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르바나! 여기에도 있소!〉
〈네, 확인했어요.〉
오프툼이 외치는 말에 인피면구를 쓰고 분장한 오드리가 시위를 놓았다.
쉬익─! 퍽!
〈꺽!〉
화살의 위력은 엄청나고, 눈이 풀려서는 인질을 잡고 있던 몸종의 어깨를 꿰뚫었다.
오프툼은 오러 차크람을 던지며 말했다.
〈이야, 백발백중이시군!〉
〈훈련을 잘 받아서.〉
황제가 은둔한 저택의 소탕전에 참여한 그들은 거침없이 담당 구역을 제압했다. 약물이나 사악한 마나 등을 써서 심신을 사로잡힌 이들을 제압하는 역할이었다.
〈오프툼, 비켜 주세요.〉
오드리는 노르드가 괴도의 7가지 도구라고 명명한 잠입용 매직 아이템을 던졌다. 마비 쇠사슬이 치솟으면서 영문을 모르는 시종들을 구속했다.
〈꺅?!〉
〈어, 어억!! 무슨 짓이오!〉
당황하는 시종들에게 오프툼은 되도록 친절하게 말했다.
〈대우가 거칠어서 미안하게 됐소. 그래도 무고한 이들의 안전은 보증할 것이오.〉
〈아, 아뇨.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이게 당최 어찌 된 일인지요……?〉
노예 몸종의 칼에 목 가죽을 살짝 베였던 젊은 메이드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프툼은 씩 웃고는 그녀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주겠소. 사람을 남겨둘 터이니 안심하길.〉
〈그만. 내버려두고 넘어갑니다.〉
오드리는 목도리를 여미면서 오프툼의 귀를 쭉 꼬집었다. 딱히 질투는 아니다. 사심 없이 젠틀한 태도가 좀 멋져 보였다는 건 비밀이다.
인피면구 위로 뺨을 만지던 그녀가 물었다.
〈제이드. 포위망은 어떻죠?〉
〈갖춰졌수다.〉
〈그럼 저희 역할은 여기까지군요.〉
저택 소탕의 주력은 그들이 아니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친위대원을 처치하고 생포하는 건 노르드 일가의 구성원들이 할 일이었다.
─툭툭!
마음을 놓는 그녀의 어깨를 오프툼이 두들겼다.
〈솜씨가 제법이더군. 록시 양이 무서워 할 만 해.〉
〈맞아요. 제가 좀 믿음직하죠.〉
능청맞게 대답하면서도 오드리는 내심 가슴 한 켠이 따듯해졌다. 실전의 긴장은 괴도로 활동할 때 익숙해진 것이었지만, 그게 싸움이 능수능란하단 뜻은 또 아니었기에.
‘……좋아! 분위기 좋고!’
로마니아에서 벌이는 작전이라길래 냉큼 따라온 오드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캐서린이랑 교대하면서 이런 작전을 벌이다가, 사적으로도 은근슬쩍 친해지는 거야……! 그리고 위화감을 깨달을 무렵에 정체를 들켜주면……!’
오드리로서 개인적인 호감을 어필하다가, 마치 우연히 들켜버린 듯 딱 걸리면 비밀스러운 느낌과 밀당이 한꺼번에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신뢰는 일을 하면서 쌓고, 은근한 호감 교류는 사석(私席)에서 쌓는다.
호기심과 관심은 니르바나라는 가상의 신분에서 저절로 생겨날 것이었다. 오드리는 중간에 떡밥만 살짝씩 뿌려주면 되는 법!
‘업무랑 병행해서 오프툼이 먼저 날 신경 쓰게 만드는 거지!’
완벽한 계획이다. 오드리는 가슴이 뛰었다.
이런 상황, 이런 시국에도 변함없이 결혼 활동 중인 그녀였다.
***
황제 베네딕트는 망토를 벗어던졌다.
〈제길, 제길, 제길……!〉
얼마 전까지 제국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었던 남자는 흥분성 마약을 맞은 야생마처럼 기품없이 뜀박질을 벌였다. ─헉, 헉, 흑, 헉. 거친 숨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흐악!!〉
─끼익! 자빠질 뻔 하면서 복도를 꺾은 황제는 그 건너편 풍견을 보고 경악했다.
〈응? 아, 네가 황제야?〉
미치광이 같은 광대 옷을 입은 계집이 집채만한 늑대를 데리고 서 있었다. 체크무늬 광대의 뒤로 친위대원을 씹어먹는 늑대가 보였다.
〈나도 갈 날이 진짜 얼마 안 남았나 봐. 이런 꼴뚜기 한 마리도 다 벅차고.〉
〈저, 저리 꺼지거라!!〉
호신용으로 챙긴 폭탄을 내던지자 로키는 눈을 찌푸리며 뒤로 피했다. 환상으로 만들어낸 늑대는 공격을 방어하는 데 걸맞지 않아서였다.
