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처음으로 입을 연 광휘의 정령은, 자신이 만든 용암 웅덩이에 잠기듯 쓰러졌다.
처음으로 입을 연 광휘의 정령이 스스로 형성한 용암 웅덩이에 쓰러졌다.
용암에도 흠집 하나 없던 갑옷이지만, 베로니카에게는 조금 많이 단단한 방패에 불과했다. 광휘의 정령이 창을 떨어트렸다.
“야호♡! 역시 베로니카 언니! 해치우셨네요!!”
“싫은 복선을 깔지 말아줬으면 하는구나. 내가 몸까지 버려가며 뿜은 화염이란 말이다…….”
시중의 글을 즐겨 읽는 베로니카는 질색팔색을 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쓰러진 광휘의 정령은 침묵하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싸움도, 이제 끝이 가깝다.
“드디어 잡았다, 조류성애자 새끼!!”
베로니카의 봉인을 뚫을 만큼 강력한 괴조를 몇 마리나 해치우고 접근한 다나가 외쳤다. 그녀에게 복종하듯 거대 괴조들이 에인헤리의 모습으로 포효했다.
군사전에서 프레이야의 신좌를 웃돌 수는 없다.
조금 전처럼 대량의 졸병을 흩뿌린다면 모를까, 소수정예라면 패배는 필연이다.
“제길, 저 멍청한 것들이!!”
동료들의 패배에 성을 부린 그는 마지막 권능을 자신의 강화에 사용했다. 아멜리아가 산양을 만든 것처럼 육체의 성장이었다.
─채앵!! 다나의 검을 받아친 그의 피부가 새까맣게 뒤덮였다.
“체술도 모르는 년이! 신군의 총혜를 입은 내게 덤벼든 걸 후회하며, 스러져라!!!!”
발퀴리에와 에인헤리를 잠깐이라도 저지하도록 마지막 괴조들을 소환하며, 두루마리 신족은 한층 접근한 다나에게 육편을 뭉친 대검을 휘둘렀다.
증식하고 부풀며 거대해진 대검은 다나의 목에 빨려들듯 들어갔다. 무예의 깨달음을 내려받은 그 참격은 달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상대가 다나가 아니었다면.
“누가 체술을 못한다고?”
─퉁! 휘릭!
대검을 무릎과 발꿈치로 잡고, 발끝으로 쳐내서 흘러넘긴다.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솜씨! 합을 맞춘 무용처럼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움직임에 두루마리 신족의 머리가 새하얘졌을 때, 그의 가슴에 검이 꽂혔다.
“느으윽!!”
그는 포르투나의 권능을 발동했다. 빛의 검이 그 몸을 빠져나갔다.
검이 꽂혔다. 그는 포르투나의 권능을 발동했다.
검이 꽂혔다. 그는 포르투나의 권능을 발동했다.
검이 꽂혔다. 그는 포르투나의 권능을 발동했다.
“무, 뭐?! 어, 어떻게 이런……?!”
빛처럼 날아드는 칼날에 기함하며, 그는 포르투나의 권능을 발동했다.
그리고 검이 꽂히고, 검이 꽂히며, 검이 꽂혔다.
퓨퓨퓨퓨퓨퓨퓨퓨퓻──!!!!!!!
“느아아아아아악──?!”
발동하고, 발동하고, 다시 발동한다.
피하는 것조차 힘든 검에 체력을 물 쓰듯 하며 권능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폭풍처럼 검을 몰아치는 다나의 검속은 달인을 웃도는 것이었다. 피해내도 날개옷의 힘으로 즉시 추격하며, 면면부절 공격이 그치는 순간이 없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 내 비록 무예에는 자질이 부족했을지언정, 신군의 총혜를 나눔받은 내가 이럴 수는 없어!!”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현실을 부정해도, 냉정한 현실은 그의 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엄청난 검술 실력 차이가 낳은 격차지만, 그럴 만도 했다. 다나가 펼치는 검술은 발퀴리에들에게 설치되어 있는 신대의 절기 중 하나!
