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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5화 (5/141)

<5화>

내가 알기로 그 약수를 마신 건 은비여귀였다. 귀[鬼]가 들어간다고 해서 귀신인 건 아니고, 그냥 강호의 별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은비여귀가 실은 ‘마귀’라는 말도 있었다.

‘마귀’는 마계의 종족인 ‘마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은비여귀가 단애약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 산영의 덕이었다. 그 산영의 영주[主]인 ‘자고[自高]’가 은비여귀에게 단애약수를 팔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걸 찾은 곳이 우횡산인데 숨겨진 장소가 워낙 지독해야 말이지. 두 번이나 죽을 뻔했어.’

꿈에서 건너 건너 들은 그 말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는 건 당시에 그 말을 옮기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듣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들려왔고, 몇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는 잊혀지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그 일을 다시 짚어 보는 것 자체가 마치 지난 일을 회상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점점 꿈에서 일어난 일과 현재 겪은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인데.

살짝 인상을 쓰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단애약수만 생각하자.

내 역린을 없앨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게 꿈속의 일을 기억해 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에 가까웠다.

당시, 그러니까 내가 꿈속에서 단애약수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그 무렵엔 ‘은비여귀’에 관한 말들이 많은 때였다. 그에 관한 소문도 무성했고 말이다. 전부 은비여귀와 남궁세가 간의 염문설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자고가 했다는 그 말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건, 그와 짧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정말 자고가 맞는진 잘 모르겠다. 자고는 변용술의 귀재라 본모습으로 다니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고를 만난 건, 우사와 절연하고 잠시 방황할 때였다.

한참 술에 의지해 살 때였다. 어느 객잔에서 혼자 자작을 하다가 실수로 술을 쏟아 버렸다. 그때 내가 흘린 술에 흠뻑 젖은 이가 바로 자고였다.

자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합장을 하면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었다. 마치 스스로를 무덤의 비석이라 일컫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취한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듯 술 공양을 한 것처럼 그에게 합장을 했다.

그러자 그는 오늘 마시는 술은 전부 자신이 사겠다 했고, 그날 우리 둘이서 함께 대작을 했다.

그가 스스로의 정체를 ‘자고’라고 밝힌 건 그 술자리에서였다.

‘오늘 내 가슴에 무덤 하나를 묻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공양을 받고. 이렇게 술도 나누고. 대협이 유일무이한 조문객입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하는 자고에게 나는 그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객이 나뿐이라면, 내가 다시 조문을 하러 오겠다고. 조문을 와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꿈속에서 그런 인연을 맺었고, 그런 대화를 나눴다. 예지몽이라고 생각하는 꿈의 내용에 불과한데도 그 일 자체가 너무 지난 일을 회상하는 것 같다.

이런 기분 자체가, 이건 예지몽이 아니라 회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다.

아무튼, 자고의 말에 따르면 단애약수는 여기 우횡산에 있다.

자고가 은비여귀에게 단애약수를 팔았다고 한참 말이 많았을 때가 내 나이 스무 살이었을 때다.

자고가 언제 단애약수를 손에 넣었는진 몰라도, 대충 계산해도 4년이란 시간이 이르니 벌써부터 가져가진 않았겠지.

문제는 그 숨겨진 장소인데.

우횡산은 속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고 큰 산이다. 산맥 자체가 굉장히 광대해서 거기에 속한 산봉우리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다. 그 전부를 뒤지는 건 무리다.

그래도 다행히 자고는 한 가지 힌트를 남겼다. ‘숨겨진 장소가 정말 지독하다’는 거. 우횡산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자고가 두 번이나 목숨 위협을 느낄 정도면…….

정사봉이 가장 유력하다. 왜냐하면 거기엔 우사가 있으니까.

후에 천룡이 되는 우사는 우횡산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등극하게 된다.

어린애인 지금이야 그다지 큰 위협이 아니지, 머잖아 우횡산의 주인이 되면 그땐 말이 달라진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게 말 그대로 미물[微物]이 될 거다.

