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해피 엔딩.(4)
절망 어린 용사의 표정이란 뭐랄까, 그런 쪽의 취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화면 밖에서 봤을 때나 그랬지, 현실이 되어 직접 마주하니 조금 정도는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 그럴 수가..."
무릎을 꿇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오열하는 꼴이란.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를 내뱉기 시작하는 용사에 슬며시 거리를 벌렸다.
저기에 가까워졌다가는 못볼 꼴을 당할 것 같은데. 주로 능욕적인 쪽으로.
"아아, 아직 하나 남아있었네요. 그러니까, 우리 귀염둥이 마왕님."
"..."
황홀함을 가득 바른 얼굴로 제 뺨을 쓸어내리던 여신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왜 얘한테 어그로가 끌려. 애초에 내가 먼저 어그로를 끌기는 했어도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일 이유는 없을 텐데?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서니 빙긋 웃으며 한 걸음 가다온다.
내가 뒤로 물러나면 물러설수록 진해지는 미소가 마치 악마의 그것 같다면 거짓말일까.
"윽..."
"뭘 알고 계신걸까요, 우리 마왕님은."
차가운 벽에 몸이 닿자마자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이 몸뚱아리는 능욕 야겜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캐릭터의 옷 디자인도 거지 같이 만들어서는 아예 등쪽을 완전히 드러낸 수준이었다.
어쩐지 등 뒤가 허전하더라니.
속으로 씨발씨발거리며 코앞까지 다가온 쓰레기 여신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흉부에서 작은 통증이 느껴졌다.
"어머, 이 발칙한 가슴 좀 봐. 아기 백만 명은 낳아도 문제 없을 정도의 젖통이네요."
"그만..."
"왜요? 용사에게 패배한 마왕이 능욕 당하는 건 '상식' 아니었나?
제일 잘 알고 계실 분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조금 감회가 새롭기는 하네요."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설정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여신과 마왕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
내 가슴을 조물딱거리며 영문 모를 말을 해대는 여신에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내 가슴을 희롱하는게 고추 새끼는 아니라서 다행인 건가.
"아까워라, 아까워. 용사님도 참, 상처를 낼거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스토리 상의 마왕은 부하들을 부려서 인간들을 죽인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도 여러 인간들을 죽였다.
찢어죽이고, 태워죽이고, 찔러 죽이고, 베어죽이고, 심지어는 산 채로 땅 속에 파묻기도 했고, 아직 제 허리에도 오지 않는 정도의 어린아이 또한 망설임 없이 죽이기도 했다.
마왕을 최대한 쓰레기로 만들어서 최후에 그녀가 당하는 무한 능욕 씬을 더욱 자극적이게 만들 장치였겠지만, 개중에는 과연 이딴게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괴악한 행동들도 꽤 있었다.
"...네 말대로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루트를 발굴하기 위해서 마왕이 직접 인간들을 죽이는 루트를 최대한 피했다.
속칭 불살 루트라고 불리는, 마왕 본인 뿐만 아니라 마왕의 부하들까지 인간들을 죽이지 않는 엔딩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결말만 보자면 배드 엔딩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난이도도 극악해서 사람들이 잘 보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완료한다고 해도 갑자기 화면이 어두워지며 고기 찌르는 소리와 함께 '신임을 잃은 마왕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습니다.' 같은 텍스트가 출력되는 것이 전부.
그렇기에 타협한 것이 '부하들의 의견에 반대를 던지지만 신임은 잃지 않고, 마왕 자리를 계속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인간들을 죽이지 않는 선택지를 고른다.'라는 것이었다.
'서, 설마 이대로 살아나가는게 해피 엔딩인가?
이 납작이 년의 눈빛이 수상하기는 하지만 딱히 뭔가를 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이 몸뚱아리에 들러붙은 거대한 젖탱이를 만지작거리고는 있었지만, 딱히 야한 기분이 든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아까 전에 용사에게 내뱉던 대사들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이런 녀석이었으니 전부 그러려니 넘어갈 법한 일들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러네? 내가 왜 쫄고 있어야 하는 거야? 어차피 내가 안 죽였잖아.
비록 그때는 게임상이었다고는 해도 부하들의 의견도 거의 다 반대했고!
