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까마귀는 또 뭐냐, 아우야?】
궁니르는 알아본 토르도 브류나크를 알아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야 당연한가. 나는 술병을 내려놓고 그 녀석을 불러다가 일단 무릎에 앉혔다. 내버려두면 자꾸 궁니르한테 날을 세워대니 별 수 있나.
【내 묠니르 겸 궁니르다 왜, 형님아.】
【귀엽고만. 욘석아, 이리 와서 앉아봐라! 내가 술 한 잔 따라주마!】
【이 똘게이 새끼가 두 살도 안 된 애한테 무슨 술을 맥인다고 염병이야?】
왜 시발 명절의 술자리 같은 느낌이 들지. 내가 앉은 자세에서 토르 가슴팍에 카포에라-택권도의 혼종 킥을 펼치자 그놈은 억 소리를 내며 누웠다.
【끄윽…… 거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술도 다 엎어졌잖냐.】
【니가 따라서 마시렴. 잠깐 어울려줬지만 계속 좆 같이 굴면 국물도 없단다, 뒤지다 만 놈아.】
내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자 토르는 피식 웃었다.
【틀렸다, 오딘의 후계자. 나는 뒤지다 만 놈이 아니라, 정말로 죽은 신이지.】
【……술 엎질렀다고 우울해졌냐? 왜 뜬금없이 정색인데?】
【들어라, 후계자. 네 정체가 오딘이 오딘이었을 적에 준비하던 후세대를 위한 안배라면, 비록 그 실체를 듣지 못했더라도 나 역시 오딘의 붕우(朋友)로서 너를 대하마.】
두껍고 굳은살 많은 손이 술잔을 내 손에 잡게 하고 술을 따랐다.
【내 신좌엔 후계자가 정해져 있었다. 내 아들, 마그니였지. 너랑 방금 웃고 떠들던 대로 과거에 내가 품었던 거인족 여인과의 아이였다.】
【……너 본처는 따로 있지 않았냐?】
【공정한 평가의 결과였다. 아내들에게 순번을 매기고, 태어난 아이의 자질마저 그 순위에 맞춰 존중하거나 무시한다? 그럼 사내로서 많은 여인을 품는 이유가 순간순간의 색욕 외에 달리 있겠나.】
흘리다 남은 술을 버리고 새 잔을 따른 토르가 나랑 잔을 부딪쳤다.
【여인을 부족함 없이 사랑하는 만큼, 그녀들이 낳은 자식도 공평하게 사랑해야지. 그게 몸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남근 수보다 많은 아내를 들인 남자의 도리다.】
【……말투가 지나칠 정도로 씹마초시네. 내용 자체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죽이 맞는군 그래. 30억 년만 일찍 태어나지 그랬냐.】
─짠! 피처 잔이 상쾌한 소리를 냈다.
번갯불 주제에 유리잔을 태우지도 않는다. 저기 보이는 육신이 진짜 번개가 아니기 때문일까? 이 공간이 꿈이어서일 수도 있다.
완벽한 의식과 모습을 신좌에 남기기엔 생전이 토르가 마법의 달인이 아니었을 것이니까.
오히려 마법에 연이 없는 이 새끼가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자신의 자의식을 남긴 게 더 신기하다.
생전에 가진 정신력과 강함이 그만큼 특출났던 것이겠지.
무기는 무기일 뿐이다.
궁니르가 없어도 오딘이 무궁무진한 지혜로 저 만신의 위에 군림하던 주신이었듯, 망치가 없어도 토르는 오딘에 버금가는 신 중의 신인 것이었다.
─꿀꺽! 2000cc짜리 피처 잔을 순식간에 마신 토르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니가 만난 내 계승자들은 죄다 약골이었던 거다.】
【니가 힘을 빌려주지 않아서?】
【묠니르는 내 무기다. 아주 잘 만들어진, 하늘 아래 달리 비견할 무기가 없는 최고의 망치. 하지만 무기를 손에 넣었다고 그자가 진정한 의미로 강해지는가? 그건 술에 꼴아떨어진 촌부나 할 법한 생각이지.】
나도 무예의 달인이기에 그 말뜻은 이해했다.