그러니 단애약수를 얻으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이다.

결국 이래저래 정사봉에 가는 게 능사라는 거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도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허공답보를 써 뛰어가 봐야 빨리 도착하기만 할 테니 그냥 천천히 걸어갈까 했지만, 그러기에 지금 이 몸은 단련이 되지 않아 너무 추웠다. 상공이라 그런가. 지상보다 바람이 더 많이 분다.

찬 바람을 너무 많이 맞은 피부에 닭살까지 돋았다. 고민하느라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었던 탓이다.

수화불침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 몸은 추위에 약했다.

수화불침과 같은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주는 법술은 심신이 골고루 단련되어 있어야만 익힐 수 있었다. 물론 굳이 수화불침이 아니더라도, 주위를 덥히는 법술만 펼치면 얼마든지 추위를 물릴 수야 있다.

하지만 그런 유의 법술은 내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게 문제다. 이 몸이라면 까딱 잘못했다간 여기서 운기조식에 들어가야 할 판이다.

어서 냉기와 열기를 견디게 해 주는 수화불침을 익히고, 더 나아가 한서불침도 익혀야…….

“에취-! 훌쩍.”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코까지 훌쩍이며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뒷짐 지고 있던 한 손을 내려 팔짱을 낀 채 후다닥 움직였다. 허공을 박차며 뛰니까 더 춥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정면을 응시했다.

우선 단애약수부터 찾자.

* * *

사학당 앞마당으로 단번에 착지했다. 평소와 달리 허공을 밟으며 우아하게 내려오지 않은 탓에 머리와 옷매무새가 흐트러졌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매만진 뒤 아예 하나로 높이 묶어 버렸다. 그리고 옷자락을 몇 번 팡팡 내리친 뒤 사학당 안으로 들어갔다.

낮은 문턱의 대문을 넘자 좁은 앞마당이 보인다. 한쪽에는 작은 텃밭도 있다. 이때까지 저 텃밭에 뭐가 자라는 걸 본 적이 없다. 여기 흙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승님은 뭐라도 심으며 저 텃밭을 꿋꿋이 가꿨다.

대문에서 사학당까지의 앞마당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오솔길을 걸었다. 이 오솔길은 스승님의 미적 감각의 산물이다. 난 괜한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짧은 오솔길을 걸으면 그 끝에 사학당이 있다. 마루가 둥글게 깔려 있는 작은 초가집이다.

워낙 습한 늪지대를 끼고 있어서 관리가 조금만 소홀해도 금방 썩어 버린다. 선술로 초가집을 관리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 것을, 스승님은 그러지 않았다.

정사봉을 이루는 모든 것-그것이 설령 습기라 할지라도-과 사학당이 한데 어우러지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사학당이 우횡산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며 인자하게 웃는 스승님만 보면 내 속이 터졌다.

결국 썩은 초가집을 관리하는 게 나였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인간화에 완전히 성공한 우사에게 이 일을 죄다 미루긴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나중의 일이다. 내가 이제 열여섯 살이니, 지금의 우사는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는 데만 그치는 정도다.

가끔 우사는 내 앞에서 인간의 모습을 했는데, 그 모습은 아무리 잘 쳐줘도 뱀 정령 정도였다. 손등과 목덜미에 뱀 비늘이 자잘하게 남고 동공도 세로로 길쭉하기 때문이다.

우사가 인간으로 변용하는데 완벽해지려면 못해도 1년은 더 있어야 한다.

꿈에선 내가 열일곱 살이 되어야 우사의 인간화가 완벽해졌으니, 그때까진 이 잡일이 전부 내 몫이 될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승님은 우사만 위하고 나는 몸종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라도 스스로를 위해야겠단 생각에 내 감정만 그렇게 아득바득 봤던 걸까.

어쨌든 이젠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속만 보지 않기로 했다. 그 첫걸음이 바로 단애약수 음용이 될 거다. 단애약수를 마시면 적어도 내 역린은 사라지리라.

그러면 더는 우사를 봐도 짜증이 안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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