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 일곱 장군(2)
습하고 퀴퀴한 냄새 올라오는 지하실.
허나 평범한 방은 아니고 창살 달린 감방이다.
짤그락. 손발을 묶어둔 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흐으으읏─♥"
물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사슬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매인 여성 역시 전신을 비틀며 목놓아 울고 있었다.
"백설 님, 귀여우셔라……."
"흐윽♥ 앗♥ 이 미친… 레즈 새끼가아앗♥"
백설은 이를 악물고 눈앞에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분홍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미인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다만 크기는 작았다.
키가 아니라 크기가 작다고 하였음은 물론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육감적인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던 탓이다.
난쟁이 아이쉬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백설의 부하였던 여성이었다.
아니, 사실 부하라는 표현도 너무 후하게 쳐준것이었다.
그녀는, 그녀들은 그저 백설이 명령하면 따를 뿐인 도구였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버릇을 고쳐줄 필요가 있겠네요."
"흐으읏?!"
하지만 지금 아이쉬마는 사슬에 묶인 백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백설의 유두를 비틀어올렸다.
그 폭력적인 애무에도 백설의 몸은 다시금 조수를 쏟아내고 만다.
아이쉬마는 그것을 바라보더니 또다시 낄낄 웃었다.
"후우, 또 하나 완성이에요."
백설의 하반신 근처에서는 거울 조각 하나가 오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아이쉬마는 그것을 집어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옆에 있는 바구니에 툭 던져넣는다.
마지막으로 회중시계를 품에 집어넣어 소리를 감추니 백설의 절정 역시 끝이 났다.
"하아, 진짜 이건 질리지 않네요."
"흐읏… 네년 즐거우라고 이러는 게 아니거든……."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백설은 아이쉬마를 쏘아보았다.
표독스러운 그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내 보지가 길드 분들한테 도움이 된다니까 바치고 있을 뿐이거든…?"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지금의 백설은 진심으로 길드에 봉사하는 것을 기쁨을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콜린과 마치가 준비한 절정 지옥 가운데서 정신이 한 차례 망가져버린 뒤 반쯤 새로 구축된 상태였다.
어찌나 꼴사납고 우스운 일인지. 아이쉬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충분히 쉬었어. 다시 시계 꺼내."
그 충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금의 이 아이템 양산 계획을 전해듣자마자 쌍수 들고… 아니, 꼬리를흔들며 기뻐했을 정도였다.
백설은 의식을 집중하여 눈앞에 계약서를 소환했다.
한 번 맺어진 계약은 해소될 때까지 몇 번이고 확인해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콜린에 대한 복종을 시작으로 부점 길드에 몸과 마음을 바치기 위한 온갖 조항들이 적혀 있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수준을 넘어 인격적으로 괜찮은가 의심이 가는 조항들이었다.
하지만 백설은 그것을 보니 또다시 기쁨이 밀려와 계약서에 입을 맞추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 광경에는 방금까지 그녀를 희롱하던 아이쉬마도 가볍게 쓴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오늘 열 개 정도는 만들 생각이니까 얼른 시작해."
"아뇨. 오늘은 여기까지에요."
이상하리만치 의욕을 보이는 백설의 모습에 아이쉬마는 고개를내젓더니 사슬을 풀어주었다.
"뭐? 헛소리 말고 얼른…"
"콜린 님이 부르세요."
"그, 그걸 먼저 말해야지!"
"버둥거리지 마세요. 오히려 풀기 힘드니까."
아이쉬마의 말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은 백설이었지만 이내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비틀며 사슬을 풀어내려고 한다.
참고로 이 사슬 역시 일반적인 목적의 구속은 아니었다.
그저 아이템 제작에 백설의 애액이 대량으로 필요했기에, 바닥에 흘려 낭비하는 걸 최소화할 수 있게 그녀의 몸을 고정시켜둔 것일 뿐이었다.
백설은 사슬이 풀리자마자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쉬마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묘하네요. 예전에 주인으로 모셨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니."
"내가 주인님 섬기겠다는데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흥분된다고요."
"…미친 년."
백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이 정도의 또라이라는 걸 몰랐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독일어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뭐야. 그럼 너희들한테 부탁해도 되는 거 아냐?"
"저희 문맹인데요."
…물론 그만큼 자기 부하를 인격체로 보질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내 백설과 아이쉬마는 집무실에 도착했다.
"부르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콜린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건네려던 백설이었다.
"그 길드 재정적 여유는요?"
"그리 가난하진 않을걸."
"그러면 이 기회에 한탕 하려는 거네요. 일단 보류합시다. 다음."
그러나 방에 깔린 열정적인 분위기에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리고 만다.
