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1007화 (1,006/1,009)

***

“노르는 좀 어때?”

영국, 캠브리지(Cambridge).

이곳에서 살아가던 아셰라드 학회장의 친아들, 크리스토프의 도움으로 작은 집을 빌린 그녀들은 어색한 이세계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았다.

티르시는 한숨을 참는 얼굴로 의자에 쓰러졌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셨어요.”

“몸 상태는요? 기억은 돌아오나요?”

초조하게 묻는 라리루라를 달래듯 네페르티티가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베로니카는 안심하라는 것처럼 가슴을 쳤다.

“그래, 돌아온다. 가망은 충분히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느니라.”

“진짜지? 혹시라도 우릴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한 건 아니고?”

되묻는 다나의 말은 약간 신경질적이거나 기분 나쁘게 들릴 만했지만, 베로니카는 그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얼굴을 보고 마음이 상해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았다. 다나의 기분을 십분 이해해서였다.

몇 시간 전까지, 그러니까 노르드의 몸 상태를 살펴보기 전 베로니카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기억 상실은 치명적인 수준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의 기억을 보관하는 부위가 파괴됐다면 과연 가망이 옅었겠지만, 주인님의 경우는 일종의 봉인 상태였느니라.”

“봉인?”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요.”

같이 몸을 살펴보고 온 티르시가 말을 받았다.

치유사이기는 했지만 마법적인 지식은 그녀들만 못했기에 별 수 없이 초조하게 손톱만 뜯고 있던 다나는 바로 고개를 티르시 방향으로 돌렸다.

“전에도 있었다고? 언제?”

“그,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곤 했는데요. 그때는 신체 일부에 약간 부진이 있던 정도였어요. 단지, 증세는 비슷해요. 몸에 충만한 어둠과 음의 마나. 즉, ‘심해의 군주’의 영향이죠.”

티르시는 한때 노르드가 비슷한 케이스로 발기 부전에 걸렸었다는 사실은 가능한 한 간추리면서, 추궁받기 전에 어서 결론을 입에 담기로 했다.

“책에 먹물을 뿌린 것에 가까운 상태에요. 오염 정도는…… 심각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진 가지 않았죠. 객관적으로 봐도 이상할 정도로요.”

‘심해의 군주’가 지식에 오염 현상을 일으킨 건 전례가 많다.

옛 지배자들에 관한 지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광기로 내몬다. 그중에서도 ‘심해의 군주’는 오딘의 이름을 빼앗은 것만으로도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다.

룬 문자를 오염시키거나, 에린에서 사용되었던 야수회귀의 주술을 변이의 저주로 물들일 정도의 존재력을 가진 옛 지배자였던 것이다.

아직도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서 프랑이 질문했다.

“이상할 정도라는 건……?”

“……기억을 앨범에 비유하자면, 먹물이 담궜다 꺼낸 수준이에요. 만약 ‘심해의 군주’에게 악의나 남은 힘이 있었다면 더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났을 만큼요.”

“하지만 영혼에는 치료를 받은 흔적도 있었다. 주인님이 스스로 치료했을 턱이 없겠지. 그랬다면 저렇게 남의 마나로 오염돼 있지는 않을 터.”

“그, 그럼 저 괴물 문어가 선배를 치료해줬다는 건가요?”

“결과만 보자면. 그 선이 가장 합리적이겠구나.”

그녀들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지만, 어렵사리 결론을 유추해냈다.

마지막 싸움에서 ‘심해의 군주’는 그녀들이 끼어드는 것을 저지하며 노르드의 추억에서 자신 외의 모든 기억을 오염시키려고 했었다.

맞서던 프랑과 노르드도 승산은 높지 않았고.

프랑은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펼쳐진 최후의 일격은 나를 죽일 수 있었어.’

프랑은 자신이 ‘심해의 군주’에게 죽더라도 노르드가 기억을 잃지 않고 살아돌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노르드는 그녀를 지키며 예상 밖의 한 수를 더 뒀다. 그렇게 ‘심해의 군주’와 동귀어진한 듯 했다가, 어느샌가 공간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소멸하던 소우주에서 탈출한 내가 다시 노르를 찾아냈을 때는 상처가 고쳐진 뒤였구.’

일의 전말이 보였다.

“……삐에.”

네페르티티에게 안겨서 구슬프게 우는 브류나크.

저 아이가 전해준 말을 들어보면── 분명 노르드는 영혼이 소멸하며 죽어가려는 찰나, 그와 연결되었던 ‘심해의 군주’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리라.

“……내가 본 ‘심해의 군주’라면 노르 자식이랑 동반자살이라도 했을 기세였는데. 의외라고 하면 조금 이상하려나?”

“아냐. 이해해. 나는 수녀 엄마랑 같은 생각.”

“저도 마찬가지에요, 언니.”

각자 표현은 달라도 다나의 의견에는 대다수가 공감했다.

맞부딪친 건 찰나일 뿐이었지만, 그녀들이 봤던 광기에 물든 애정은 그랬다. 손에 넣을 수 없으니 부숴버렸다고 해도 당연히 그랬겠거니 할 터였다.

