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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오는 길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늦게 된 이유와 나우넷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마쳤다.
─……수고가 많았어. 이 토지의 신을 대표해서 사과할게.
“아뇨 뭐, 굳이 따지자면 사람이 부른 재앙이었으니까요.”
결국 흑마법사 새끼가 나쁘다. 역시 교수의 변종 생물체답다.
‘만디사가 기력의 조각을 가져갔으니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준 다음 적절한 벌을 받게 하겠지.’
도적단은 알아서 형량을 처리할 것이고, 흑마법사는 100% 목이랑 몸통이 빠빠이 하겠지. 적어도 기억이 되살아나면 처형당할 때 억울하지는 않을 테니 그도 나에게 감사할 것이다.
“우선은 여기, 의뢰하신 전직 유희신입니다.”
─슥. 산송장 같은 로키의 뒷목을 잡고 내밀었다.
사티스는 신혼 부부가 아기 이불을 보는 것처럼 꼼꼼히 살피고 말했다.
─응. 아마 진짜네. 혹시 가짜라면 다시 날 봐야 할 거야, 로키.
“입 다물어. 안 그래도 우울하니까.”
데롱거리는 로키는 세상 다 산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헤니르의 권능 조각을 쥐었다 펴며 개콘이 끝난 일요일 저녁처럼 한숨을 쉬었다.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았지만, 로키가 불행한 게 고소해서 죽겠다는 듯 웃는 사티스였다. 사람, 아니지. 신들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기 싫어서 걍 냅두는 나였다.
─9년, 10년 정도 지나면 로키의 회복이 끝나. 그 이후에는 니플헤임으로 보낼 거고. 아, 죽인단 뜻은 아니니까 착각은 마.
“니플헤임이요? 명계? 저세상? 왜?”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로키는 죽을 상을 유지한 상태로 대신 말했다.
“그 차원은 비유하자면 세계수의 뿌리니까. 저 니플헤임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곳이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현상이지.”
“지옥의 관리자가 된다는 거야?”
말하는 거나 표정을 보면 예상은 했던 것 같다. 로키는 몸서리를 쳤다.
“관리자라기보단 응급처치겠지. 수습하고 나면 지상으로 돌아와서 또 뺑이를 쳐야 할 게 분명해.”
─니플헤임을 통치하던 신들은 생전에 고통받은 망자에게는 평화를 주고, 죄를 저지른 망자에게는 벌을 내렸었어. 신이 여럿 있었으니 상벌이 많이 제각각이었긴 했지만.
옛날 얘기를 하듯 말하는 사티스.
기독교적 천국과 지옥은 아니어도 죽은 이후에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는 걸까.
“생명들에게 주어진 2번째 인생이면서, 마지막 기회지. 근데 그런 사후세계를 성립시킨 건 이젠 없는 명계의 신들의 권능이거든? 내가 몸만 가도 말라붙은 차원을 고쳐놓는 정도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내가 내려놓은 로키는 바닥에 누웠다. 이별하는 장면을 기다리며 감정을 조절할 준비를 하던 베로니카랑 라리루라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석상의 크기 탓에 거대해진 사티스가 말했다.
─할 수 있는 게 없긴 왜 없어? 얼마나 많은데. 네 딸인 헬(Hel)이──
“내 자식은 슬레이프니르 뿐인데.”
─……실언이었네. ‘황색의 왕’의 딸, 옛 지배자 헬이 망쳐놓은 니플헤임을 회복시킬 수만 있어도 세계수의 차원막은 자연적인 회복세에 들어서.
니플헤임이 세계수의 차원막, 그러니까 코즈믹 다족류 씹새끼들을 막아주는 자기장 같은 역할을 한다는 얘기는 저번에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니플헤임이랑 무슨 상관이지?’
나는 질문을 하기 어려운 아내님들을 대신해서 손을 들었다.
“왜 니플헤임의 회복이 세계수 전체의 회복으로 이어집니까?”
─위치관계로 보면 저곳이 세계수의 뿌리니까.
“뿌리요? 저 척박한 니플헤임이 말입니까?”
─척박했어야 해. 세계수는 이미르의 시체니까. 뿌리가 박힌 곳이 비옥하면 점점 양분을 흡수해서 언젠가 이미르가 부활할지도 모른다고 본 거야.
그렇군. 이미르는 양파 같은 새끼구나.
세계수는 물에만 담가놔도 쑥쑥 자라는가 보다.
“그래서 니플헤임을 척박하게 만든 겁니까?”
“그래서라기보단,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였어. 만들다 보니 척박해질 수밖에 없어서, ‘차라리 이 상태로 유지하는 게 가성비랑 위험 예방 차원에서 좋지 않나?’ 하는 얘기가 됐…… 던가? 너무 옛날 일이라 가물가물하네.”
창세신이면서 태초신이신 로 할매의 사족이었다.
땅을 내려다보는 사티스. 마치 그렇게 하면 저 아래의 니플헤임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사냥의 신이니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렇게까지 척박해지는 건 창세신들의 예상 밖이었다고 해. 그러니까 니플헤임의 회복이 최우선이야. 뿌리가 썩은 나무를 치료할 순 없고.
