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선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
“2위와의 격차는?”
피트 월로 다가선 윌리엄 스메들리. 곧 서준하의 피트 스탑 타이밍이 온 듯 보였다. 캡틴의 말에 아론이 경쟁 팀 선수들의 랩타임을 살피는데,
“11랩, 현재 11초정도 차이납니다.”
정확히 레이스 시작 절반 동안 무려 11초라는 격차를 벌려낸 서준하. 이는 곧, 몬차의 모든 턴에서 다른 참가자들보다 0.2초 이상 빨랐다는 사실과도 같다.
“10랩과 11랩 준하의 랩타임이 일정합니다. 타이어 교체 타이밍이 된 것 같습니다!”
타이어가 한계에 다다르며 집중력마저 슬슬 떨어지는 시간. 게다가 찌는 듯한 열기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번 랩 끝나고 곧바로 복귀시키는 게 낫겠구만. 피트 크루는 타이어 체인지 준비하게.”
윌리엄의 말이 끝나고 서준하에게 인 랩 오더를 날리는 롭. 서준하 역시 원했던 타이밍으로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무더위 속 20분 동안의 레이스는 레이서의 진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서준하, 파라볼리카 진입. 피트 인 진입 7초 전, 미캐닉 크루 박스 대기!”
피트 월에서 떨어진 오더와 함께 타이어와 휠건을 미캐닉들이 정해진 위치에서 섰다. 박스 입구에 정지한 채 서준하를 기다리는데,
“온다!”
곧이어 등장한 파란색 포뮬러카. 스메들리 피트 박스에 엄청난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이이이잉.
척.
드르르륵.
차량이 박스에 정확하게 정지하자, 곧바로 타이어 체인지에 들어간 10명의 미캐닉 크루. 프론트와 리어에 붙은 잭맨들이 차량을 들어올리고, 차량 좌우에 붙은 휠 거너들이 기존 타이어를 떼어냈다.
“리어 피니시!”
“프론트 피니시!”
전후좌우, 각자의 임무를 완수한 미캐닉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리더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레이서 스타트!”
뒤쪽에서 들어오는 다른 차량이나 피트 레인 상황을 살핀 롤리팝맨이 레이서에게 출발을 오더를 내렸다.
부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잉.
“10초 231!”
박스에 정지한 순간부터 다시 피트 레인을 나서기까지의 기록. F1 팀에 비하면 네다섯 배 느린 기록이지만, F3 참가팀 가운데선 훌륭한 기록이다. 교체 시간을 체크한 헨리가 미캐닉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아론, 현재 레이스 상황은?”
피트의 역할은 레이서에게 서킷의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윌리엄의 말에 엔지니어들이 재빠르게 상황을 체크하는데,
“현재 1위 제프, 2위 페트로. 그뒤로 파비앙, 강민수, 제이크, 데니스입니다.”
“프리마는 아직 안 들어간 건가?”
“그렇습니다. 두 선수 아직 타이어 교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랩과 다음 랩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준하가 빠진 사이 선두에 올라선 프리마 팀. 미디움 타이어를 장착했던 두 선수가 최대한 타이어를 사용할 것으로 보이는데,
“오케이, 지금 바로 출구 상황 전달해.”
피트 스탑 이후 레이서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는 피트 레인 출구에서 맞딱드리게 될 차량의 유무. 아웃 랩과 동시에 추월과 방어를 할 수도 있으므로, 레이서가 미리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제이크와 데니스가 스타트라인을 통과했습니다! 5, 6위와 만날 것 같습니다...!”
몬차의 피트레인 출구는 스타트라인보다 레이스 방향 쪽으로 조금 앞에 있다. 서준하와 제이크가 만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아웃 랩 스타트! 준하가 서킷에 올랐습니다!”
아직 피트스탑에 들어가지 않은 차량과도 가까워지는 서준하. 긴장된 스메들리 팀원이 피트 레인 출구로 시선을 옮겼다.
***
쎄에엥.
제이크의 윙미러로 보이는 파란색 포뮬러카. 홈스트레치를 최고속으로 달려온 제이크가 이제 막 속도를 높이는 서준하를 앞질렀다.
-이번 랩이 마지막이다, 제이크. 타이어 교체를 준비하도록!