방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그녀를 부른 콜린은 물론이고, 영주인 체셔, 그리고이 길드 최대의 무력인 레니와 마치도 있었다.
"우리 유카논 길드 역시 그 용기에 감탄하여……."
"비록 강한 힘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다만 특이한 것은 콜린을 제외한 세 명은 죄다 무언가를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콜린은그 가운데 앉아 그들의 말을 듣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했다.
"저기… 뭐하는 건가요…?"
"아, 왔어? 미안. 집중하느라 못 알아차렸네."
의아한 마음에 백설이질문하자 콜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싱긋 웃더니 앞에 있던 종이를 한 장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체셔 캣, 부점 길드의 수장이자 도망자들의 길잡이, 펠레이라의 영주여… 편지인가요?"
독일어로 되어 있기에 첫 줄을 읽어봤더니 체셔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보내는 편지인 듯 했다.
"제가독일어를 못 읽어서요. 대신 좀 읽어주세요."
지금 보니 체셔와 마치가 들고 있는 편지는 영어로, 레니 테세오가 들고 있는 편지는 희랍어로 적혀있었다.
"반 제후 대리 연합에 끼고 싶다는 편지들이야."
하지만 여전히 백설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서있자 체셔가 편지를 읽다 말고 설명해주었다.
"확실하게 믿을 만한 녀석들하고 못 믿을 녀석은 골라냈는데… 애매한 길드도 꽤 있단 말이지."
그리 말하며 체셔는쓴웃음을 지었다.
제후 대리가 원한을 산 길드가 여럿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제후국에서 최고 권력자라는 건 변함없다.
좋게 말하면 충성하는, 나쁘게 말하자면 딸랑이를 흔드는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었다.
그 제후 대리에게대놓고 반기를 든 길드들이 나오는 지금의 상황은 그런 녀석들이 제후 대리의 호의를 살 기회이기도 했다.
삿된 말로 프락치를 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잠깐, 마치 누나. 방금 그 부분 다시 읽어주실래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소년은 그 누구보다도 그런 프락치 사냥에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아, 젠장! 세계 공용어 쓰라고요!"
"제 조상님 때는 희랍어가 공용어였는데요."
다만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으니… 유감스럽게도 콜린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뿐이었다는 점이다.
편지의 대부분은 영어로 되어 있었다.
제후 대리부터가영국 작가를 기원으로 삼았고, 편지를 받는 체셔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나름 의무교육 정도는 받았던 콜린이니 아예 읽지 못할 것은 없지만… 가능하면 원어민이 해석해주는 편이 훨씬 빨랐다.
사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기도 했다.
전능하신 태양왕 전하께서 이 세상의 입말을 통일시켰으나, 대체 무슨 심보인지 글말은 그대로 내버려뒀던 것이다.
그나마 대부분은 서툴게나마 영어로 적혀있었다.
하지만 냅다 자기 모국어로 써서 보낸 편지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양심이 있으면 상대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라고 고함을 치고 싶은 참이었으나, 저쪽도 부점 길드를 엿먹이려고 그랬던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이곳은 교통과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세계다. 외국어를 배우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굳이 배우지 않아도 말은 통하니까 배울 필요성도 그다지 느끼기 힘들었다.
"하아… 대체 여기 공문서는 어떻게 쓰는 건지."
콜린은 한숨을 내쉬더니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세 사람이 읽어주는 내용을 동시에 들으며 거기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명씩 느긋하게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듣자하니 까마귀인지 뭔지 하는 길드가 곧 여기 쳐들어올 거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보통 권력자들은 언어를 번역하는 권능 보유자를 데리고 있죠. 제 동생도 그랬고요."
콜린이 한탄을 하고 있으면 마치가 말을 받았다.
"드물긴 해도 전세계적으로 보면 꽤 수는 되겠지요. 이번에 이야기가 나온 까마귀 길드만 해도 관련 아이템을 갖고 있고……."
"…잠깐만요."
그 순간 콜린의 머릿속에 어떠한 중얼거림이 스쳐지나갔다.
"번역 아이템이라고요?"
"네, 제 기억이 맞다면 까마귀 길드가 갖고 있는 건 펜던트 형태의 아이템이에요."
콜린이 되묻자 설명해주는 마치였다.
그 말을 듣더니 콜린은 히죽웃었다.
"지금 하는 거 때려치고 선전포고나 하죠."
"코, 콜린…?"
"그냥 박살내고 아이템 털어오면 편하지 않을까요?"
갑작스런 콜린의 외침에 레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확실히 아예 틀린 말은 아냐……."
"영주님까지?!"
더욱 그녀를 당혹스럽게 한 건 거기에 체셔까지 동조해왔다는 점이었다.
