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79화
49장 그렇게 1년이 흐르고(1)
낡은 천 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저잣거리를 거닐다가,익숙한 얼굴 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주점의 외부 테이블에 다가갔다.
“한드손,오랜만이야!”
“오오,킬리윤! 이게 얼마만이야!”
“하하.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 군.”
사내들은 서로 오랜 시간 알고 지 내던 사이였는지 환하게 웃으며 서 로를 반겨줬다.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건네려던 한드손은 오랜만에 만난 친우 킬리 윤의 오른손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 게 깨달았다.
“자네,팔은 어쨌나?”
“……어쩌긴,록 제국에 두고왔지.”
“자,자네…… 설마 그 사건에 휘 말렸던 겐가?”
그 사건.
한드손이 말하고 있는 사건이란,1 년 전 록 제국의 수도 블렝시움이 단 30분 만에 ‘드래곤 슬레이어’라 는 악마에게 함락당한 끔찍한 사건 을 일컫는다.
하지만 킬리윤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말게. 내가 팔을 잃은 건 다른 이유에서야.”
“다른 이유라면?”
“……음모론에 휘말렸어.”
“음!”
결국,악마가 아닌 인간에 의해 팔
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록 제국의 법은 엄격했다. 또한, 가차 없이 형벌을 내리기로 유명했 다.
킬리윤의 오른 손목이 잘려 나간 이유는 다름 아닌 ‘절도죄’였다.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못하도록 그 오른손을 아예 잘라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킬리윤은 억울했다.
그의 직업은 마나석 세공 장인으로 서,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마 정석이 아닌 마나를 품은 자연의 돌 맹이를 세공하는 것에 바쳤다.
즉,세공은 그의 인생이나 다름없
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재능은 굉장히 뛰어났다.
마정석이 아닌 무려 마나 그 자체 가 뭉쳐서 결정을 이룬 마나석을 다 룰 줄 아는 세공 장인은 극히 드물 었다.
결국 록 제국의 수도 블랭시움으로 스카웃을 받은 킬리윤은 고향을 떠 나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도시는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이었다.
도시에서는 킬리윤처럼 뛰어난 장 인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장인들은 자신들보다 뛰어
난 장인을 원치 않았다.
온갖 음모론과 사기, 속임수,폭력 에 시달리던 킬리윤은 마지막까지 억척같이 버텨냈지만 결국 장인들의 사기극으로 인해 절도 범죄자로 몰 려,오른손이 잘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뭐,내게는 행운이나 다름 없었지.”
“……그래. 그래도 이렇게,살아 있 는 게 어디인가? 나는 자네가 세공 을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긴다는 사 실을 알지만,나는 자세의 세공 능 력이 아닌 자네가 살아 있는 그 자 체가 더욱 중요하다네.”
“하하하……. 고맙네,정말 고마 워.”
일 년 전.
록 제국에서 일어난 희대의 비극.
킬리윤은 록 제국의 수도가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침략을 받기 직전,쫓 겨나고 말았으며 덕분에 이렇게 목 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킬리윤과 한드손의 재회를 지켜보 던 눈치 없는 술주정뱅이 하나가 불 쑥 끼어들었다.
“이야,자네 예전에 본적 있었지. 벌컥,크하! 술맛 쥑이는군.”
“아,네. 오랜만이군요.”
그닥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기에 킬 리윤은 인상을 찌뿌렸지만,술주정 뱅이에게 그런 것을 눈치 첼 만한 능력은 없었다.
“크크크, 록 제국의 수도에서 왔다 고? 자네,그럼 그것도 봤겠군! 전 설 속의 드래곤 슬레이어, 마스터 스피루나를!”
순간,주위가 고요해진다. 주정뱅이 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킬리윤에게 모여들었다.
점장이 헐레벌떡 나와 술주정뱅이
를 살짝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끌 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은근슬쩍 킬리윤을 쳐다보는 것이 본인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 였다. 모두가,마음속으로 궁금해 하 고 있었다.
대체 드래곤 슬레이어는 무엇이었 단 말인가.
제국의 수도를 30분 만에 멸망시 킨 그것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 가.
킬리윤은 피식 웃었다. 그들의 심 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이 상황이 웃겼다. 그들에 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킬리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노심초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킬리윤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그에게 있어서도 상 당히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그는 그 ‘악마’에게 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악마보다도 더욱 악마 같은 인간들 에게 배신당하고 돌아온 것이 더욱 큰 상처였다.
