났다.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으니, 형식 뿐인 가계약이 되겠다만……”
“어. 금방 갈게. 네 부탁도 중요하니까.”
판타지의 마법사가 악마와 계약해서 짱 쎄지는 이벤트는 국룰 중의 국룰.
여기서 내 역할은 악마가 아니라 신이지만, 날 섬기는 걸로 베로니카가 ‘심해의 군주’를 빨아대는 문어 빨판 새끼들처럼 내게 힘을 받을 수 있다면 개이득이다.
라리루라에게 자주 해주는 정액식 마나 충전의 홀리 몰리 버젼이다.
“어디로 갈까?”
“따라오거라. 다른 바이콘들도 도와주었으니.”
따라오라길래 따라갔다.
저택 부지는 여유가 있고, 마법으로 늘어나거나 증축하기도 해서 빈 방이 많았다. 그것들 중 어느 한 부지로 향한 나는 입을 헤 벌렸다.
“……뭐야 이게.”
“어떠냐? 꽤 괜찮지? 우리 일족의 박물관이다!”
쭈뼛대던 걸 멈추고 약간 자랑스러워 하는 그녀.
“……박물관? 신전이 아니고?”
내 눈에는 아무리 뜯어봐도 신전 그 자체였다. 인간 문화 마니아인 베로니카의 고풍스러운 취미 투성이인 신전 말이다.
대리석를 기조로 세운 건물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내부의 예술성에 심혈을 기울인 듯 싶었다. 마치 100년 넘게 한 분야에 몰두했던 예술가의 작품 같다.
천장은 3층까지 크게 뚫어서 크기에 비해 훨씬 넓은 공간이라는 착시를 줬다.
아무렇지 않게 군데군데 있는 방이 회개실이나 기도실로 보이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었다. 사전에 들은 것 없이 봤으면 교회로 착각했겠다.
‘착각이고 자시고, 진짜 지구의 교회를 모티브로 만든 거 아냐?’
이세계 인간 문화도 제대로 모르는 베로니카를 꿈 속 지구에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제일 눈에 밟히는 게 한 가지.
그 작지만 절대 검소하지 않은 신전에서 바이콘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째 여자들 뿐이다?”
“수컷들을 위한 건물은 따로 지었으니 말이다.”
신전이 아니라 수녀원이었나.
남녀칠세부동석도 이만큼 지키면 출산률 곱창나.
“괜찮지? 괜찮지? 이 박물관은 조각사 신생(神生) 300년의 거장의 솜씨니라!”
“송구스럽습니다.”
부끄러운 듯 말하는 바이콘 여인이 1명.
얼굴은 알았지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추호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뭐라고 따지기 전에, 무릎을 꿇은 바이콘들이 경건하게 기도하는 동상을 슬쩍 가리켰다.
“저 동상은 뭔지 설명해. 내 창이 저 새끼 모가지에 꽂히기 전에.”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 노르드 님의 존안을 가능한 재현했습니다만……!”
그니까 왜 내 얼굴을 재현했는지 묻잖니 시발아.
신전의 중심에 꽃다발과 화원을 둘러싼 거대한 동상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게 박물관? 혹시 전시 코너에 내가 입다 버린 헌옷 같은 거 전시하진 않았지?
“동상은 통짜 오리할콘입니다! 제작은 듀나미스 공방의 클라라 님께 손을 빌렸죠!”
“……하고 싶은 말은 존나 많은데, 우선 세금을 써서 내 동상을 세운 이유는?”
“예?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저희가 노르드 님께 받은 봉급을 십시일반하여 만든 것입니다. 아! 부족한 금액은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이 말대가리들 저주를 풀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런 몹쓸 생각마저 하며 이마를 붙잡았다.
“그, 있잖니? 아니, 있잖아요? 저를 신이나 주인으로 섬기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분명 그때 그럭저럭 근사한 분위기에서 제 제안을 받아들여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동상 정도는 영주들도 세운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리할콘으로 세운 동상에 신족들이 도열해서 기도를 바치는 영주는 없는데스.”
신성제국이라는 로마니아의 황제련도 그 염병을 벌이면 길로틴 원콤이겠다 씨팔.
‘하이로메인 이 좆교수 어딨어.’
인간 문화를 알려주라니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 당신 이거 업무태만이야.
“……그, 안 되겠습니까? 치울까요?”
300년 조각 외길 인생이라는 거장 양반께서 내 눈치를 보자, 베로니카가 화들짝 놀랐다. 아주 날 씹새끼로 만들지 그러니. 나는 체념하고 말했다.
“영지민들한테만 들키지 마세요.”
“걱정 마십시오! 이미 동상 3호가 미스릴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희들만이 아니라 영지민들도 이 멋진 동상을 보며 하루의 행운을 기원할 수가 있겠지요! 으헤헤헷!”
좋아. 돌아가기 전에 공방에 한 번 들리자.
공방에 벼락이 10분 정도 쉴 새 없이 떨어지면 천벌인 줄 알고 제작은 관두겠지.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나. 베로니카가 내 손을 잡고 앞장 섰다. 방금 본 걸 잊고 싶은 마음에 나도 곧 머리를 비웠다.
통…….
그렇게 해서 나온 곳은 넓은 방이었다. 기도실 같지만 내 오해겠지. 아마.
신밀(神密)한 공간인 것처럼 창문도 없는 방에 들어서서 베로니카는 어깨에 걸친 가운을 젖혔다. 가운이 푹신한 소리를 내면서 벗겨지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드러났다.
“……시, 시작하자꾸나. 옷은 이리로.”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하며 베로니카는 정중하게 내 옷을 벗겼다.
가운만 입고 나타났을 때부터 눈치채긴 했는데, 역시 이런 거였나. 셰이드의 주술도 그렇고, 이쪽 문화권의 중요한 의식은 다 이런 식일지도 몰랐다.
“……미, 미리 말해두겠다만, 이것은 아주 역사 깊은 의식이니라. 절대로 내가 바라서 하는 게 아니다. 그 점 오해하지 말거라?”
베로니카는 뿔에 끈 장식을 몇 개 감고 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녀는 신의 종복을 의미한다. 이건 그 헌신의 마음을 보이는 세례로서……”
“알았으니까 이만 시작하자. 나는 뭘 하면 돼?”
“……가만히 있거라. 절대로,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다? 약속이다?”
죽을 만큼 부끄러워하며 말하는 베로니카.
이제 와서 몸 좀 섞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그게 내 오산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행동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예상 밖의 사태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귀의를 시작하겠나이다.”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양손을 모은 베로니카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쪽.
그리고는, 절을 바치며 내 발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