"레니. 잘 생각해봐. 어차피 저쪽에서 싸움을 건다면 선제공격이 좋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최대한 싸움을 억제하는 게 제일이잖습니까."
업무에 지친 나머지 다들 맛이 가기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지금 이 편지를 왜 이렇게 급하게 정리하고있단 말인가.
까마귀 길드와의 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세력을 구축해 억지력을 형성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뭐, 농담이지만요."
"그, 그렇지?"
"어? 농담이었어?"
"영주님?!"
…과도한 업무는 멀쩡한 사람도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레니는 오늘 정말로 실감했다.
"무조건 수성이 유리한데 그 이점을 왜 버리겠어요?"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일단 선빵을 맞아야 여론전이 수월하잖아요."
본디 사람이라는 건 무의식중에 약자를 응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거의 혁명군에 가까운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부점 길드 입장에서는 마냥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또 악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부점 길드는 최소한 '선량함'이라도 확실하게 얻어야 했다.
선량하고 정의로우나, 의외의 힘을 지닌 선봉장. 그것이그들이 목표로 해야 할 자리였다.
그러니 칼을 갈며 기다린다. 저쪽에서 먼저 칼을 뽑을 때까지.
"대비는 하되, 먼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요."
물론 아예 싸우지 않는 게 제일이다.
아무런 다툼 없이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면 당연히 최고의 상황이었다.
──끼익.
그리고 그 순간 조금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깜짝 놀라 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을 향하면 책상에 놓인 손거울에 김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가 거울 위에 손가락을긋는 것처럼 뿌연 김이 지워진다.
그것은 이내 글자의 형태를 이루었다.
Αράχνη ○
'젠장.'
최고의 상황이 멋지게 날아가버리는 소리였다.
아라크네로부터 연락이온 것이었다.
콜린은 이미 그 내용을 짐작했다.
"…이런."
그리고 그건 체셔도 마찬가지였는 듯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름 뒤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릴 것. 미리 주고받았던 긴급한 상황이라는 표현이었다.
"응? 어?"
여기 있는 가운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최근까지 거의 항상 갇혀지내던 백설뿐이었다.
주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깨달았는데 정보가 부족하니 도통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얌전히 무릎이나 꿇고 있어야지.'
이윽고 어차피 이제 편지고 뭐고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으니 백설은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지금의 백설에게 그 행동은 욕구 충족이 맞았다.
"──체셔 캣 본인입니다."
다들─한 사람 빼고─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길드장이란 사람… 아니, 고양이가 현실에서 도피할 수도없는 일이었다.
체셔는 거울 위에 손을 얹고 슥 문지르더니 그 너머를 향해 말했다.
[까마귀 길드가 움직인다. 지금 군대가 막 검은 산맥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참이야.]
"…역시나."
체셔는 침음성을 흘렸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레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었다.
"급히 움직여야 할 상황이 생긴 거겠죠."
콜린 역시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희에게 제일 좋은 가능성은, 경쟁자를 염려해서 마음이 급해졌다는 것."
부점 길드는 이른바 혁명군의 수장이다.
충성파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그 목을 따느냐로 아부 경쟁이 벌어질 만도 했다.
"최악의 가능성은요?"
그리고 마치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안 그래도 풍만한 가슴이 더욱 강조되었다.
"제후 대리의 지원이너무 빵빵해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저희를 박살낼 준비가 끝난 경우… 일까요."
대포 같은 공성병기를 추가로 지원받았다면 진작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이 경우에는 특수한 아이템을 받았거나 강력한 권능 보유자가 지원을 왔다고 보는 게 맞다.
"아마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뭐, 애초에 이건 '최악의 가능성'일 때를 말하는 거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콜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곧 싸워야 할 사람들에게 괜히 불안한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도시에 얼른 소식을 알리러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도 레니는 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곧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날 예정이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허리를 굽혀 영주에게 인사를 남긴 뒤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떠났다.
"마치 누나."
이어서 콜린은곁에 앉아있던 토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 한 번만 더 그때처럼 최선을 다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마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모자 장수에게 복수하기 전까지는, 온힘을 다 쏟을 생각이니 안심해주세요."
그리고 마치 역시 전투를 준비하러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방에 남은 것은 콜린과 체셔, 그리고 백설과 한 사람의 난쟁이.
"아라크네 길드장님. 아직 연결되어 있죠?"
[…그래.]
콜린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서 거울을 향해 말을 걸었다.
괜히 최악의 가능성을 일깨워서 싸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최악의 가능성을 전제로 움직이는 것이 참모라는 존재였다.
…물론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정말로 그런지는 콜린도 모른다.
"우리잠시 진지하게 회의나 좀 해보죠."
하지만 적어도, 콜린은 그럴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