“……아냐. 분명,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을 거야.”

프랑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니라고?”

“무슨 소리에요, 프랑?”

“그치만, 그렇잖아.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죽길 바란다니.”

프랑은 어째서인지 ‘심해의 군주’의 마음을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런 건, 절대로 사랑이 아닌걸.”

‘심해의 군주’는 노르드 울프헤딘을 사랑했다.

그 점만은 분명했으니까.

노르드는 ‘심해의 군주’의 목숨을 받아갔고, 그 대신 자신이 죽인 그녀에게 그의 목숨을 내줬다.

그래서 ‘심해의 군주’는, 노르드에게 받은 그의 목숨── 예기치 않게 파괴하고 말았던 노르드의 영혼 조각을 긁어모아 끝까지 지키고 있었으리라.

자신이 소멸하는 순간에도, 남은 마나를 모아서 영혼을 지켰다.

그 흔적이 노르드의 영혼에 남은 그녀의 마나다.

그래도 그 헌신이 노르드의 기억 상실로 이어졌다면, 최후의 최후까지 ‘심해의 군주’와 노르드는 맞물릴래야 맞물릴 수가 없는 관계였던 셈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들은 싸워야만 할 관계였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노르드가 영멸에 빠지는 과정에서 ‘심해의 군주’에 대해서 떠올리지 못했다면.

비록 이해는 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포용심마저 갖추지 않았다면.

아마 노르드는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심해의 군주’가 주워 모은 혼이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니, 결과적으로 노르드는 그 후에 프랑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 것이다.

노르드의 자비는 ‘심해의 군주’만이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구원했다.

그러니, 프란체스카 에이트리넨도 그렇게 하자.

‘이제 없는 사람을 계속 원망할 필요는 없는걸.’

죽은 자를 추억하는 건 산 자의 책임이며 특권 아닌가.

이미 없는 상대에게까지 원망을 이어간다면, 그 무의미한 증오와 분노는 자신의 정신만 더럽히고 말 것이었다.

죽은 자의 잘못을 용서하는 강함.

과거의 응어리를 틀어내고 미래를 보는 의지.

그런 강함은 자신을 위한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커흠. 베로니카가 분위기를 바꾸고자 기침을 했다.

“……그러나, ‘심해의 군주’가 무슨 생각이었건 그자의 마나가 주인님의 기억을 봉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치료는 필수니라.”

“방법은 있어? 싸울 때는 우리를 즉각 알아보지 않았냐?”

“앗! 어둠과 음의 마나잖아요? 브류나크가 팟! 하고 휘어잡고 컨트롤하면 어떨까요?!”

“뺘앗……”

“……양이 너무 짙고, 많아서 어렵대.”

네페르티티는 브류나크와 대화가 통하게 해주는 풍요신의 성유물 장갑을 끼고 그녀를 쓰다듬었다.

“성냥 한 개비로도 광활한 숲이 전소하는 일은 있다. 의지, 계기만 있다면 주인님이 우리를 즉시 알아봤던 것처럼 오염을 일으키는 원인을 지배할 수 있겠지.”

“흐에……. 그치만 저희 얼굴을 보셔도 뉘시죠 하는 상태잖아요? 뭔가 선배가 정신이 확 들도록 하는 법 없을까요?”

“난교. 7P.”

브류나크의 귀를 막은 네페르티티는─까마귀의 귀는 깃털로 가려져 있지만, 머리 좌우에 있다─ 농담 삼아서 말했지만, 베로니카는 진지했다.

“그것도 고려할 방법이로구나.”

“……정말로?”

“정말 정말로.”

정색하며 되받아친 베로니카가 마저 말했다.

“여러 군데 시도해 보자꾸나. 다나야. 너도 뭔가 생각 없느냐?”

그래도 아내들 중에는 가장 오래 노르드와 알고 지낸 다나다.

말하기 전부터 고민 중이던 그녀는 턱을 쓰다듬다가, 이세계의 실내장식처럼 빛나는 천장 전구를 발견하고 말했다.

“……뭐, 없지는 않네.”

***

영국 음식은 뒤지게 맛이 없다.

“니미.”

어떻게 식빵도 맛이 없을 수가 있냐. 나는 잼을 쳐바른 식빵을 대충 침대 옆 선반에 던져뒀다.

혹시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속이 막혀서 그런 걸지도.

“내가 기억 상실에 걸린 이세계 전이물 주인공, 노르드 폰 울프헤딘이라.”

그리고 지구에는 이세계의 존재를 아는 음지의 비밀 결사 같은 게 있고?

“프리메이슨이 실존했다니. 음모론자 여러분은 대체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해 오신 겁니까……”

진짜 세계정복을 꿈꾸는 비밀결사는 아니라지만 쇼킹한 일이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노르, 일어나 있어?”

“아, 옙…… 이 아니고, 어, 어어. 깨 있어.”

존댓말은 생략. 존댓말은 생략.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존댓말을 하면 세상이 전부 무너진 것처럼 구니까 어쩔 수 있나.

─철컥.

믿기 힘든 현실을 되뇌고 있으려니까 존나 시발 인형 같은 미녀들이 방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날 보며 어색하지만 예쁘장한 웃음을 지었다.

