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41 일곱 장군(1) (41/89)



〈 41화 〉41 일곱 장군(1)

"페올, 좋은 아침이야."
"…보통 이즈음은 아침이라 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헬렐은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그녀와 똑같은 모습의 여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굴지 말고 푹 쉬자고."
"당신이 너무 해이한 겁니다, 헬렐."

난쟁이의 일원인 페올은 영 딱딱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헬렐은 그녀가 썩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뭐, 싫다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헬렐은 그녀와 동거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은 백설이 소환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 백설이 부점 길드에 붙잡히면서 헬렐을 포함한 난쟁이들 역시 덩달아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백설은 그녀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이 가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헬렐은 지금의 생활에크게 불만이 없었다.

감시도 붙어서 함부로 방에서 나갈 수 없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지만…  방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방이 아닐까 헬렐은 추측했다.

사실 일곱 명을 전부 몰아넣지 않았다는 점만 해도 충분히 호평을  만 했다.

대체 어떤 양반이 이런 포로 대우를 해준단 말인가.

"식사는?"
"저기 놔뒀어요."

방구석에 있는 책상 위에 빵이 올라간 접시가 있었다.

헬렐은 눈을 비비며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빵을 집어  입 크게 베어물며 시선을 돌린다.

"너는 먹었냐?"

헬렐은 이 방에 있는  번째 난쟁이를바라보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눈동자는 공허하고 신체에는 미동도 없으니 살아있는가 의심될 정도였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저러니 몹시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먹었을 리가 없지.'

한숨을 쉬며 헬렐은 빵  조각을더 집어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그녀는 잠시 헬렐에게 시선을 향하더니 빵을 받아들고 천천히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침대에 가루 떨어집니다."
"뭐 어때."

다시 침대로 돌아온 헬렐이 풀썩 주저앉자 페올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방문이 열리고 어느 소년이 들어온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붉은 머리칼. 강아지보다는 고양이를 떠올리게끔 하는 인상의 사내.

미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외모였지만 헬렐은 오히려 긴장감을 느꼈다.

소년의 이름은 콜린. 백설을 박살내고 그녀들을 이런 상황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뭐, 잘 지내고 있지. 그나저나 식욕도 채워줬겠다 이제 다른 걸 채워줄 생각으로 온 거야?"

헬렐은 그런 긴장을 숨기려고 농담을 던졌다.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반대쪽 손가락을 쑤셔넣은 건 덤이다.

"미, 미쳤습니까, 헬렐?!"

콜린은 그 말에 싱긋 웃을 뿐이었지만, 오히려 옆에 있던 페올 쪽이 과민반응을 했다.

"왜 네가 그러냐? 질투라도 해?"

의아해하며 헬렐은 그녀에게 물었다.

생각해보면 헬렐은 이곳에 온 첫날 그와 관계를 맺었던 난쟁이 중 하나였다.

"복상사라도 당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 어차피 죽어도 나중에 다시 소환되면 문제없잖아."

다만 그녀가 놀랐던 건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던 모양이다.

헬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서 서큐버스 취급을 당하면 좀……."
"서큐… 뭐?"
"아, 이때는 인큐버스라고 해야 하나요?"
"……?"

거기에 쓴웃음을 지은 콜린이었지만 헬렐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튼 그게 아니면 무슨 일로  건데?"
"그야 포섭을 하러 온 거죠."

이내 헬렐이 화제를 돌리자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포섭…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거기에 끼어든 것은 페올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난쟁이를 지배하는 권능은 이미 그에게 넘어간  오래였으니 말이다.

그가 명령했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 따위, 그녀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을 제가 명령할 수는 없으니까요."

즉,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채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부하를 필요로 한다는 소리였다.

나름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던지라 헬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백설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있으신가요?"
"…글쎄."

하지만 뒤이은 말에는 대답을어물거릴 수밖에 없는 헬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백설은 유일한 충성의 대상이었다.