─콰앙!!
〈휘유~♬〉
우아하게 폭발을 피한 로키는 2~3층을 일렬로 잇는 폭발의 흔적에 감탄했다.
〈황제는 호신용 무기도 남다르네. 응……? 아, 도망쳤나.〉
폭연이 걷혀도 사람 그림자는 없었다. 뚫어놓은 구멍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로키는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고, 그 틈에 황제는 거리를 벌렸다.
‘빌어먹을! 날 지켜야 할 놈들은 어디로 갔어!’
시름을 달래고자 술과 주색잡기에 빠져서 잠에 들었던 황제는 세상을 원망하며 도망쳤다. 잠에서 깬지 오래건만 아직도 악몽 속에 있는 것만 같다.
아까 넘어질 뻔 했을 때 손톱이 까졌는지 피가 철철 흘렀다. 황제는 아픔도 잊고 조여드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도망쳐서 도착한 서재의 비밀 통로를 열었다.
‘여기로 도망칠 수만 있으면……!’
통로 끝에 〈공간 이동〉 장치가 있다. 유물을 사용하면 목숨은 건사할 수 있을 터였다. 통로의 끝에서 빛을 발견한 그는 기쁨에 눈을 빛냈다.
기쁨은 도착한 순간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들어오기 전부터 비밀 통로에 쌓인 먼지가 입구의 장치에 쓸려나간 상태였다는 것과, 왜 저 유물이 벌써부터 작동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휘릭.
〈끄억?!〉
〈공간 이동〉 게이트로 손을 뻗던 황제의 목을 무언가가 감쌌다.
‘배, 뱀……?!’
파충류의 비늘처럼 우둘투둘한 촉감이지만 뱀은 아니었다. 비늘 채찍이 황제의 목을 감고 천장에 팽팽하게 매달았다. 황제는 간신히 발끝으로 섰다.
〈생포 성공.〉
채찍의 주인은 발소리도 없이 천장에서 바닥에 내려왔다. 황제는 뒤돌아 설 수가 없었다. 육식성 상위포식자 같은 시선이 그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윽고 물색 머리카락의 미녀가 걸어서 시야로 들어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훑었다. 그녀는 유물의 동력원을 끄면서 말했다.
〈비밀 통로 위치, 너무 뻔해. 20점.〉
나르메르-나일에 가득한 흑마법사들의 은신처에 비하면 하찮아도 너무 하찮았다.
‘……그치만 깜짝 놀랐어.’
발소리에 놀라서 천장으로 몸을 피했던 네페르티티는 표정변화 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도 수준 낮은 탈출구였기에 혹시 다른 용도는 아닐까 해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네페르티티를 보며 침을 삼키던 황제는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기, 기다려라! 누구의 사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풀어다오! 돈! 돈이냐? 따로 보관해둔 금괴가 있다! 여, 여기! 봐라! 금괴 말고도 황궁의 보물고 열쇠는 나한테 있다!〉
〈……보물고.〉
생포하라는 얘기만 들었던 터라 그의 구걸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네페르티티도 보물 얘기엔 귀를 쫑긋 세웠다. 황제의 얼굴이 펴지자 그녀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위치, 어디?〉
〈……마, 말해줄 수 있겠나! 날 데리고 여기서 벗어나라! 그럼 안내해주마!〉
─탁! 네페르티티는 황제가 보여준 열쇠를 눈에 잡히지도 않는 속도로 낚아챘다.
〈위치, 어디?〉
어서 이곳에서부터 벗어나서 네페르티티를 어찌 해 볼 생각으로 흑심을 품었던 황제는 멍해졌다. 무신경하게 열쇠를 탈취당한 탓에 손가락이 몇 개 부러져 있었다.
─지끈! 뒤늦게 찾아온 아픔에 황제는 손가락을 붙잡고 침을 튀겼다.
〈이, 이 미천한 년이!! 보물고는 내가 아니면 못 연다!! 금괴가 있는 곳도!!〉
〈……그래. 그럼, 칭찬은 포기할래.〉
〈뭐?〉
─쩍!!!
네페르티티의 발차기가 황제의 안면을 갈겼다. 채찍에 묶인 그의 몸은 무게 중심도 아랑곳 않고 요요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축 늘어졌다.
이빨이 우수수 쏟아졌지만 목에 가해진 힘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목뼈는 멀쩡했다. 도피생활 중에 강박증적으로 챙긴 매직 아이템 덕분이었다.
네페르티티는 뺏은 열쇠를 보며 시무룩해졌다.
〈전리품…… 유감.〉
금괴를 가져가면 노르드가 기뻐할 것 같았는데.
침울해 하던 그녀는 메달에 대고 말했다.
