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5 - 탈출.(6)
치료는 해줬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는 채였다.
...그래도 살아남기는 했으니 다행이려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늘어뜨리고 있자니, 어둠 속에서 샛노란 눈동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죽을 뻔한 주제에 팔자도 좋다냐."
길게 뻗어진 꼬리가 내 코를 툭, 하고 내려쳤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타박이 느껴졌다.
그래도, 마족을 혐오하는 것 치고는 친근하게 다가오는구나.
그 점이 조금 고맙기는 했다.
"그나저나 너, 이름이 뭐냥?"
"...아리엘, 그냥 아리엘이다."
관계를 시작하는 건 바로 자기소개라고 했던가.
이름을 묻는 상대에 순순히 답했다.
알려줘도 딱히 상관없기도 했고, 기껏 얻은 말동무를 잃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구냥. 마족 치고는 예쁜 이름이다냐."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하고 중얼거리는게 마치 잊지 않기 위해 여러번 되뇌이는 것 같아서 꽤 귀여웠다.
확실히, 게임 내에서도 수인들은 꽤나 인기가 많은 종족이었지.
플레이어들의 니즈를 파악해서 미소녀의 몸에 귀와 꼬리까지만 달아둔 것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네 이름은 뭐지?"
"랴뇨리다냥."
"...라노리?"
"랴뇨리!"
그러니까 라노리 아니야?
눈을 끔뻑이며 라노리... 하고 되뇌이니 그게 아니라며 버럭 소리를 질러왔다.
라노리가 아니라 랴뇨리다냥!
상대의 외침에 그제서야 내 실수를 깨닫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하구나."
"알면 됐다냥."
채찍처럼 휘둘러진 꼬리가 이번에는 뺨을 때렸다.
...아프지는 않지만 기분 나쁘네, 이거.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들기니 이리저리 피해다니는게 마치 고양이 같았다.
아니, 고양이가 맞기는 하지만.
"기어오르지 말라냥! 너, 지금 네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거냥?!"
꼬리의 끄트머리를 꼭 붙잡으니 신경질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깜짝이야.
울적한 김에 기분이라도 좋아지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랴뇨리에게는 별로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내 처지가 박복하기는 하지.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으며 꼬리 끝에 묶인 장식을 톡톡 두드렸다.
"진짜 마족 같은 않은 녀석이다냥..."
"칭찬으로 들으마."
"그리고 말투도 이상해냐!"
말투라도 한다면 너도 만만찮은데.
그런 의미를 담아 바라보니, 팔다리를 마구 파닥거린다.
뭔가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이구나.
"그나저나 라뇨리, 궁금한 점이 있다."
"...뭔데냐? 빠져나가는 방법이라거나 그런 건 안 알려줄거다냐."
"아니, 그게 아니라ㅡ"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용기를 내서 입을 연다.
무언가 금기에 다가가는 것 같았지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
"혹시, 귀가 네 개는 아니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냥."
아니, 보통의 수인이라면 머리 위에 달린 귀로 끝인지 아니면 옆에 사람 귀가 추가로 달려있는지 미스테리였으니까...
만약 사람 귀도 달려있다면 귀가 4개 달린 것이 되버리겠지.
그렇다고 사람 귀가 안 달리면 조금 언벨런스 할 것 같기도 하고.
"자, 봐라냥."
"...없구나."
옆머리를 덮은 머리카락을 스윽 들어올리니, 숨겨져 있던 부분이 들어났다.
사람의 귀가 없어서 그런지 상당히 기괴한 모습이었지만, 다시 머리카락에 가려지니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 사람 귀를 그리는지 알 것 같네.
"당연히 없지냐. 귀가 4개나 달리면 그건 괴물이다냐!"
랴뇨리가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며 소리쳤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아무튼 실망이야.
"뭘 멋대로 실망했다는 듯한 얼굴인거냥."
들켰다.
***
솔직히 말하자면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었다는게 맞겠지.
아니면 고통을 잊기 위해 정신을 반쯤 빼놓았다던지.
"똑바로 걸아라, 마족!"
"윽..."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똑바로 걸으라니 너무 가혹한게 아닐까.
다시 한 번 말하지면, 이 세계는 나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흥."
"......고맙구나."
은근슬쩍 다가와서 붙잡아주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쓰러졌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사방이 적의로 가득 찬 상태에서 느껴지는 서툰 호의에 찔끔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다.
"촌장님,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주저앉으니, 랴뇨리가 슬며시 무릎을 꿇은 모양새로 자세를 교정해줬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무릎을 꿇으라니, 너무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네가 이번에 잡혀왔다던 마족이구나."