다만,이야기를 하기에 문제점이 있다면.
‘그런 놈을 실제로 보고서도 살아 남은 생명체가 있을 리 없잖아
그랬다.
킬리윤은 ‘악마’와 ‘용’이 싸우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다만 그 역시 도시를 떠난 뒤 뒤 늦게 소식을 접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런 초월적인 존재들의 싸 움을 목격하고서 살아남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지만 킬리윤은 어깨를 으쪽했다. 이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주목한다 생각하니,거짓말이라도 쳐서 이야
깃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요,봤습니다.”
“오오. 어땠지?”
“저도 멀리서 봤기 때문에 정확히 는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덩치가 성채만큼 거대했고,피부가 살아 있 는 것처럼 꿈틀대더군요. 정말 흉측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는 것만으로 도 산을 가르고 하늘을 꿰뚫는 것 이,어찌나 무섭던지.”
“오,오오오.”
킬리윤이 거짓말에다가 과장까지 보태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자, 사람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느 사이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죄 다 킬리윤 쪽으로 몰려들어 있었다.
머나먼 나라, 록 제국의 수도,그 것도 용과 악마의 대결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라니.
평생을 술 안줏거리로 삼아도 부족 할 것이다.
“그,그럼. 용은 봤나? 서천영,서 천영은 어떻게 생겼지?”
그리픈 대륙의 유일한 드래곤.
서천영.
킬리윤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틀림없이 봤습니다. 아주 멀리 서 실루엣만 조금 본 것이 끝이지만 요.”
킬리윤이 긍정하자,누군가가,정말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그 소문은 사실인가? 용이,두 마리나 존재한다는 이야기 말일세!”
당연하지만,킬리윤도 모른다. 아니 솔직히 킬리윤 역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1년 전 그 사건 이후로 그리픈 대 륙에는 ‘두 마리의 용이 힘을 합쳐 악마를 물리쳤다’라는 소문이 돌고
돌았는데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았 다.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정부는 모 든 사실을 숨기고 있었고,또한 서 천영은 그 일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서천영의 비서 로서진은 대외적으 로 ‘악마와의 대결은 별로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변해 주 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의구 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기에,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용이 두 마리나 있을 리가 없지.’
혹자는 용이 아홉 마리나 되어,그 들이 모두 합공을 하여 드래곤 슬레 이어를 차원계 넘어로 보내 버린 것 이라고도 말한다.
혹자는 애초에 용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혹자는 서천영만이 유일한 용이라 고 했으며,
혹자는 용이 두 마리나 되어,그 중 하나가 세상의 그림자 속에 숨어 세상을 지키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 어떤 이야기도 믿을 수 없었다. 전부 거짓 소문에 불과했다.
하지만,소문이라는 것은 그리픈
대륙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니,그 호기심이 얼마나 강렬 한지는 무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킬리윤에게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킬리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용은 틀림없이 서천영 하나입니다. 그가 드래곤 슬레이어 를 사냥했습니다.”
“에헤이,역시 그럼 그렇지.”
“내 말이 맞다니께!”
“아,그려?”
“예,서천영은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일 것입니다. 혼자서 록 제국을 멸망시킨 악마를 쓰러뜨렸 죠.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후로도 사람들은 킬리윤에게 일 방적으로 질문을 던졌고, 그는 텅 비어있는 오른 손목을 쓰다듬으며 모두 대답해 주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만 남게 된 킬리윤은 술을 주문 했다.
“예, 금방 갑니다요.”
킬리윤 덕분에 주점은 오늘 아주 장사가 잘 되었다. 그에게 서비스라
도 해주지 않으면 수지타산에 맞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예 서비스로 고기까지 구워 주리 라 마음먹은 점장이 안쪽으로 사라 지자 킬리윤은 맹물을 홀짝였다.
저벅.
멍하니 앉아 있던 킬리윤의 곁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자신의 테이블 옆에 멈춰선 누군가는 온몸 을 검은 로브로 칭칭 둘러싼 채였 다.
척 봐도 수상해 보였으나,사람들 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당신,정말로 서천영을 봤습 니까?”
“예? 예,물론이죠.”
분명 듣기 좋을 정도로 예의바른 어조였으나,‘서천영’이라는 단어가 입에 들어오는 순간 어째서인지 그 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 같았다.
