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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서 제일가는 기쁨은 무엇인가?
그건 당연히 자식의 행복과 성공이다. 누가 뭐라 반박하든지 시로나 네만은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러면 스승으로서 제일가는 기쁨은 무엇인가?
그것도 당연히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었을 때다.
믿는 바가 그러하니, 하나 뿐인 딸이자 제자가 성공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시로나는 딸 다나 베르베이아가 좋은 남편, 인정받는 직업, 멀리 퍼지는 명성을 가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어머니로서 무척 기쁘게도, 그 소원은 이뤄졌다.
그녀의 얕은 상상력을 가볍게 뛰어넘는 결과로.
[……정말로 여기에 다나가 산다고?]
시로나 네만은 평생 브리타니아 한 켠에서 멀리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고향 땅 근처의 도시, 알윈과 도토리 키재기인 휴스로이트는 아직 괜찮았다.
휴스로이트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저택에서 내 딸이 산다는 사실 정도라면, 순수하게 기뻐하면서 가슴 벅차할 수가 있었다.
아틀란티스를 봤을 때도 어떻게든 이해했다.
이 섬을 정화할 때는 폐허나 다름이 없던 고대 유적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유적을 지상에 옮기고 지은 아틀란티스의 온갖 건물들은 성에 비견할 만했다.
움직이는 섬조차 소문을 들었을 때 머리에 물음표가 가득찼던 그녀는, 니다벨리르의 왕실공방의 최정예 드워프들이 사력을 다한 아틀란티스를 본 순간 머리가 띵해지고 말았다.
“마담?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그녀를 데려가던 바이콘, 레이틀링이 돌아보며 질문했다.
“무, 문제? 아니, 문제랄 건 없…… 마담?”
딸의 집에 불려갔다기보단─실제로도 다나가 이 섬에 사는 건 아니지만─ 왕족에게 불려가는 듯한 기분에 시로나는 말을 더듬다가 입을 벌렸다.
마담? 마담이라니?
‘……이런 로브 말고, 좀 더 근사한 옷으로 입고 오는 게 나았을까.’
근사한 옷 같은 건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다나에게 부탁하면 괜찮은 옷을 구해줄까? 별로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얼스터의 알몸 문화가 딸의 평가에 누가 되는 건 싫은 그녀였다.
레이틀링은 친절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예. 다나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혹 몸이 불편하시다면 잠시 쉬시겠습니까? 조금 늦게 도착하셔도 큰 문제는 없을 줄로 압니다.”
“……아니, 마음만 받지. 어서 가자.”
편지 1통에 대륙 몇 개 거리를 댓번에 날아왔던 그녀는 혼란을 떨쳤다.
뭐가 됐든, 못난 어미 밑에서 저토록 훌륭하게 자라준 딸아이다. 그런 딸이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말도 안 되는 마법까지 써서 자신을 부른 거라면 그만큼 중요한 일이겠지.
‘혹시 임신?’
아니, 기대는 섣부르다. 안 좋은 소식일 확률도 있다. 그녀는 지팡이를 굳게 쥐었다.
‘다나가 드물게도 날 의지해주는데, 내가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낙심하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던 시로나는 거주 구획의 어느 연구소에 도착했다.
“어서 와, 엄마! 자! 이리 앉아!”
그리고 도착한 즉시, 다나의 손으로 푹신푹신한 의자에 앉혀졌다.
“펜이랑 잉크는 여기! 남은 종이는 여기! 부족한 게 있으면 여기 얼굴 똑같이 생긴 인형 같은 애들한테 부탁하면 가져다줄 거야! 알겠지?!”
“어? 므, 뭐?”
“그럼 난 갈게!! 집필 잘 부탁해!!”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온 다나는 마치 날개가 달린 것처럼 쏜살같이 사라졌다.