풀잎 향이 나는 연기와 함께, 자그마한 오두막 안에서 수인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와 함께 흔들리는 아홉 개의 꼬리가 그녀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꼬리 아홉 개에 무녀복을 입은 캐릭터면 하나 밖에 없는데...'
미코.
이름 모를 신을 모시는 무녀라고 하는데 그 신의 정체가 딱히 밝혀지거나 하지는 않았더랬다.
마족들이 그 이름 모를 신의 힘을 빼앗기 위해 그녀를 습격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
처녀를 잃으면 힘을 잃게 되어서 사력으로 저항하지만, 결국 고간에 붙인 부적이 꿰뚫려서 평범한 수인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니까 뭔가 감회가 새롭네.'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자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라느니, 건방지다느니 등등.
...고개를 숙이면 고개를 숙였다고 건방지다고 말하겠지.
괜한 반항심이 생겨서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있기로 했다.
내 머리를 누르는 손길만 아니었다면.
"촌장님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라냐!"
"...읏."
억지로 숙여져서 그런지 목덜미가 시큰거렸다.
수인들은 힘조절을 잘 못하는게 특징인가 보네.
얼마 전에 지혈을 당하다가 죽을 뻔한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뿔이 잘린 마족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손길이 잘려진 단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소름 돋는 감각에 억지로 신음을 삼키니, 귓가에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내 이름은 미코. 신을 모시는 무녀이자, 이 미을의 촌장을 맡고 있다. 네 이름은 무어지?"
"...아리엘. 그냥, 아리엘이다."
이리저리 수식이 붙은 자기 소개에 떨떠름하게 답한다.
여기에서 마왕이라고 소개했다가는 분명 좋지 못한 꼴을 당했겠지.
뿔이 잘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녀석들에 비해 적대적이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 아리엘. 네가 그 마족이구나."
친절한 목소리였다.
너무도 친절해서, 오히려 불안해질 정도로.
"신께서 말씀하셨지. 언젠가 마을 근처로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족이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마족이, 죽은 동족들을 다시 낳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뭐?"
어깨를 붙잡힌다.
둥글게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하마터면 너를 죽게 둘 뻔 했구나. 이 정도로 연약한 마족은 처음이라서 하게 된 실수이니, 너그럽게 눈감아다오."
"욱..."
눈앞에 보이는 친절함에 구역질이 솟아올랐다.
언젠가 보았던 그것과 비슷한 색체의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부디, 내 기대를 배신하지 말길 바라마."
기대라.
대체 어떤 기대를 말하는 걸까.
죽어버린 동족들을 낳으라고?
이런 꼴로?
억울함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죽여, 이 짐승 같은 년.
아니 수인이니까 반쯤 짐승은 맞나?
"안심해도 좋다. 네가 죽는 건, 죽은 동족들을 모두 낳은 뒤가 될 테니까."
"..."
마족들이 우리 동족을 꽤나 죽여대서 말이야.
그래도, 그 숫자를 낳을 때까지는 살아있을 테니 명줄은 상당히 길겠구나.
명백히 비웃기 위해 내뱉어진 말이었다.
"안으로 들이거라."
"하, 하지만 촌장님. 이 년은 마족입니다! 촌장님에게 해를 끼칠 수도ㅡ"
"내가 이 마족에게 해를 입을 것 같나?"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수인들 사이로 차가운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분명 무어라 한 건 저쪽일 텐데, 수인들의 적대감이 오르는 건 이쪽이었다.
정말이지, 어딜 가나 고생이구나.
반쯤 포기한 채로 질질 끌려가니, 바닥에 피부가 쓸려서 쓰라렸다.
"너, 촌장님의 집에서는 죽은 듯이 지내라냐."
"..."
"다른 녀석들에게 비명횡사 당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냐."
살벌한 경고와 함께 오두막 안으로 던져졌다.
우당탕 굴러서 벽에 부딪히니 뼈마디 하나하나가 전부 얼얼했다.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어버리면 좋을 텐데.
갈색빛이 도는 천장을 멍청히 바라보며 있다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눈물이 나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일단 교접을 할 몸 상태가 아닌 것 같으니, 어디 한 번 보도록 할까."
"...윽."
단순히 일으켜지는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몸에 과부하가 걸렸다.
하긴, 그 높은 절벽 위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히 살아있는게 기적이기는 했다.
만약 나무가 우거져 있는 숲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즉사였겠지.
"음, 그러니까. 그래..."
내 몸 이곳저곳에 귀를 가져다대며 신음을 흘린다.
사람이 아닌 귀한 물건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무어라 말할 힘이 없었다.
지금은 그냥 쉬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