“거짓말. 서천영이 혼자서 그 악마 를 상대했을 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저는 똑똑히 봤습니다. 서 천영 님은 이 대륙을 지켜주는 수호 자라구요.”
“하하하!”
대륙을 지켜주는 수호자. 그 말에 상대방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웃음소리라, 자연히 시선 이 몰려들었다.
“다,당신 미쳤습니까?”
“예. 그 질문을 자주 듣는 것으로 보아,저는 정말 미쳤을 수도 있군 요. 그럼 저도 하나 물어보죠.”
그렇게 말하며,그 사내는 로브를 걷었다.
정신 나간 행동을 하는 것과는 달
리 굉장히 빼어난 외모를 가진 미남 자였다.
그 사내, 예런은 손가락 사이로 마 법펜을 굴리며 씨익 웃었다.
“만약 제가,이 마을을 30분 안에 통째로 멸망시키면 서천영이 찾아와 서 저의 복수를 해줄까요?”
“그게 무슨……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식은 그런 놈입니다. 자기 명성에 도움이 될 만한 짓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 고,설령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 는 일이라도 아랑곳 않고 저질러 버 리지요.”
뿌득,예런은 이를 갈았다.
벌써 2년도 더 전의 일이다.
로드웰 마법전에서 서천영에게 창 피를 당한 일.
만약 그가 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면 덤비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작 학생일 뿐인 예 런의 도전을 말없이 받아주었고,마 법전에서 역사상 전례 없을 정도로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그를 무 참히 패배시켰다.
‘이건 모두…,모두 서천영 때문이 야.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이……
갑작스레 화가 솟구쳐 올라오자 예 런은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사한 웃음이었지만,킬리윤은 그 미소 안에 감춰져 있는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진 모르 겠지만,천영님은 틀림없이 올 겁니 다!”
“옳소!”
“당신,누군진 모르겠는데 용을 흉 봤다가는 천벌을 받을 게야!”
주변에서 엿듣고 있던 주민들까지 예런을 나무라자,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한번 실험해 보죠. 마침 저도 궁금했었거든요.”
“뭘 실험한다는 겁니까?”
“자,여기 타이머도 있습니다. 정확 히 30분 만에,이 마을을 박살내보 죠. 과연 서천영이 올까요?”
“당신,장난이 도를 지나쳤……
툭.
예런은 테이블 위에 타이머를 올려 놓았다. 숫자 30:00이 29:59로 바
뀌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육중하 게 가라앉았다.
“지금부터,시작합니다.”
더 이상 대륙은 안전하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차원에서 찾아 오는 외계의 괴수들,
그리고 그런 차원의 문을 열어 평 화를 해치는 자들.
‘일곱 다리의 연결자’
만약,수상한 사람이 보인다면 바 로 보안 코드 1109로 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흠.”
세상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다. 요 즘 고개만 돌려도 여기저기 붙어있 는 포스터였으나,사람들에게 그 위 험도를 강조하는 데에는 실패한 모 양이다.
일곱 다리의 연결자라는 존재가 민 간인들에게 공개된 지도 벌써 1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이계로 통 하는 차원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으 며 수많은 마법사와 용병,군인들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지만 그건 그쪽 세계의 일이다.
1년 전의 A등급 게이트 이후로 C 급 이상의 게이트가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대부분은 피해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마당이라 위기의 식이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 다.
딸기 아이스 샌드위치를 먹으며 쥬 스를 쪽쪽 빨던 천영은 ‘대륙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라는 제목의 포스터 위에 누군가가 빵집 광고를 덧붙이는 것을 목격했다.
‘세상 참,평화롭구만.’
금색 별 마탑의 예비 마탑주로서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는 천영이기 에 이계와의 전쟁터 또한 자주 보아 왔다.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끔찍하기 그지없는 장소.
그렇기 때문에 천영은 현 그리픈 대륙이 평화롭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천영 은 현 그리픈 대륙이 평화롭다는 사 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참 모순된 문장이지만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 군인들은 그냥 노예 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지.’
이곳의 군인들은 정말로 영웅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이 있기에,민간인들이 평화롭 게 지낼 수 있다.
빵집 소녀가 몰래 포스터를 떼어가 는 일도,동네 꼬마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며 울어대는 일도,오늘 아침 메뉴가 맛이 없다며 화를 내는 일꾼도,날씨가 더워져서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솜 장사꾼도.
평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상적인 불평을 할 수 있는 것이
다.
