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해피 엔딩.(2)
생생한 체험이고 뭐고 개뿔.
'...씨발.'
지금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하자면 대충 책 한 권 분량 정도는 뽑아낼 수 있겠지만, 막상 생각나는 건 세 글자 뿐이었다.
좆 같다. 아주 개좆 같아서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용사에 빙의한다면 또 몰라, 왜 하필이면 마왕이냐고.
씨발 생생하게 느끼게 해줄 거면 좆 놀리면서 구멍에 박아야지 왜 개처럼 구멍에 박혀야 하냐고!
그것도 뒷구멍도 아니라 살아생전 있어본 적도 없는 앞구멍으로!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의 숫자 : 약 100만.]
시야 한쪽 구석에서 아른거리는 글자가 상당히 악의적으로 보인다면 거짓말일까.
정확하게 숫자를 써놓으면 또 몰라, '약 100만'이라고 뭉뚱그려 놓은게 참 악질이었다.
마왕의 몸에 빙의한 시점이 게임 초반부였다면 어떻게든 불살 루트를 타볼수도 있었지만, 지금 내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녀석이 지금 상황이 엔딩 직전이라고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야 하나?
섹스 한 번 못 해보고 죽는게 조금, 아니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기는 했지만 지금 이 몸뚱아리로는 절대 무리였다.
죽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평생 남자 좆에 박혀서 100만 명을 낳을 때까지 앙앙거리는 삶이라니... 시팔 진짜.
"왜 그러지? 설마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특히 이 말투.
분명 '아니, 죽기 직전인데 내가 구라를 치겠냐?!'라고 외쳤는데 자동으로 필터링 되는 꼬라지가 아주 예술이었다.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평생 저주 받아라. 아니, 저주를 받고 자시고 간에 내 상상 속에서 개처럼 범해주지.
얼굴도 모르는 범인의 뒷구녕에 좆을 박아넣는 상상을 하며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내가 해냈다! 나를 이런 꼴로 만든 썅년을 아주 개같이 따먹었다! 비록 정신 뿐이지만 내가 이겼다고!
"지금 그 더러운 아가리로 우리들을 능멸하려는 건가?!"
이런 시팔, 오해야 오해!
너희들을 자극하려고 한게 아니라 나를 이딴 몸에 집어넣은 새끼를 상상강간 하고 있던거라고!
역시 땅굴 속에 파묻혀 뒤진 속 좁은 드워프 새끼들 동족 아니랄까봐 사람이 기분 좋은 상상 하다가 좆 같은 미소 한 번 지었다고 아주 대가리를 깨부술 기세였다.
"우리는 여신께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이 모든 여정을 완수해, 마왕을 쓰러뜨리면 모두가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답답이들아, 여신이고 나발이고 그딴 소원 따위로는 아무도 못 살린다니까?!
나이스 바디의 엘프 궁수 누님은 언제나와 같이 고블린이나 오크 육변기나 하고 있으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이번 엔딩 루트를 탈 때 다른 때처럼 고블린 장난감으로 던져줄 걸 그랬다.
"너희들이 나를 믿지 못하는 건, 내가 마왕이라서 그런 건가?"
당연히 못 믿겠지. 사람들을 뒤지게 죽여온 뒤질 년이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설명을 치자면, 용사에게 힘을 준 여신은 다른 창작물에서 볼 법한 자애롭고 능력 있는 평범한 여신이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정 표현하자면 게임 제작진들의 음습함이 가득 담겨 있는 캐릭터 같은 느낌.
한 마디로 줄이자면 정신나간 년이었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그 잘난 여신을 믿어라. 내 몸에 상처를 내고, 네 손에 들린 성검에 내 피를 묻혀라. 그렇다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
"..."
"무엇을 망설이지? 나를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지금까지 약 100만을 죽여온 괴물의 말을 믿ㅡ"
"닥쳐!!!"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용사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솔직히 내가 용사였어도 단숨에 모가지를 잘라버렸을 것 같은데, 저렇게 망설이는 꼴을 보자니 아주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역시 용사 파티는 힘센 병신들이 모이는 집단이었던 건가.
"그렇지 않아도 죽일거니까, 머리 아프게 하지 말고 닥치라고!!"
한 번 커진 목소리는 더더욱 커져서 줄어들지 않았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서는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꼬라지가 아주 가관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쪽은 잔뜩 위협 당하고 있는 가련한 육덕 섹스한 미인이고, 저쪽은 칼 들고 협박해서 애 100만 명을 낳게 하려는 극악무도한 강간마 아니야?
물론 그런 설정도 꼴리기는 했지만, 그 애를 낳는게 나라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애를 낳게 한 적도 없는데 애를 낳으라니, 그런 개소리가 대체 어디에 있냐고.