〈황제 잡았어. 지하실 비밀 통로.〉
가족들에게 임무 성공을 전한 그녀는 열쇠를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뭉개진 코로 쌕쌕대는 황제를 바라봤다.
〈……………….〉
노르드가 황제의 권위라는 높은 성벽을 해자부터 철저하게 무너트려놨기에, 황제는 직위와 권력을 잃고 추한 꼴로 무너졌다.
황제 베네딕트는 황좌에서 내려오면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었다.
하지만 저 못난 필부에게 말도 못할 꼴을 당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원한을 갚지도 못하고 삭히거나, 사로잡혀서 목숨을 잃고 만 사람도.
그를 생포한 네페르티티는 친구가 오랜 과거를 끝매듭 짓는 걸 도와줬다는 감상 뿐이지만,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자리를 목숨보다 갈망하던 사람도 있을 게 분명했다.
문득 떠오르는 건 노르드와 같이 봤던 스스로의 과거다.
〈……끝매듭.〉
글재주가 없는 그녀의 발상 치고는 적절한 비유 같았다.
매듭을 묶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되려 묶은 다음이 더 문제였다.
매듭짓는 걸로 끝을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매듭을 짓고 나서 인생이라는 실을 어떻게 이어나갈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티르시는 이 나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순간을 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그녀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앞날이 있기 때문에?
“네페르티티…… 씨.”
그때 비밀 통로에 도착한 프랑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을 멈춘 네페르티티는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어색한 느낌에 입을 웅얼거렸다.
“프랑…… 프란체스카.”
“앗, 네. 음…… 에헤헤. 프랑이면 되요.”
“응. 나도 그냥 네페르티티라고 불러.”
어색한 건 피차일반이었다. 아직 호칭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사이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들이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던 탓이다.
“그, 거기 있는 게 황제죠? 이걸루 어떻게든 한 건 낙착이네요! 수고하셨어요!”
그래도 가족인데 이대로는 좋지 않다. 용기를 낸 프랑의 말에 네페르티티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냥 반말해도 돼. 그런데 프랑, 왠지 익숙해 보여.”
“어? 응? 그, 그런가……? 에헤, 에헤헤.”
얼굴이 짜부돼서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을 두고 할 말로는 조금 너무 밝았던 걸까. 프랑은 자기가 뱉은 말을 살짝 후회하면서 말을 주워섬겼다.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나는 싸우다가 다쳤던 날에두 헤헤 웃으면서 떠들었는걸? 맞다! 노르한테서도 다 끝났다구 연락 왔어! 다행이다, 그치?”
─불끈! 주먹을 쥐며 기운 차게 말하던 그녀는 쌀쌀한 냉기에 어깨를 좁혔다.
“으, 그래두 여기 왠지 춥다. 지하라 그런가?”
“유물로 만든 포탈에서 분 바람. 아마도 포탈 건너편이 바이츠니아 북부.”
“바이츠니아 북부?! 무지 멀다! 네페르티티가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날 뻔 했네!”
“……엣헴.”
순박한 감탄사에 네페르티티는 으스대며 가슴을 폈다. 그러면서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어서 그만 보고 있던 프랑은 입김을 뱉으며 웃어버렸다.
“바이츠니아 북부면 요정왕국이 있는 거기지? 나중에 가보고 싶다.”
“안내는 맡겨. 나, 요정왕국 유경험자.”
“피. 네페르티티도 한 번밖에 못 가봤으면서.”
“다음에 가면 두 번.”
“후후. 그럼 나도 노르랑 몰래 다녀와야지.”
“……으. 프랑 비겁해.”
“푸흐흐. 알았어, 같이 가자.”
하아─. 입김을 불던 프랑이 중얼거렸다.
“추운 나라랬으니까, 스웨터라도 짜 둬야겠다.”
“스웨터?”
“털실로 짠 옷 말이야. 아, 나르메르-나일에는 없겠구나? 이렇게 있지, 매듭을 잔뜩 지어서 촘촘하게 옷을 만드는 거야.”
프랑이 손가락을 비비며 설명했다.
두꺼운 털실로 짠 옷. 확실히 사막과 태양 뿐인 나라에는 없고,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네페르티티에게는 심히 낯선 옷이었다.
“매듭을 짓는 건 의외로 쉽고 간단하지만, 실이 엉키지 않게 완성하는 건 은근 어려워. 방심하면 잠깐 쉬려고 멈춘 사이에 멋대로 엉키기도 하구.”
“……그런 걸까.”
“응! 원하는 모양을 잊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손에 잡히는 모양만 보면 금방 엇나가서. 그래도 요령을 알고 노력만 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어!”
“응.”
잠시 말이 없던 네페르티티는 불쑥 물었다.
“다른 애들 것까지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갈까.”
“응? 아마 그렇지 않을까?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러면, 나도 도와줄게.”
“네페르티티가?”
프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을 때, 네페르티티는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손이 가는 일, 생각보다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