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72화
“나 또 잠깐 나갔다 올게.”
“이번에는 또 어디로요?”
레이븐이 어디 나갔다 온다는 게 뭐 하루 이틀이 아니다. 하지만 이 번만큼은 그도 찔끔할 수밖에 없었 다. 평상시라면 제이나 혼자서 째려 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었 다지만 지금은 무려 세 쌍의 눈동자 가 째려보았기 때문이다.
제이나 그리고 로서진과 서천영.
금색 별 마탑주의 집무실은 굉장히 넓고,빈공간이 많았다. 거기에 책상 한두 개 갖다놓는 것쯤이야 일도 아 니었다. 그러므로 레이븐은 서천영 을 자신의 집무실에 데려와 놓고 인 수인계를 하기로 결정했다. 고작 열 댓쯤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소녀에 게 뭔가 막중한 임무라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무려 상 대는 드래곤이다.
그리고 그 드래곤이라는 놈이 자신 에게 일을 대거 떠넘기고선 어디로 도망가냐는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자 그냥 말없이 빠져나갈 수도 없
“아무래도 스승님을 찾아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에니안 님? 갑자기 왜……
“뭐,그 놈들에 대해서라면 스승님 이 좀 더 잘 아시지 않을까 싶어 서.”
일곱 다리의 연결자. 비록 그들의 존재를 몰랐을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천영에게 금색 별 마탑주 인수인 계 발표를 한 뒤로 어느덧 몇 주가 흘렀다. 그 동안 금색 별 마탑은 정
말 쉴 새 없이 전 세계의 모든 국 가와 정보 통신망을 연결하여 그림 자 속에 숨어든 조직을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일곱 다리의 연결자뿐 만이 아니라 골칫덩어리였던 거대 마피아를 대거 몰살시키기도 했고, 미궁 속으로 숨어든 암살자 집단을 찾아내기도 했으며 일곱 다리의 연 결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불법 흑 마법사의 마탑을 무너뜨리기도 하였 다.
현 사회는 정말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히도 금색 별 마탑주가 제일 바쁜 것은 당연했지만 대충의 일은 간부진과 제이나가 해결해줄
수 있었으며 로서진 또한 능력이 출 중했고 새로운 마탑주로 지목되고 있는 서천영이 어디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금색 별 마탑에 계속해서 체류하고 있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 었다.
“녀석들의 본거지를 전혀 찾을 수 가 없어.”
그리픈은 넓다. 그것도 심각하게.
지구보다도 훨씬 넓은데,인공위성 같은 장비도 없으니 작정하고 숨어 든 그들을 쉽사리 찾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레이븐은 자신 의 스승에게 물어서,길르텐 펄 리 쉬가 숨어있을 만한 곳을 여쭤보기
로 한 것이다.
“그런 거라면 뭐……
서천영은 반쯤 죽은 눈으로 깃털 펜을 끼적였다. 예쁘장한 얼굴이 피 곤으로 찌든 모습은 퍽 안타까웠으 나,그 모습조차 반전 매력이 있어 서 그를 보기 위해 마탑의 직원들은 마탑주 직행 보고서를 서로 너도나 도 직접 올리겠다며 다투고 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무슨 일 있으면 이걸로 연락하 고.”
“네.”
레이븐이 휴대용 통신 마법이 인챔
트 되어있는 명함을 흔들며 사라지 자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 빠져나온 레이븐은 즉시 스텔라아우렘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 트를 찾아갔다. 무려 금색 별 마탑 주가 직접 찾아오자 마법사들은 즉 시 그를 최우선적으로 이동할 수 있 도록 해주었다.
순식간에 에니안이 머물고 있는 마 녀의 숲 근처로 이동한 레이븐은 하 늘 높이 날아을라 숲을 관통했다. 원래라면 마녀의 모자를 쓰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영원히 헤매게 되겠 지만 레이븐은 예외였다. 그에게는 반쯤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녀의 숲에 가뿐히 진입하자,마 녀들이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여전히 미움 받고 있구만.’
어쩔 수 없다. 마녀들은 외부인, 특히 ‘남자’를 매우 꺼려했다. 아주 먼 과거에 인간들에게 좋지 않은 짓 을 워낙 많이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들은 단 한 번도 외부인 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니 레이븐 이 아무리 오래 에니안의 제자로서 이곳에서 지내왔다 해도 왕따를 당 하는 것만큼은 면할 수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걸어서 나무의 꼭대기 위로 올라가자 에니
안이 마중 나온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세상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있을 것처럼. 마치 마음속에 티끌 하나조 차 묻지 않은 성자라도 되는 것처 럼.
“스승님.”
“그래,오랜만이구나. 들어오거라.”
에니안을 따라 들어가자 이제 막 데워진 듯한 차가 찻잔에 담겨있었 다.
레이븐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스승의 얼굴빛이 어쩐지 어두웠다.
“그 아이 때문에 찾아왔구나.”
“그렇습니다. ……해서 ‘일곱 번째 통로’의 사용을 허가해주셨으면 합 니다.”
“그거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설마 레이븐 너,직접 찾아갈 생각 인 게냐?”