전임자인 레티티아가 그랬던 것처럼, 신좌에서 끌어낸 힘으로 발퀴리에의 기술을 쓰는 것이었다. 발퀴리에의 설계도 자체가 혼에 잠들어 있는데 못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느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멜리아에 비해, 두루마리 신족의 권능은 치유 에너지마저 흘려넘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연비는 나쁘다. 강한 출력에 수반하는 당연한 비용이었다.
“──커흑?! 꺽!!”
─푸욱!!
끝끝내 체력이 바닥나고 집중력이 감소한 그는 순간적으로 권능의 재사용을 제때 맞추지 못했다. 목 정중앙에 꽂힌 빛의 검이 주문마저 봉쇄했다.
“네, 놈들. 이 멍청한── 언젠가 오늘의 실수를 후회할”
숨을 몰아쉬는 다나에게 그는 뭔가 더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번뜩! 날개의 가속력을 담은 빛의 검은 그의 목을 단호하게 쳐냈다.
“나는 춤이 싫어. 백주대낮의 댄스는 특히 더.”
다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턱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아직 노르랑도 몇 번 춤춰본 적 없다고. 니들 상대로는 다신 사양이야.”
휘이이이…─.
몸과의 연결이 끊어진 머리는 바람에 회전하며 땅에 떨어졌다.
단단한 육질은 부서지지 않고 굴러가선, 바닥에 구속돼서는 눈에 핏발을 세우는 거미 신족의 발에 닿고 나서야 멈췄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땅에서 솟아나는 서른 개의 팔을 거의 베어냈던 그녀였지만, 2개의 팔이 든 창에 배를 꿰여 버렸던 것이다.
계속해서 솟아난 골렘의 팔에 붙잡히고 말았던 건 그때 입은 상처 탓이었다.
바닥에 왼손과 골렘 코어 나이프를 꽂은 프랑은 흐르는 피를 지혈하며 일어났다.
“이걸로 끝이야. 더는 저항할 생각 마.”
목덜미의 상처를 붙잡은 그녀가 골렘의 두꺼운 손에 잡힌 대검을 내밀었다.
“말해. 남은 동료는 어디야?”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말해 줄 것 같아?”
“혀를 깨물진 말아줘. 엘릭서는 몇 병이나 있어.”
“하. 그 포션이 네 무식한 검이랑 창에 심장을 꿰뚫려도 살려낼 수 있나 볼까?”
“……그럼 다른 걸 물을게.”
엘릭서 병을 흔들던 프랑은 단호한 거미 신족의 의지를 보고 질문을 바꿨다.
노르드가 상대를 생포할 수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던 질문으로 말이다.
“──황자 레벨리오는, 지금 어디 있어?”
거미 신족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끼긱!! 로키의 실과 헤니르의 수도가 부딪혔다.
실의 정체가 고대 인류가 만든 마법이라는 것을 눈치챈 듯, 헤니르 새끼가 인상을 썼다.
“너, 로키! 인간의 기술을!”
“그래!! 고깝냐, 망할 오빠!! 인간이 부끄러워?!”
마나의 실로 공간을 제압하며 로키는 성을 냈다.
“우리가 창조한 아이들의 후손이잖아!! 언니가 마음을 주고! 내가 말을 가르치고! 네가 꿈을 꾸게 해 준 아이들의 땀과 눈물의 결과물이라고!!”
“그게 잘못됐던 거다! 자유롭게 꿈을 꾸게 둬선 안 됐어! 혼돈의 화신들에게는 최소한의 화살표가 있어야 했다! 운명을 그르치지 않도록!!!!”
공간을 비틀어서 실을 회피한 헤니르가 수도를 내려쳤다. 붉은 번개를 장전하고 있던 나는 그게 로키에게 닿기 직전에 발사했다.
“칼라드볼그!”
쿠오오오오─!!! 벼락불은 모습 그대로 벼락처럼 꽂혀서 헤니르를 넉백시켰다.
양팔로 벼락불을 막은 헤니르가 가드를 내렸다.
“이 마법…… 수르트의 불꽃의 흉내로군.”
팔을 지진 상처는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풍요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가진 몇십 개의 마법, 기술을 용접한 덕분이었다.
