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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4화 (4/141)

<4화>

“……굳이 사[辭]학당에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승님의 가르침은 이미 전부 예지몽을 통해 기억하고 있다.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얼마든지 되새길 수 있다.

이 몸으로 직접 사사 받은 게 아니라서 조금 미진하긴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비기를 계승 받는 건 내가 아닌 우사가 될 테니, 약간의 미진함쯤이야 상관없을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 안의 단전도 확인해 봤다. 내공을 운공하며 곳곳을 살핀 결과, 가진 내력은 평소와 비슷하단 걸 알았다. 예지몽을 꾸기 전, 그러니까 어제와 말이다.

그 말은 즉, 내 머릿속에 있는 앞으로 몇 년 치의 가르침을 지금 바로 제대로 써먹을 수 없단 거다. 이 몸의 내력은 기존과 같아 그 가르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공과 육신으론 몸으로 익혀야만 하는 체술 종류는 당연히 어렵겠고, …법진을 응용한 법술은 그나마 대충은 펼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력이 미약해서 효력은 작을 거다.

뭐, 그래도 웬만한 후지기수들보단 낫겠지만.

여하튼, 그런고로 지금의 난 굳이 정사봉에 안 가도 된다. 내공이나 체력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수양할 수 있다. 그러니 가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 예지몽을 통해서라곤 하나 어쨌든 볼 장 다 봤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망설이며 앞을 응시했다. 여러 의문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사봉으로 가지 않고 돌아서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예정된 운명’의 흐름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는 거고, 예지몽에서도 벗어나는 건가?

이렇게 간단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지몽을 뒤엎으려는 내 입장에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간단해선 안 되는데.

예지몽에는 일종의 ‘강제력’이란 게 있다. 예지몽에서 예지된 것은 분명히 ‘앞으로 일어나게’ 된다. 즉, ‘미래를 이미 점지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되면 내 앞에 너무나 쉽게 선택의 기로가 생긴다.

“…….”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의문이 들었다.

‘점지받은 일’을 이렇게 쉽게 무를 수 있다면 그건 강제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강제력이 없는 예지몽은 들어 본 적 없다.

그럼, 만약 그 꿈이 예지몽이 아니라면, 내가 미래를 점지받은 게 아니라면…….

간밤에 꾼 그 모든 게 ‘아직은 실재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에 아연해진다.

진작 옆으로 치워놨던 가정 하나가 떠오른다.

혹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시 가정하긴 했으나, 스스로도 말도 안 돼서 미뤄놨던 그 가정 말이다.

회귀. 처음에 잠시 떠올려 보긴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에 빠르게 접었던 가정.

‘회귀’는 술법 자체가 극히 희소하고, 극히 위험하며 엄청난 희생을 요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그 정도까지 헌신할 귀인이 있을 리 만무할뿐더러,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되살릴 이유가 있을 리도 없다.

그런데, 만일 예지몽이 아니라 회귀라면?

그렇다는 건 간밤에 꾼 그 꿈들이 ‘이미 실재했던’ 일들이란 거고, 스승님과 우사에게 버려진 것 또한 실제 한 번 겪었던 일이 되는 거다.

왼손을 꽉 주먹 쥐었다.

“…….”

고민 끝에 사학당을 향한 방향에서 돌아섰다. 이렇게 된 이상 간밤에 내가 꾼 게 무엇인지 한 번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정말로 회귀면 여러모로 문제가 커진다.

본질적으로 회귀는 ‘금지된 술법’이고 그에 따른 대가도 만만치 않다. 그 대가의 해결 방안을 서둘러 찾기 위해서라도 이게 ‘회귀’인지 ‘예지몽’인지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사학당을 등지고 선 채 팔짱을 끼고선 한쪽 다리를 덜덜 떨었다.

…역시 사학당엔 가고 싶지가 않다. 지금 가 봐야 정다운 그 둘 사이에 억지로 껴 있기나 할 텐데.

어차피 내가 없는 편이 그 둘한테도 더 좋을 거다. 그러니까 둘이 알아서 잘 살든가 말든가 빠져 주는 게 더…….

생각을 바로 끝맺지 못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쉬이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건, 역시 예지몽이 갖고 있는 강제성이 내 발을 묶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그저 내가 그 둘에게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사학당에 정말 가기 싫은데.

그런데 실험한답시고 막상 돌아서고 보니, 이대로 그냥 떠나 버리는 것도 저어된다.

내가 가 버리면 정말 그대로 끝나 버릴 것 같아서다. 그 둘에게 나는 그런 존재일 테니까.

훌훌 떠나려니 미련이 날 붙잡고, 우횡산의 인연이 허무하게 끊기는 데에 대한 두려움마저 생긴다. 이 무슨 이중적인 마음인지 모르겠다.

좀 더 깊게 생각을 해 보았다. 이대로 떠나는 게 불편한 이유에 대해. 차분히 머리를 굴리자 이대로 떠나는 게 저어되는 이유가 몇 가지 더 떠올랐다.