헬렐의 시선이 방구석의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 방에서는 세 번째였지만, 난쟁이들 전원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여덟 번째였다.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헬렐조차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름도 없는 그녀는 백설이 다른 난쟁이들에게도 숨기고 있던 존재였다.

 눈동자의 공허함은 그녀가 이미 망가진 존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부하조차 아니라, 그야말로 도구였다.

'아니, 정말로 그녀만 도구였을까.'

헬렐은 무심코 목에 걸린 초커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백설이 내어준 선물이었다.

그녀는 이것이 백설이 보내오는 신뢰의 증표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저기 있는 소년은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백설이 지어준 자신들의 이름은 일곱 악마의것을 따왔을 뿐이고, 이 초커의 문양도 그 악마들의 상징이라고그는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헬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백설의 상대들에게 난쟁이들이 일곱 명이라고 믿게 하기 위한 함정에 지나지 않았다.

백설에게 있어 난쟁이는 '일곱인 척 하는 여덟'이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녀는 난쟁이들 개개인의 인격 따위는 하등 신경 쓰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름조차, 초커조차, 자아조차 없는 여덟 번째의 존재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녀들의 왕은, 그녀들을 부하로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바쳐온 충성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앞으로 바쳐야  충성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헬렐, 헬렐  샤하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많이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콜린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다정한 미소로 헬렐을 바라볼 뿐이었다.

"페올. 너는 어쩔 거야?"
"버려진 시점에서, 충성을 바쳐도 의미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악랄하군. 페올에게 동조하면서도 헬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세 명씩 방을 나누어놓은 것도 이래서였을 것이다.

주군에게 버림받아 길을 잃은 그녀들을 이렇게 소규모로 놔두면 서로 눈치를 보다 콜린을 받아들이는결과가 나올 게 뻔했다.

차라리 아예 혼자였다면 다른 녀석들이 미안해서라도 함부로 줄을 갈아탈 수는 없었겠지.

그러나 아주 약간만 동조해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마음이 기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오히려 단결해서 거부할 가능성이 있어서 위험하고 말이다.

헬렐은 얼굴을 가린 채 피식 웃었다.

자신의 심리를 유도하려는 그 오만한 소년의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대신에 하나만 약속해줘."
"가능한 선에서는 얼마든지요."

그러나 그것이 헬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녀들 개개인에게 수작을 걸려는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들을 한 세트의 도구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저 애 이름부터 지어."

어쩌면 이번 한 번 만큼은 새 주군을 믿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헬렐은 미소를 지으며 이름 없는 그녀를 가리켰다.

“파라칼레오… 파라로 하죠.”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뜻이라고 믿어볼게.”

콜린도 그녀와 마주보고 웃었다.

×

"잘 지내십니까."

체셔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널찍한 거울이 하나 올라와 있다.

[뭐, 마음이 썩 편하지야 않지.]

거울에서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라크네였다.

백설의 게임에서 사용했던 두 개의 거울 중 하나를 떠나는 그녀에게 들려보냈던 것이 어제의 일이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제후 대리의 감청에 대비하여 사용을 미루고 있다가, 오늘 막 굴복한 백설에게 안전을 보장받은 참이다.

"고생 많으십니다."
[아무렴 그쪽만큼 힘들겠어.]

위로를 건네자 돌아온 말에 체셔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제후 대리를 박살내기 위한 혁명군의 선봉이 되어버린 그였다.

여기저기서 편지가 날아드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점 길드에게 협력하겠다는 말도 있고, 그를 규탄하는 내용도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후원 해달라는 상업 길드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또 거짓말이 섞여 있을 테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히 내부에 들어와서 훼방을 놓으려는 모자 장수의 끄나풀이 있을 터였다.

"벌써 콜린이 그립네요… 분명 거짓말하는 녀석들만큼은 확실히 걸러줄 수 있을 텐데."
[그 아이는 돕지 않는 거야?]
"뭐, 하루 종일 백설을 무너뜨리느라 바빴거든요."

 덕에 통신 아이템의 안전을 보장받고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체셔는 한숨을 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연락한 걸 보면 성공적이었나봐?]
"네, 뭐, 고문해가면서 이것저것 계약을 했다는 모양입니다."