레이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안 된다. 너무 위험하다. 그러다 가, 길르텐과 마주치기라도 하 면……
“예,그걸 원합니다. 저는 금색 별 마탑주의 자리에 앉은 채 여태 너무
안이하게 살아왔습니다. 진작 그녀 를 찾아내서 견제했어야 하는데…… 저는 지금 일곱 다리의 연결자라는 단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 습니다.”
에니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 다. 애초에 레이븐에게 길르텐 펄 리쉬를 꼭 찾아내서 감시하라고 했 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에니안은 이 숲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이다. 몸 상태도 온전치 않아 그녀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레이븐에게 모든 것 을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레이븐이 위험에 처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님.”
레이븐이 부르자,에니안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벌써 50년도 더 전 에,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눈동자였 다. 레이븐의 눈빛은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올 곧은 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 는 오로지 레이븐의 그러한 점 하나 만을 믿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는 에니안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 았다. 그저 그는 이제 자신만의 선
택을 하려고 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스승님은 그마저도 저 지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 대륙 에,그녀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레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레이븐은 에니안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곱 번째 통로’역시 사실 레이븐 이 사용하고자 하면,얼마든지 몰래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레이븐이 에니안을 찾아 온 이유.
‘아무래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 나…….,
그는 작별인사를 하러 찾아온 것이 었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서천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으며 마탑의 옥상으로 올라섰다.
원래는 레이븐에 의해 소개받은 장 소였지만 지금은 서천영이 더욱 애 용하고 있었다.
옥상에는 이미 와있는 사람이 있었 다. 네청이었다.
잔잔한 가을바람에 기다란 흑발을 휘날리며 그녀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영은 슬쩍 그녀의 옆자리 에 가서 앉았다.
“여기서 뭐하세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이요?”
“그래.”
천영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무것 도 없이 새파랗다. 감수성이 메마른 천영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단풍잎 떨어지는 것만 보 아도 눈물을 터뜨린다지만 말년 병 장 시절의 서천영은 떨어지는 단풍 잎을 조심하기 위해 후임들을 시켜 단풍잎을 모조리 쳐낸 경험밖에는 없었다.
‘신선들은 뭔가 느낀다는 건가
따지고 보면 서천영도 신선에 가까 웠다. 비록 얻어 걸린 신선이었지만. 하지만 오리지널 신선은 뭔가 달라
도 다른 모양이다.
“알고 있느냐? 용이 되면 저 하늘 너머로 날아갈 수 있다고 하더구 나.”
“하늘보다 높이…… 우주여행이 요?”
“후후,그래. 과학자 혹은 마법사들 은 그런 단어로 표현하고는 하지.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단어와는 느 낌이 다르다.”
우주여행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 었다. 그저 실현이 불가능할 뿐인, 과학으로 설명이 어느 정도는 가능 한 단어였다.
“이 세상에는 ‘하늘’이 참으로 많 단다. 붉은빛이 감도는 하늘과 천둥 이 내려치는 하늘,달이 11개나 떠 있는 하늘과 3개의 대지를 모두 아 우르는 하늘까지. 이 세상엔 수많은 ‘하늘’이 존재한다. 그리고…… 용은 그 하늘을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 지.”
누군가는 하늘,누군가는 차원,누 군가는 세계,누군가는 별. 수많은 단어로 불리고 있지만 그 사이를 여 행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심지어 과학기술 하나만으로 신의 영역까지 넘보려 했던 지구조차 우주여행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용은 가능하다. 오로지 드 래곤만이 할 수 있다.
네청은 지금 그리 이야기하고 있었 다.
“후후,그렇게 불안한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금 당장 용이 되는 것보다도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즐겁구나.”
어느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천영 이 고개를 푹 숙이자 네청이 그리 말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엔 그저 용이 된 어린 존재이 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접근했다.
하지만 함께하면 할수록 드래곤이 아닌 다른 이유로 그저 서천영이라 는 존재 자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이끌려 그와 함께했다.
네청은 그저 천영과 함께 있는 것 이 즐거웠다.
“하지만…… 조급하지 않으세요? 그때,그,이무기……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구 나.”
“……그게 끝이에요?”
“그럼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그 이무기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내가 실패하리란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지 않느냐?”
맞는 말이었다.
천영은 내심 네청이 호수 아래에서 영원히 찌꺼기 차원을 떠돌고 있는 이무기를 보며 마음이 상했을 것이 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가 가진 멘탈은 상상 이상으로 튼튼했다. 그 이무기는 그 저 실패한 존재일 뿐이다. 허나 나 는 성공할 것이다.
‘그렇군……
정작 네청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파트라슈의 말이 맞았다. 괜
히 천영 혼자 담아두고 있었다. 그 는 너무 상황을 연역적인 추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과거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에 실 패했다. 그리고 네청 역시 이무기이 다. 그러니 네청 역시 실패할 것이 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계속 해서 머릿속을 헤집었던 것이다. 하 지만 이 전제는 정확하지 않았다. 대전제가 고작 단 한 번의 실패 사 례일 뿐이다.
그 이무기와 네청의 공통점이라고 는 고작 ‘이무기’라는 사실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네청은 실패한 이무기를 보
았다 해서 본인이 실패할 것이라는 염두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 다.
“하하.”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었 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은 여전히 사고방식이 인간 적이야.
파트라슈가 그리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천영을 나무라지 않는다.
사고방식이 인간적인 드래곤.
그 또한 하나의 매력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