심지어 몇몇 부하들은 제 의견을 받아주지 않으면 몇 번이고 암살자를 보내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마족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동족을 죽일수록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확률도 높아질 뿐더러, 같은 마족을 죽이더라도 낳아야 하는 아이 코스트가 상승했기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내 덕분에 용사 파티 일행들도 다 살아있고, 인간들도 그나마 덜 죽은거 아닌가?
물론 마왕이 죽이지 않은 숫자만큼 부하들이 더 죽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숫자가 줄기는 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위기감에 몰려 잔뜩 굳어있던 몸이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긴장을 푸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그건 '이번 회차'에서만 해당하는 이야기잖아요."
"...뭣."
뭐?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머릿속에 새하얗게 변했다.
내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점점 짙어지는 미소에 애써 시선을 돌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그래,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여신이 이번 회차, 라는 말을 꺼냈었지.
이번 회차.
그러면, 이전 회차들은?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의 숫자 : 약 100만.]
"..."
"이제야 아시겠나요? 당신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를.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를 말이에요."
여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쿡, 하고 길게 뻗어진 틈새 사이를 후벼팠다.
성검이 지나간 자리에 파고드는 여신의 손가락이란 마족, 특히 마왕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기다릴 새도 없이 신체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격통에 반사적으로 다리가 꺾였다.
'이, 이, 씨발년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몸 속에 신성력을 흘려넣었다.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을 주기 위해서.
덜덜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움켜쥐고 고통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몸뚱아리의 보정을 받았음에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씨발, 이딴 걸 대체 어떻게 버티라는 건데?!
힘이 쭉 풀리는 감각과 함께 아랫배가 뭉근해져, 얼마 지나지 않아 가랑이 사이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터져나오는 샛노란 액체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쪼르르륵.
축축하고, 온기를 가진 액체가 마왕성의 한 구석을 비참하게 물들였다.
"얼마나 놀랐으면 아이처럼 오줌까지 지리시고... 정말 귀엽네요."
"극, 구흑..."
"쉬이, 벌써부터 신음을 흘리시면 안되죠.
낳아야 할 아이가 백만이나 되는데, 대체 얼마나 더 천박해지려고 이러시는 걸까."
여신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져, 내면에 숨겨져 있던 가학심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
자애와 다산의 여신은 개뿔, 능욕과 윤간의 여신인 쓰레기 새끼에게 딱 어울리는 역겨운 면상이었다.
씨발년, 대체 나한테 이딴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겨우 게임에서 사람 좀 죽였다고, 겨우 게임에서 생생하게 즐기고 싶다는 선택지 하나 클릭했다고 이딴 짓거리를...
"뭐, 그래도. 백만 명을 전부 낳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힘내봐요, 우리 귀여운 마왕님.
***
절망에도 끝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발 밑에서부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닿지 않는 어두운 시야 속에서 용사가 격렬하게 머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아아아아아아아악!!!!!!!"
쿵! 쿵!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왕성의 바닥에 금이 가고, 마침내 그의 이마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순간 용사의 귓가에 한 줄기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랍니다, 용사님."
"..."
달콤하고,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
머리 끝까지 치솟아오른 후회와 분노가 차츰 가라앉자 끝 없는 증오가 이리저리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지옥에나 떨어질 년. 죽어버려야 해.
비틀비틀 일어나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성검을 억지로 집어든다.
지금 당장 마왕을 죽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은 마왕의 탓이랍니다.
만약 그들이 마왕의 손에 죽었다면 당신이 빈 소원으로 인해 모두가 되살아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네요."
"...죽여, 죽여버려야 해."
여신님의 말대로 전부 마왕의 탓이었다.
소원으로는 죽은 자들을 되살릴 수 없다느니, 자신의 말을 믿으라느니 하는 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더욱 신중을 기해서 소원을 빌었을 터였다.
아니, 애초부터 그냥 그 손으로 사람들을 죽였다면 이딴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사악한 마왕이면 사악한 마왕답게, 마음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로 목욕하는 짓 따위나 할 것이지...
방향 잃은 증오는 돌고 돌아, 결국 비틀린 채로 다시 마왕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런 용사를 내려다보며, 능욕과 윤간의 여신이 자애롭게 미소지었다.
"사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어때요, 한 번 들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