같은 건물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그 '고문'이 무엇인지도 당연히 알고 있던 체셔였으나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이 두툼한 모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으리라.

[다행이네. 능력만큼은 있는 여자였으니까.]
"이쪽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유용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통신용 아이템은 얼마나 생산할  있겠어? 추가 자재가 필요하다면 최대한 협력하겠는데.]
"그, 그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뒤이은 말에 체셔는 말을 어물거렸다.

만약 이 방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꼼지락대는 꼬리를볼  있었으리라.

"문자 그대로 양산이 가능합니다. 지금도 진행중이에요."
[뭐? 엄청 많이 만들 수 있다는 듯이 들리는데…?]
"네, 맞습니다."

체셔가 긍정하자 아라크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통신용 아이템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전쟁에 어마무시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편집적인 제후 대리가 그런 아이템을 양산할 기회를 얻는다면 분명 자기 휘하의 군대를 강화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없었으므로 분명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높거나 제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말이죠… 백설이 달에 하나 겨우 만드는 물건이라고 제후 대리를 속이고 있었던 모양이라서……."
[흐음, 대체 어째서지?  여자가 자기 평판을 높일 기회를 놓칠 리 없는데.]

아라크네는 앉아있던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여전히 체셔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틀림없었다.

"나머지는 문제가 없는데, 그, 마지막 재료가 백설 본인의애액이라서요……."
[…양산하고 있다며?]
"계약을 이용해서 1초에 한 번 절정하도록……."

맙소사. 아라크네는 이마를 짚었다.

체셔가  그렇게 망설였는지도 이해가 갔다.

저런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꺼낼 수 있겠는가. 그것도 남자가 말이다.

[…뭐, 귀중한 아이템을 양산하기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자.]

거기까지 가면 아무리 그 백설이라고 해도 조금은 연민이 들기 마련이었다.

아라크네는 잠시 눈을 감아 백설을 애도해주었다.

하지만 그 최소한의 동정을 제외하면 몹시나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반 제후 대리 연합은 일종의 점조직 형태가 될 것이다.

모자 장수에게 불만이 있는 길드는 아주 많다. 그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난다면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점조직이라고 함은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은 존재였으나, 상대가 이쪽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다는 전제가 붙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물론 그것이 간접적 개입까지 모두 배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협력하고 있는 길드와 이어진 길을 막아버린다면?

부점 길드 바깥에 있는 장소를 틀어막는 정도는 계약을 감안해도 충분히가능하리라.

그러한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동료끼리의 통신수단은 필요했다.

[아이템 관련된 일은 너희에게 맡길게. 도와줄 일이 있으면 부르고.]

거기까지는 부점 길드에서도 파악하고 양산을 진행중인 걸로 보이니 아라크네가  개입할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으려다가 그녀는 문득 어떤 사실이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까마귀 길드의 움직임이 수상하니 조심해둬.]
"까마귀라면… 하아, 그 쌍둥이인가요."
[그래. 소문을 들어보면 대포를 여럿 싸게 구했다더라.]
"…젠장."

그 말을 듣고서 체셔는 혀를 찼다.

아주 뻔한 눈속임이었다.

제후 대리가 그들에게 무기를 아주 싼값에 팔았으리라. 사실상 거저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까마귀 길드가 그 무기로 무엇을 하든, 설령 부점 길드를 공격하더라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제후 대리는 관계가 없다.

그는 그저 무기를 팔았을 뿐이다.

제후령의 모든 경제활동을 금한다는 계약 따위는 맺은 적도 없으므로 막을 방법도 없었다.

"전투를 준비해야겠군요. 아라크네 씨도 조심하시길. 그들이 공격하는 게 이쪽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알고 있어. 뭔가 새로 알게 된 게 있으면 바로 연락해줘.]

서로 인사를 남긴 뒤 연락이 끊어졌다.

조금 어둑한 집무실에서 체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후 대리와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가 마치를 도와주기로 했던 순간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찾아올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길잡이의 의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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