깃털펜을 쥔 시로나는 입을 벌리고 굳어버렸다. 같은 방에서 펜을 놀리던 얼스터 고고학교수 하이로메인이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목레를 했다.
“어서 오세요, 시로나 씨. 또 뵙네요.”
“자, 잔느? 너는 또 왜 여기 있어?”
사제장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말투조차 깜빡하는 시로나. 아틀란티스 해방 이후에 잠시 안면을 튼 적이 있던 하이로메인은 미소로 대답했다.
“저희가 얼굴을 볼만한 일이 몇 개나 있겠어요. 당연히 얼스터 역사학 때문이죠.”
“역사학? 저번에 정리는 끝났잖아?”
“네. 그러니까 이번 출품작은 좀 다를 거에요.”
“추, 출품? 출품작?”
브리타니아 어에는 나름 빠삭하다 생각했는데, 모르는 단어였다.
‘출품. 물건을 내다. 출품작. 출품하는 작품?’
피는 못 속인다고, 다나에게도 물려준 똑똑함이 실내의 흔적을 뒤졌다.
“으어어…… 흐어아아악…… 죽는다…… 이러다 다 죽어…….”
“힘내…… 그래도 우린 퇴근은 하잖아…….”
“임금이 비싼 게 다 이유가 있구나…… 부잣집 사모님이라 후한 줄 알았어…….”
“교대도 많고 업무도 편하길래 좋아했더니…… 일이 생기니까 개빡세네…….”
저번에도 본 적이 있던 다나의 연구원 몇몇과, 처음 보는─아마 새로 고용된─ 연구원들이 글을 써 내려가며 수마와 싸우고 있었다.
다크써클이 거의 없는 걸 보면, 원래는 상당히 편하게 일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 방에 출퇴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잔느. 설명해주겠어?”
“로마니아의 최근 소식은 들으셨나 모르겠네요. 축제 중간에 개최되는 몇몇 이벤트에서 옛 에린의 전설이나 신화를 책으로 출품할 거라고 해요.”
깔끔한 설명이었다.
그 덕에 시로나는 하이로메인도 똑같은 설명을 받았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마침 역사/신앙의 큰 혼란이 생기고, 신대에나 전해지던 로키 신의 종교가 대두되고 있대요. 그래선지 그 로키님의 후손이라는 바이콘 분들이 어떤 의견을 냈는데……”
“……왜곡되거나 실전된 신화를 글로 남긴다?”
방에 장식된 삽화나 역사서를 깨달은 시로나의 대답이었다.
하이로메인은 입가를 가리며 놀랐다.
“어머? 역시 대단하시네요. 정답이에요.”
“그야 너와 내가 저번에 한 것과 비슷하니까.”
황금시대 대전쟁 이후, 인류의 역사는 단절되고 왜곡됐다.
그 사실이 로마니아 황제들의 악행으로 확고한 진실이 된 지금, 고고학계는 아즈테카와 히타이트 문명의 발굴과 함께 일대 붐을 맞이한 것이었다.
“아즈테카는 어쨌든, 히타이트는 원래 로마니아 연구가들의 몫이죠. 단지 저희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게 다나 양…… 아니, 백작 부인의 지론이셨어요.”
“괜찮은 착안점인 듯 싶네.”
시로나는 턱을 매만졌다.
딸의 소식을 들으려던 차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녀도 대충 사정은 알았다.
아무 일도 없을 때, ‘얼스터의 이러이런 부분은 잘못된 사실이다’ 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어줄 리가 없다.
반론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평가와 차별, 인식을 극복하는 건 원래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하지만 지금이라면?
고고학적인 증명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지만, 세간의 인식과 학계의 평가는 별개인 법. 글이나 그림, 동화처럼 접하기 쉬운 매체로 어필한다면?
여기 있는 연구원들은 인기가 없는 자기 전공이 더 부흥할 테니 좋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학자로서의 이력에 한 줄 추가할 업적은 되겠지.