일단, 이대로 끝내는 게 ‘잘’ 끝내는 게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마무리 짓는 건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닌가. 그간 내가 우사를 적지 않게 괴롭혔는데, 뒤끝 긴 우사가 그걸 잊을 리가 없다.

억지로 짜낸 이유인데 생각해 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꿈에서 본 바에 따르면 우사는 뒤끝이 무지 길었다. 원한은 절대 잊지 않고 빚은 열 배로 갚아 주는 무서운 놈이었다.

열 배……. 지금까지 내가 우사에게 저지른 것을 셈해 봤다. 대충 셈해 봐도 훗날에 다시 납치당하기에 충분하다.

속으로 작게 끙- 앓았다.

우사와는 다신 그렇게 엮이고 싶지 않은데. 아니, 어떤 식으로든 가능한 안 엮이는 편이 낫다. 우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내 역린을 건드리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역린은 우사에게 가진 내 마음, 순정, 독심 그 자체다. 그래서 그렇게 우사를 볼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던 거였다. 자꾸만 역린이 건드려지니까.

이제까진 짜증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해 스스로가 이중적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우사에게 가진 마음 자체가 이중적인 것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우사를 내 인생에서 아예 치워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내 시야 밖에 있으면 못 견뎌 했다.

하지만 이젠 그 이유를 아니, 내가 먼저 우사에게서 시선을 거둘 생각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내가 눈을 돌린다고 이 관계가 곱게 청산될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우사를 열심히 괴롭혔었는데.

우사를 내 삶에서 곱게 치우려면 적어도 이때까지 쌓은 원한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날 찾을 마음도 안 들 테고, 하다못해 우리의 사형제지연이 그런 식의 끝은 안 보겠지.

꿈에서 본 우사와의 절연 순간을 떠올렸다.

나는 스승님이 어떻게 돌아가실지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스승님의 병은 천[天]병이었으니까.

천병은 선인이 속계에서의 명[命]이 다하면 앓는 병이다. 속계의 인간들 눈으론 볼 수 없지만, 스승님은 분명 죽음과 동시에 등선했을 거다.

후에 우사도 천룡이 되어 하늘에 속하게 되었을 테니, 우화등선한 둘은 아마 하늘에서 못다 한 해후를 했을 거다.

결국 남겨지는 건 나 혼자다.

…정말 볼품없네.

자조 어린 쓴웃음을 지으며 애써 결심을 굳혔다.

그래, 붙잡아 줄 리 없으니 나만 놓으면 반드시 끊어질 인연들이다.

이번 잠깐만 그 두 사람에게 다녀오자.

사학당으로 가서 이때까지의 감정을 정리하면 뒷일도 편해질 거다.

이참에 지금까지 우사를 뱀 놈이라고 불렀던 것도 고치고.

호칭부터 제대로 바로잡고 해야 할 것과 해선 안 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는 거야.

잘 하자, 진연.

내가 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불똥은 괜한 우사에게만 튀는 거야. 우사가 그 불똥을 맞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먼저 반한 것도, 그 사실에 분노를 느낀 것도, 전부 나 혼자서 내 안에서 스스로 벌어진 문제인데.

스스로 품은 악심이면서 사제에게 화풀이를 하고. 내 자신의 마음이 지옥이라고 사제의 어린 시절까지 지옥으로 만들었다.

악질을 넘어 인간쓰레기 사형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쓰레기 사형’이란 호칭은 현재진행형이다. 열여섯 살이면 지금 한창 우사를 괴롭히고 있을 때니까.

실제로 어제까지만 해도 한창 우사를 괴롭혔었다.

괴롭힘이 시작되었다는 건, 이미 내가 우사를 마음에 뒀다는 뜻이겠지.

…‘마음에 뒀다’라. 같잖다.

그 문장은 나락의 시발점일 뿐이다.

그러니 그 골치 아픈 문장부터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겠다.

옛 선현이 말하길, 지옥은 마음 안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마음이 없으면 지옥도 없다는 뜻 아닌가?

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 마음이 문제인 거잖아. 그러면 내 마음만 없애면 되는 거 아니야?

사랑을 하게 만드는 묘약이 있다면, 그 정반대의 묘약도 있는 법이다. 꿈에서 그런 유의 약을 들어 본 적 있다. 그러니까 분명…….

“…단애약수[斷愛藥水].”

낮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단애약수인지 애단약수인지 좀 헷갈리긴 한데 어쨌든 그런 느낌의 이름이었다.

이 약수는 약선이 직접 제조한 것이라 여타 시중에 도는 것들과 질이 다르다고 했다. 아주 강력하고 약을 마셨다는 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 효능이 교묘하며 대단하다고 들었다.

단애약수는 그걸 음용한 이로 하여금 모정[慕情]을 잊게 해 준다. 은애, 연정, 연모, 사모, 애정.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마음을 말이다.

그 약수의 존재가 어쩌다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그 단애약수가 가진 이야기는 알고 있다. 알음알음 퍼진 나름 유명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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