“쉬는데 방해했어?”

“그렇진 않고. 이제 마음 정리가 좀 됐거든. 다 몰카면 어쩌나 했는데, 이만큼 개쩌는 몰카라면야 믿어주고 싶더라.”

나는 캔처럼 찌그러진 나이프를 집으며 말했다.

빵에 잼을 바르던 나이프인데, 내가 힘 조절을 못 해서 구겨놓은 참에 한 번 제대로 힘을 써 본 것이었다. 한 2%쯤 썼나 싶은데 이렇게 구겨졌다.

‘이것뿐이면 아직은 영화촬영 용품이라는 선을 의심했겠는데……’

낯선 아내들을 보면서 배를 문질렀다.

휘오오오오오─!

그러자 내면에서 느껴지는 어떤 거대한 에너지!

이것까지 위장하려면 약물 같은 걸 사용해야 할 건데, 그런 비인륜적인 몰카를 찍을 리 있겠는가. 게다가 이 힘은 내가 쌓은 거라는 확실한 실감도 들었고.

‘아직 사용 방법은 모르겠지만, 뭐 어때.’

단지 궁금한 건, 내 힘에 버금가게 거대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힘도 뱃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일까.

훈련소를 막 벗어난 금딸 상태의 탱탱부랄처럼 농후한 응어리다. 만 년 동안 응어리진 정력인가.

하얀 머리의 마법사 씨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희 얘기를 믿어주셨군요. 천만다행이에요.”

“예, 뭐. 하하하. 하하하하.”

그야 믿고말고.

무인도에서 깨어나 보니 기억 상실에 걸린 저를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미녀가 6명이나 생겼습니다? 이게 그 라노벨인가 뭔가 하는 그거구마잉.

예전에 사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코인이 눈을 깜빡였다가 뜨니 아파트 단지가 돼서 돌아온 기분.

내 아내라길래 어안이 벙벙해져서 ‘뎃? 이 중에 누구요?’ 하고 물었더니 6명 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더라. 듣는 내가 다 빈익빈 부익부 소리가 나오네.

‘강북호 너 이 새끼…… 잘 했어!’

기억 상실? 오히려 좋아.

‘아니, 진짜 좋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 기쁨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초가 무거워서 빤쓰를 들춰봤을 때 이상이라 할 수 있겠다. 모르고 변기에 앉았으면 잉글리쉬 변기 물에 쥬지가 반신욕을 했을 크기더라.

남자가 고간에 흑산도 지렁이가 뀽? 하고 있는 것보다 기쁘게 느낄 일이라니? 기억을 잃기 전의 강북호 이 새끼는 대체 뭘 하고 다닌 것일까.

처음 보는 아내들이 내가 기억을 되찾길 바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야 나도 기억이 돌아와서 나쁠 건 없긴 하지.’

판타지 소설처럼 전생의 연인들이 찾아와 갖고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주세욧!!’ 하는 거라면 사양하겠지만, 내 기억이라면 되살려서 나쁠 건 없다.

빙의물 전생물처럼 ‘원래 몸뚱이 주인의 자아랑 기억이요? 응~ 알 바 아냐~ 없어져도 돼~’ 하는 건 아닌 듯 했으니까.

왜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냐고?

키이잉…!

내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씨빨.

‘주식 다 뒤졌따. K-워렌 버핏 나가신다.’

아직 사정을 전부 전해 들은 건 아니지만, 내가 주식시장에서 천하패도의 길을 걸어도 아무 불만 없을지어다. 크헤헤.

그렇게 내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옹기종기 모여서 뭐해? 울프헤딘 치료 중이야?”

쏴악─!!

귀엽게 생긴 잼민이(♀)가 미녀들의 다리 사이를 슬라이딩으로 빠져나왔다. 아이돌처럼 머리 색이 핑크인 여자애가 화들짝 놀라서는 외쳤다.

“로키 님!”

“으히히! 놀랐니? 상황파악이 끝나서 와 봤어!”

“나도 있다.”

또 또 뒤에서 자칭 여신님이 등장.

이름이 뭐였더라. 아티스?

여아용도 있을 것 같은 이름이군.

그 여신님들은 무슨 마술사 연맹의 협회원인가 연맹원인가 하는 크리스토프 씨를 데리고 와서는 이 좁은 방에 기웃댔다.

“저기, 여신님들……? 저는 왜……”

“【중간 가지】와 신세계를 두루두루 아는 자가 너 외에 달리 있나?”

“……있긴 한데, 여기 불러오진 못하겠군요. 예.”

바로 굴복하는 크리스토프. 중간 관리자쯤 되나 보다.

사람에 따라 말투가 샥샥 바뀌는 아티스 씨는 날 보며 말했다.

“한창 정신없을 테니 본론만 전할게. 이번 싸움으로 차원막에 손상이 더 커졌어. 쉽게 말하자면 길어도 아흐레 전에 복귀해야 할 정도로.”

“복귀요?”

“【중간 가지】로 말이야.”

【중간 가지】.

미드가르드── 즉, 이세계 얘기였다.

아직 낯선 아내들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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