수르트하살법 받아치기를 훈련하면서 〈정화의 벼락불〉의 출력을 다운시켜서 사용할 수도 있게 됐다. 마나통도 커졌기에 연발의 부담도 적다.
─촤륵.
벼락불에 즉석으로 대응하는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지, 바이츠니아 식의 겉옷을 한 꺼풀 더 휘감은 헤니르가 차가운 얼굴로 뇌까렸다.
“로키에게 무슨 짓을 했지?”
“새 마법은 한눈에 알아본 양반이 왜 모르실까. 평소의 깨달음은 어디로 갔대?”
“그녀의 상처는 죽음을 미룰 순 있어도 살려낼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로키를 데리고 뭘 하는가 했더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를 장기말로 쓸 따름인가?”
“쫄리니까 혀가 길어지네. 너 셀프 펠라 되냐?”
“이──”
뭐라고 떠들려던 헤니르는 실이 몰려들자 다시 몸을 날려야만 했다.
“서운한걸, 오빠! 죽어가는 여동생을 위해서 병원비를 벌어오는 정도의 정은 보여줄래?!”
촤아악─!! 풍부한 전투경험으로 몰아치며 헤니르를 압박하는 그녀.
헤니르 새끼가 워프해대지 않는 건 로키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일까. 차원을 감지하고 조작하는 신좌를 잃었다지만, 그 신좌를 만든 것도 그녀니까.
“로키에게 걸린 마법이 뭐냐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헤니르 저 씹새가 우리 베로니카네 할망구의 공격 패턴을 피하는 깨달음 같은 걸 얻기 전에 얼른 달려들어야 했다.
‘탑을 부쉈는데 예지는 없어지지 않았어. 【시재회귀】는 발동 못 한다.’
수르트 급인지는 의문이어도 헤니르는 강적이긴 했다. 하지만 가장 가깝고 위험한 예지는 이 섬이 펑 터지는 경우였기에 2차 예지는 발동 불가다.
그 점이 ‘오히려’ 좋다.
“미래가 안 보여? 번역 노예 시절이랑 똑같네 뭐!”
오늘날까지 몇 번이고 답이 안 나오는 강적에게 맨손으로 이기고 또 이겼던 나다. 이제 와서 회귀 좀 못 한다고 찡찡댈 거면 미스릴도 못 찍었지.
브류나크로 헤니르를 몰아치면서 나는 두 눈을 빛냈다.
세계수에서 추출한 에너지가 부족한 것도, 탑의 파괴도 저 미래를 못 부쉈다.
그 사실은 내게 제일 개좆 같은 가능성─최악의 예상─을 확신시켰다.
최악의 예상인데 왜 눈을 빛냈냐고?
당연히 대비해 뒀으니까지.
“2명이나 찾아와준 것에 감사하지. 어느 쪽이든 목숨만 붙어있으면 충분해.”
방어에 치중한 씹새끼가 권능을 연달아서 발동시켰다. 대충 보이는 것만도 팔레스, 포르투나, 테미스에다가── 포모나인가?
‘생체 폭탄이군.’
7초 뒤의 미래를 짧은 예지로 본 나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로키를 끌어당겼다.
【Gigigigick!!!!】
끼기기기기기기긱…!!!!
공벌레처럼 생긴 폭탄이 부풀며 공기를 찢었다. 지하라서 귀가 먹먹해질 법도 하건만, 내 고막은 이제 철판보다 질긴지 아무 문제 없었다.
“윽……! 시끄러운 주둥이를 좀 닥치나 했더니, 이제는 소음공해야?!”
하지만 로키는 터져나오는 노이즈에 고통스러운 듯 귀를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전투불능이 될 것 같아서겠지만, 그 탓에 전투력은 급감했다.
─투둥!!!
그때를 노리고 접근한 헤니르가 무표정하게 내 정수리에 수도를 내려쳤다.
거기에 깃든 힘은 번영신과 정의신. 필중에다가 방어 무시인가. 씹사기 조합이네. 이게 PVP 되는 게임이었으면 후속 업데이트로 너프 확정이라고.
나는 그 흉험한 공격을 브류나크로 막지 않았다.
“【엘든 링】.”
형광색의 벼락불이 내게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