"자, 네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다. 내 스스로 직접 그 칼날에 피를 묻히도록 하지."
"허튼 수작을 부리게 둘 것 같나!"
용사가 가만히 멈춰있을 때가 기회라고 생각해서 다가가려고 했지만, 역시 우리의 드워프 형님께서는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망치를 휘둘러 왔다.
'게임 안에서도 분위기 다 깨는 녀석이었는데 여기서도 똑같네, 거지같은 난쟁이 새끼...'
게임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섹스씬이나 능욕 당하는 스크립트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충격적인 스크립트가 바로 저 드워프의 것이었다.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끔찍하던지 잔뜩 화가 난 내 똘똘이가 곧바로 시무룩해져 장장 2시간 동안이나 다시 서지 않았더랬지.
마족 해병님의 마계 짜장... 윽, 머리가...
"왜 나를 방해하려 하는 것이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준다고 하는데도 대체 왜?"
죽거나, 죽지 않고 개 같이 범해지는 선택지 따윈 나에게 있어서 최악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용사 녀석이 제 죽어버린 고향 친구가 매일 내뱉던 말을 떠올리기 전에 그 쓰레기 여신을 불러내야만 했다.
그래, 분명 그 정신나간 여신을 본다면 용사도 마음을 바꾸겠지.
희미한 희망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기회였다.
죽지도 않고, 평생 동안 자지 박히는 삶을 살지 않게 될 수 있다면 개처럼 멍멍 짖으며 네 발로 기어다닐 자신도 있었다.
"내가 굳이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건, 너희들이 나보다 월등히 강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럴 이유가 없어서일 뿐이지."
사실 다 거짓말이고 마왕의 힘을 사용하기는 커녕 그런 것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차라리 힘이라도 있었다면 깽판이라도 치지, 지금 내 몸에서 느껴지는 건 오직 평범한 존재감 하나 뿐이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이 정도면 진심으로 거대 슬라임 따위한테도 질 것 같은데.
거대 슬라임이 어느 정도 강한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잔뜩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저쪽에 있는 성녀한테도 1대 1 싸움으로 질 자신이 있었다.
"내가 힘을 사용하게 된다면 분명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죽게되겠지. 네 녀석 또한 또 다시 소중한 이들을 잃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빌어먹을."
...먹혔나?
잘생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는 내 아무말 대잔치에 혼란스러워 하는 꼴이 아주 고소했다.
속으로 천박하게 낄낄거리며 용사 녀석을 비웃기도 잠시, 곧 있으면 저놈의 좆에 꼬챙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도발을 하는게 아니라 엎드려서 싹싹 빌었어야 했나? 제발 따먹지 말아달라고?
아니면 '속은 남자이니 정신적 동성애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라!' 같은 말을 지껄여야 했을까.
"마왕인 내가 용사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믿어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어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좀 믿으라고 이 자식아!
***
아서는 혼란스러웠다.
눈앞에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마왕과 그 개소리에 휘둘리는 자신이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러워 참을 수기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왕을 향해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분노에 차 몸을 덜덜 떠는 것 뿐.
"이보게, 아서. 지금 당장 저 간악한 마왕을 찢어죽여야 하네! 자네의 성검으로 말일세!"
"...나는."
대답이 이어지다가, 힘 없이 끊어진다.
죽일 거다. 저 빌어처먹을 정도로 지긋지긋한 마왕 년은 반드시 처죽이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저 년이 한 말이 맞다면?
사실 여신의 소원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이들을 되실릴 수 없다면?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왕은 죽을 터였다.
사람들을 죽인 죄는 오직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네 녀석을 반드시 죽일 거다."
"알고 있다."
"지금 네 녀석의 말을 들어주는 건 더 이상 소중한 것들을 잃기 싫어서일 뿐이지, 절대 네 말을 믿어서가 아니야."
"그것 또한 알고 있다."
저를 죽인다는 말에도 마왕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극도로 날카롭게 솟아오른 살의와 곧바로 터져나갈 듯한 전장의 열기에도, 마왕은 자신과 일련의 사건들이 관계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년. 부하들이 죽인 건 자기 자신이 죽인게 아니니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게 맞다면 눈앞의 마왕은 지금까지 해왔던 상상 그 이상으로 간악하고, 치졸하며, 쓰레기 같은 존재일 터였다.
"자, 그러면 나를 베어라. 죽지만 않는다면, 어디든 상관 없어. 뭐, 베는 것이 싫다면 찔러도 상관없다. 그 성검으로 말이지."
망치를 든 드워프ㅡ 게일을 지나쳐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마왕이 천박할 정도로 커다란 가슴을 주욱 내밀며 말했다.
은근한 눈빛으로 저를 충동질하려는 꼴이 마치 마을 어귀에 굴러다니던 창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군."
마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 쥐여진 기다란 성검이 거칠게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