그러면 얼스터 인들에게는?
‘이 축제는 세간의 인식을 바꿀 기회다.’
바이콘들과 손 잡고, 민족의 평가를 바꿔나갈 수 있는 기회!
‘……언젠가 얼스터 인들이 세상에 나오려고 할 때,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차별이나 오해가 벌어지지 않게, 서로가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말이다.
자랑스러운 딸이 바라는 바를 깨닫자 시로나의 가슴 한 켠은 따듯해졌다.
“……일이 그렇게 됐다면,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미소를 되찾은 시로나는 민족의 문화에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에게 말했다.
“사정은 알았다. 다나도 놀고 있는 건 아닌 듯 하고, 기꺼이 돕지.”
“후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기쁘네요.”
“나야말로. 그래, 출품까진 얼마나 남았나?”
아직 세간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지만 납품계약 정도는 알고 있다.
역사를 축약하고, 알기 쉽게 표현해서 그림까지 덧붙이는 작업이다. 문양을 그리는 픽트 인이면서 책을 써 본 그녀였기에 대략 얼개는 잡혔다.
어느 정도 진척은 된 모양이고, 20일 정도일까?
‘아니군. 연구원들이 다급해 하는 걸 보면 절반 정도일지도 모를 일이야.’
분명 축제 중에 발표한다는 얘기였으니, 보름쯤 남았을까?
10일밖에 없다면 그야 짧기는 짧다. 밤샘을 할 수밖에 없겠──
“어, 그러니까. 5일 남았네요.”
“……며칠이라고?”
“5일요. 축제가 이틀 남았거든요. 출품이야 저희 고용주님의 빽이 튼튼하니까 약간 늦어져도 될 듯 한데, 관광객의 귀가 시기나 인쇄를 고려하면 축제 3일째에는 완성해야…… 시로나 씨?”
……아, 이거 말해봤자 안 들리겠네.
넋이 나간 시로나의 표정을 본 하이로메인은 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10분이 지나도 저러고 있으면 정신 차리게 해 주면 되겠지.
‘앨리스는 잘하고 있을까 몰라.’
그녀의 동반자이자 친구…… 인 앨리스는 얼마 없는 유니콘 신족의 생존자다.
바이콘들과 로키 신을 만나고 울면서 감격하던 그녀가 열심히 유니콘 신족의 전승을 뱉고 있을 걸 생각하면, 그녀도 손을 멈출 수야 없지 않은가.
하이로메인은 뺨을 두들기고 레퍼런스를 뒤졌다.
그녀가 역사를 요약하면 그걸 고용된 소설가가 문구를 축약시키고, 다나가 컨펌을 한 뒤에 삽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려주는 과정이다.
세상에 내보일 얼스터 신화의 첫 작품.
능력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완성도로 내보이긴 싫었다.
“……거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시녀 양.”
그때, 정신을 되찾은 시로나가 뒤에 손짓했다.
“지시 대상의 호출을 확인. 본 개체에게 요청사항이 있으십니까?”
하이로메인의 예상보다 7분이나 빠르게 의식을 다잡은 시로나가 부르자, 사무보조 외에 할 일이 없던 발퀴리에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시로나는 편지를 1통 쓰고, 피를 내서는 지장을 찍었다.
“이 편지와 전언을 픽트 인 마을에 보내줬으면 좋겠구나.”
밀봉한 편지를 발퀴리에게 건넨 그녀가 말했다.
“[사제장의 지시다. 손 남는 사제들은 다 모여].”
사제장이랑 사제장의 딸이 고생을 하는데, 사제라는 것들이 놀고 있으면 쓰나.
자로고, 픽트 인은 기쁨도 슬픔도 같이 나누는 민족인 것이다.
“역시 우리 엄마야. 혼자서는 안 죽지.”
편지를 전해받은 다나가 활짝 웃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심복이자 피조물인 발퀴리에만이 묘지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