“그리고 그걸 나한테 짬 던지시겠다?”
─흥. 죽은 인간 아이들에게도 편안하게 소멸할 자격은 있어. 창세의 권능으로 명계를 좀 고쳐둬. 알아서 병사든 뭐든 길러서 산 자가 왔다갔다 못 하게 막아두고.
앞의 말은 우리는 물론이고 로키도 흘려들었다.
에퀴녹스와 그 애비 사건은 우리보다 사티스가 더 깊고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니까. 나는 어두운 얘기를 빨리 끝내고자 화제를 바꿨다.
“지금 말씀하셔도 로키는 잊어버릴 게 뻔하니 10년 뒤에 말씀 나누시는 게 낫겠습니다. 저희가 또 도와드려야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없어. 이제 이 녀석의 혼을 빼서 우리가 있는 곳에 최대한 가깝게 끌어당길 거야. 그리고 치료를 마치면 적당한 장소에 안치할 거고.
“적당한 장소? 그게 어디죠?”
─아직 미정이야. 수술 자체도 몇 년이 걸릴지 불분명하니까.
존나 시발 그건 몰랐네. 회복기간이 10년이라고 생각했더니 수술도 몇 달에 걸치는 거였냐고.
저렇게 말해놓고 ‘생각보다 짧지?’ 라는 눈치인 게, 시간 감각의 차이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좆프 느그들도 여기서는 그냥 하루살이야 씹년들아.
“불안해 죽겠네. 믿고 맡길 녀석이 없어서 저런 모질이들한테 내 영혼을 맡겨야 한다니.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런 불평을 끝으로 더 궁시렁거리지 않기로 한 걸까. 삐딱한 자세기는 해도 로키는 허리에 손을 얹고 사티스에게 정색하고 질문했다.
“내 영혼을 추출하는 거면, 내가 빌린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겠지.”
재가 되거나 한다는 거다. 대답을 들은 로키는 내게 눈짓했다.
“……울프헤딘, 있잖아.”
“무덤이라면 고르갈리아에 만들어둘게.”
시대는 변했어도 크라운 크라운의 고향이니까.
“……그것도 예언이니?”
“늙은이 마음을 알아주는 유교맨의 예상이지.”
로키는 뺨을 긁으며 멋쩍어했다.
“……크라운은 붉은 장미를 좋아했었어. 헌화는 처음 한 번 정도면 돼. 다음번은 내가 스스로 할 테니까. 꾹 참고 흘려보낸다면 고작 10년이고.”
“로키님. 그런 일이라면 저희 바이콘들에게──”
“제발 그만둬 주지 않으련? 무슨 100년 넘도록 유지될 왕릉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알았지?”
“……네엥.”
그렇게 못 박는 게 어딨냐. 우리 여신님 울겠다.
하지만 나도 100% 동의한다. 노르드 박물관의 완공이 가까워질수록 꿈에 악몽이 나올 것 같다. 아방궁 스트랏슈를 갈기는 나우디즈 쿤의 악몽이.
“지금의 고르갈리아 중부 셀지카야. 공동묘지에 안치해 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키는 사티스에게 발을 옮겼다. 무심코 한 걸음 따라간 라리루라가 손을 뻗었다가 당겼다. 그녀는 힘을 내서 밝게 웃었다.
“……아핫♡ 또 뵐 수 있겠죠?”
“그럼 헤어지게? 나 섭섭해진다? 그보다 나는 10년 뒤에 너희들이 애를 몇 명이나 데리고 있을지가 걱정될 지경이야.”
깔깔거린 로키가 발치부터 사라져갔다. 크라운 크라운의 육신이 신의 영혼과 떨어지자 지금까지 견뎌왔던 세월의 풍파를 맞아가는 것 같았다.
─샥!
미워하기 힘든 신은 삿대질하며 윙크를 날렸다.
“또 만나자. 감히 예언하건대, 재회까지 금방일 거야♡”
휘이이이─!
로키의 영혼이 하늘로 솟고 나자 회색의 가루가 남았다. 가루는 회전하면서 작은 항아리에 담겨선 베로니카의 품 안에 떨어졌다. 사티스가 한 일인 듯 했다.
프랑이 코를 훌쩍이는 라리루라의 등을 문질러 주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아직 움직이는 석상 사티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말씀은 좀 그런데, 안 가십니까?”
─네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눈치길래.
“……눈썰미가 대단하신데요.”
─그게 사냥의 여신에게 할 칭찬이니?
팩트였다. 이세계인 말빨──!! 너무 강하닷──!!
“별 건 아닌…… 별 게 아닌 게 아니지. 네. 꽤 별일인데요.”
─……너만 한 인간이 말을 그렇게나 이상하게 할 정도의 일이야?
칭찬인지 욕인지 하나만 해라. 나는 그냥 따로 고민하지 않고 속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부연설명도 하게 될 텐데.
“그게, 제가 이세상에 오게 된 게 ‘심해의 군주’ 때문인 거 같거든요?”
─……누구라고?
내가 이세계랜드에서 오고 온갖 냉기나 추위와 맞서 싸워봤지만, 이때만큼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마누라들한텐 미리 말해두길 다행이었지.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