군인들이,절대로 타차원의 괴수들 을 내륙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철통 같이 방어를 해주고 있는 덕분에 사 람들은 오늘도 따스한 햇살을 맞이 하며 아침밥 고민 따위를 할 수 있 다.
-주인,웬 꼬마가 주인을 노려보는 데?
“알아.”
반쯤 찢겨 나간 포스터를 보던 천 영은 슬쩍 눈길을 돌렸다.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천 영을 멀뚱멀뚱 올려보고 있었다. 그
것도,바로 지척에서.
‘날 쳐다보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천영은 슬쩍 눈동자를 내렸다.
딸기 아이스 샌드위치.
저 꼬마는 샌드위치를 쳐다보고 있 었다.
-먹고 싶나본데.
딸기에다가 아이스크림,거기에 부 드럽고 말랑말랑한 빵이 첨가되니 어린 아이들이 홀리는 것도 이해는 간다.
“먹고 싶어?”
“응! 예쁜 언니야.”
순간,천영의 표정이 싸악 뒤바뀌 었다.
파트라슈는 그런 천영의 모습을 보 면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 레 저었다.
-나 참……. 거의 3년째인데 적응 될 때도 되지 않았어?
파트라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천 영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웃었다.
“나는 언니가 아니라 오빠야. 오빠, 하고 불러봐. 그럼 이거 다 줄게.”
두 입 밖에 먹지 않은 샌드위치다.
이걸 다 준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굉장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 으나,
“엄마가 언니한테는 오빠라고 하는 거 아니랬어. 우리 오빠도 막 혼내.”
“……나는 언니가 아니라 오빠니까 괜찮아.”
“안 괜찮아!”
“그럼 이거 안 준다?”
“우에에엥!”
“아,알았어! 줄 테니까 울지 마!” 천영은 괜시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린 애를 울리는 파렴치한 남자로
보이지는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 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결국 꼬마에게 샌드위치를 뺏긴 천 영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 년 동안 키도 꽤 컸는데 말이 지……
아주 조금,크긴 했다. 진짜 조금.
나이(레벨)도 어느덧 300을 넘어섰 고, 덕분에 본체는 물론 휴먼 폼의 키도 조금이나마 커졌다.
얌전히 앉아있으면 그 성숙한 분위 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와서,주변 사 람들이 말하길 ‘입만 열지 않으면’
성인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천영이 꼬마 애를 데리고 쩔쩔매고 있자,멀리서 로서진이 잘 빠진 정 장을 입은 채 샐러리맨 워킹으로 뚜 벅뚜벅 걸어왔다.
그녀는 훌쩍이며 샌드위치를 먹는 꼬마를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내가 안 울렸어. 이 꼬맹이가 혼 자 운 거야.”
“누구나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곤 하죠.”
로서진은 꼬마의 머리를 살살 쓰다 듬으며 달래주었다.
천영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얼굴 로 쳐다보았지만,별다른 말을 하지 는 않았다.
“그나저나,준비는 끝나셨나요?”
“진즉에.”
“정말요?”
로서진이 표정을 찌뿌린다.
천영의 복장은 그 장소에 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는 봄이니만큼 가벼 운 복장(백화연의 패션)을 택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너무 가벼운 것이 문제였다.
“최소한의 예는 갖춰야죠.”
“이거 입으면 돼.”
천영은 벤치에 놓여 있던 로브를 툭툭 쳤다.
“……맞는 말이긴 하네요.”
로브를 입게 되면,전신을 거의 가 리게 되어서 천영이 안에 뭘 입었는 지 보이지 않는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로브가 사업가 의 정장과도 같은 역할인 것을 생각 하면,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언니들,어디 가는 거야? 옷 완전 예쁘다.”
“나는 오빠……
“응,우린 엄청 중요한 곳에 간단 다.”
“그래? 저 예쁘지만 못된 언니도 같이 가?”
“아니 그러니까……
“그래. 사실 저분이 주인공이거든.”
꼬마와 로서진의 대화에 천영이 끼 어들 새는 없었다.
“어디 가는 건데?”
순진무구한 얼굴로,꼬마가 천영에
게 물었다.
그에 천영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 했다.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최 초로 발생한 것이니만큼 적절한 단 어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지구에서 살던 시절 들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이 상황에 딱 틀어 맞는 명칭.
“정상회담.”
오늘은 전 세계 각 국가의 수장이, 최초로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