총을 가진다고 다 특수부대원이 되면 아메리칸 강도단이 병신처럼 의자에 처맞다가 투옥 당하는 일은 없겠지.
【신좌를 내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우려했다. 정녕 내 안목은 맞을까? 그 애가 보여주던 자질이 훗날에도 계속될까?】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의 마음이로군.】
【쳐 웃지 마라. 복잡한 일이라고. 모든 자식은 언젠가 어른이 된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아이들의 부모여야 한단 말이다. 너도 자식을 낳으면 알게 될 고민이야.】
혀를 찬 토르가 손짓했다. 나는 맥주를 아주 술통 째로 만들어냈다.
─콰직! 뚜껑을 뜯어낸 토르가 거기에 유리잔을 담궜다가 꺼냈다.
【그래서 나는 우르 놈의 도움을 받아서 신좌를 만들어낼 때, 한 가지 제한을 걸었다. 묠니르라면 줘도 좋다. 내 신좌를 묠니르를 보관하는 상자로 쓰면 그만이니. 허나.】
【네 진짜 힘은 눈에 차지 않는 놈한테는 줄 수 없다?】
【역시 예언자였군. 권능이 아니라 느낌이 무척 비슷해.】
안주도 없이 술독을 순식간에 비우던 토르가 내 쪽에 눈짓을 했다.
나는 들고 있던 술을 들이키고 또 하나 술통을 만들어냈다. 뚜껑을 부수고 아예 내 덩치보다 큰 술통을 들이붓듯이 마셨다.
놀랍게도 취기가 살짝 올라왔다. 하긴, 미래에선 죽고 죽이는 싸움도 했는데 술기운 정도야.
【생전의 내가 휘두르던 묠니르는 세 개가 모여야만 하나다. 망치와 수갑(手甲), 그리고 허리띠.】
그제야 웃은 토르가 술통을 싹 비웠다.
【힘의 허리띠(Megingjörð). 룬 문자들로 내가 구상하고 만든 유일무이한 권능이지. 벼락을 조종하는 힘을 주고 착용자의 힘을 강화한다.】
【흐음. 그 허리띠는 어디 있길래?】
【네 눈앞에.】
금빛 번갯불은 여전히 천둥이 치듯이 말했다.
【내가 바로 ‘힘의 허리띠(Megingjörð)’다.】
그놈의 손목에서 룬 문자가 회전했다.
떠오르는 건 토르의 〈인신〉이 쓰던 마법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이긴 한데, 자기 신체능력을 꽤나 높이는 룬 허리띠 마법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마법은 오딘이 만든 권능의 하위호환 스킬.
그렇다면 그 마법은 십중팔구 시구르드가 만든 토르의 권능, 그 마이너 카피였던 게 아닐까.
나는 술통을 들이키며 말했다. 솔직히 이 미친 토르 새끼의 주량은 강함과 별개인 것 같다. 나도 독을 분해하는 느낌으로 간을 일깨우지 않았다간 끔뻑 취하겠다.
【지금 내 눈앞에서 술을 비워가면서 나불대고 있는 건 누군데?】
【이 권능에 깃든 토르의 의념, 토르의 의지다. 처음부터 말했잖나? 내가 토르라고. 권능과 의지 모두 여기 모였으니 이 시대에서 토르를 칭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파지직! 쿠르릉─! 황금색 룬 허리띠에서 천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내 신으로서의 강함, 권능은 묠니르가 아니라 이 허리띠에 있다. 묠니르는 요툰들이 내 권능을 따라하기 시작해서 귀찮아졌을 무렵에 받은 선물이었고.】
【……이걸 쓰면 묠니르의 효과도 더 쎄지냐?】
【묠니르는 주인의 강함에 비례한 힘을 갖는다. 궁니르도 마찬가지고. 굳이 동시에 다룰 건 없다. 일부러 신좌에서 떼어냈다면 내 망치는 다른 녀석한테 줄 생각인 거잖아?】
【새끼,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도네. 그래, 얘기가 잠깐 나왔던 내 하프 드워프 아내님한테 줄 거다. 불만 있으면 말해.】
【아내? 하프 드워프라…… 이름은?】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
【에이트리넨. 녀석의 자손인가. 그럼 됐어.】
─꺼억. 트림한 토르의 의념은 손을 저었다.
【거 얄궂은 일이로구만 그래. 의지만 남아서도 운명이란 건 신과 떨어지지 않는 법인가. 그래도 가끔은 그 운명의 흐름이 썩 나쁘지는 않은 듯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야.】
【뭔데 또?】
【에이트리는 묠니르를 만든 장인의 이름이다. 자신들이 가장 존엄하다고 외치던 무렵의, 별빛을 쫓으며 어느 때보다 빛에 굶주렸던 시대의 드워프 장인이지.】
【……허.】
【운명의 흐름이란 성가실 정도로 모든 존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묶는 밧줄이다. 단지, 추락하는 자들에게 허리를 묶는 굳건한 밧줄만큼 든든한 것도 없지.】
─툭. 토르는 내 무릎 앞에 【힘의 허리띠】를 던져두었다.
【가져가라. 내가 일어났다는 건 생전의 토르가 생각하기에 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치고받아 보니 나도 그 평가에 동의하고 싶어졌고.】
그가 일어났다. 나는 허리띠를 주우며 일어났다.
【가는 거냐?】
【쉬는 거지. 산 자도 죽은 자도 잠들 자격쯤은 있잖냐.】
손을 흔들면서 금빛 번갯불은 걸어나갔다. 멀리 떨어질수록 그의 모습에서는 번갯불이 사라지고, 내가 본 적 있는 그 금발의 남신으로 변해갔다.
【궁니르는 네 무기에 합쳐둬라. 애초에 의지를 가진 무기가 아냐. 너는 오딘의 후계자라면 놈도 그걸 받아들일 테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토르는 손을 내저었다.
【술 잘 마셨다. 내가 지킨 미래의 맥주도 나름 괜찮군.】
파지지직, 파스스스……. 번갯불이 소멸했다.
마초이즘에 절여진 뇌신은 사라졌다.
나 이후에 신좌의 후계자가 다시 나타나면, 그 인물 앞에도 다시 모습을 드러낼까? 아니면 이제 더는 누군가의 앞에 나타날 일 없이 소멸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저들이 지킨 미래를, 이제부터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
“개껌이지, 씌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건의 크기는 달라도,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다들 자기 세상을 지키면서 싸워가는 법이니까.
허리띠를 감고 흡수했다. 검은 우신 가죽 갑옷 허리춤에 금빛 번갯불로 타오르는 룬 문자들이 한 바퀴 회전하며 은은한 뇌광을 흩뿌렸다.
까드드득…!!
손아귀에 힘을 주자, 신들을 상대로도 한 손에 꼽히던 내 힘이, 이제 누구와도 비교할 게 못 될 정도로 강대해졌다는 실감을 악력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타박.
그렇게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 문득 내 왼편을 고깔모자를 쓴 외눈의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자 흰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궁니르는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나는 까마귀를 보며 가만히 떨리더니, 가루처럼 흩어져서 얌전히 호버링을 하던 브류나크에게 흡수되었다.
흰색의 가루가 흡수됐는데도 브류나크는 미스릴 창날과 검은색 장대의 색이 더 짙어졌다. 혼자서 세상과 격리된 듯 채도가 다르다.
“삐엑? 뺘아아…?”
존재감이 한층 남달라진 브류나크를 보며 나는 룬 문자로 된 허리띠에 손가락을 끼웠다.
“나도 더는 어디 가서 금수저 욕은 못 하겠군.”
허리띠는 내 허리에 딱 맞았다.
마치 제 주인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