콜린 팀 엔지니어로부터 떨어진 인 랩 오더. 교체 직전 마지막 바퀴인만큼 제이크는 과감하게 타이어를 사용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1턴 시케인 진입에서 풀브레이킹하며 재가속 타이밍을 재던 제이크. 시케인을 돌아나갈 때쯤 주위로 또 다른 포뮬러카의 배기음이 들려왔다.
“스메들리?! 벌써?!”
시케인 탈출 이후 더 크게 울리는 배기음. 조금씩 자신과 가까워지던 파란 포뮬러카가 어느새 자신의 뒤에 붙었다.
-서준하가 붙었다. 블로킹에 신경 쓰도록!
엔지니어의 무전과 동시에 좌측으로 꺾이는 4번 시케인 앞에서 인코스 진로를 막아서는 제이크.
위이이이이잉.
위이잉.
이잉.
제이크를 추월할 듯 말 듯 가까이 따라붙은 스메들리 차량. 어딘가 타이밍을 재는 듯 보였는데,
“들어와 봐...!”
뒤차의 압박으로 조급해진 제이크가 소리를 질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윙미러를 흘겨보는데,
“...!!!”
끼이이이익.
4번 시케인 이후 또 한 번 가까이 붙은 서준하. 다시 한 번 추월할 듯 말 듯한 뉘앙스로 앞차를 흔들어 놓았다.
“이번에는 안 속아, 이 XX야!!!”
지금이 어떤 상황이라도 코리안에게 공간을 내주기 싫었다. 타이어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지금, 제이크가 디펜스에 집중하며 6턴에 들어갔다.
-안 돼!!!
끼이이이익.
6턴 진입에서 브레이킹 포인트를 늦게 잡아버린 제이크. 엔지니어의 무전과 동시에 6턴 바깥으로 크게 돌기 시작하는데,
쎄에에에에에에엥.
자신의 우측, 코너 안쪽으로 번개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스메들리의 포뮬러카. 덕분에 안쪽으로 조향해야 하는 제이크가 스티어링 조작에 실패하며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엄청난 스키드음과 함께 미끄러진 제이크. 그의 차량 주변으로 흰색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휘리리리릭.
“아!!! 제이크가 스핀하며 가드레일을 들이박습니다!”
코너 진입 이후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에 중계진이 크게 놀라고,
“서준하의 날카로운 인라인 오버 테이크에 제이크가 당황합니다!”
“엄청난 테크닉입니다! 제이크의 감속과 조향 타이밍을 완전히 망가뜨렸어요!”
추월할 듯한 뉘앙스로 앞차에 혼란을 가져다준 서준하. 페이스를 무너뜨리며 제이크를 자멸시키는데 성공했다.
“앞선 4,5턴 두 번의 무빙에서 제이크가 완전히 속았거든요? 하지만 6턴은 진짜였습니다! 와, 상대를 이렇게 속이는군요, 서준하!”
서킷 내 중계 스크린으로 조금 전 서준하의 추월과 제이크의 스핀 장면이 리플레이되자, 다시 한 번 열광하는 갤러리들. 해당 영상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한 번 더 까불면 담궈버린다고 했잖아.’
새 타이어와 잠깐의 휴식으로 올라간 집중도 그리고 브레이크 페달 답력(Pedal force) 이 삼박자에 자신감이 극에 달한 퍼포먼스. 서준하의 윙미러로 파손된 제이크의 차량이 보였다.
***
“와우, 방금 봤어?!”
스쿠데리아 페라리 F1 팀의 레이서들. 다음 주말에 있을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위해 훈련을 마치고 몬차 서킷을 찾았다.
“레스모(6 코너) 초입에서 추월 상황 말하는 거지?”
레이스 중반 패독(서킷의 백스테이지로 VIP만 입장가능한 휴식 공간)에 들어온 네 남자가 흥미로운 얼굴로 F3 레이스를 지켜보는데,
“응, 저기 봐, 리플레이 나온다.”
아직 어린 페라리 F1 팀의 써드(Third) 및 테스트 드라이버 에스테반과 장에리크가 조금 전 서준하의 추월 장면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런 두 사람 곁으로 다가서는 팀의 메인 레이서 두 명. 저스틴 페텔과 키만 라이코넨이었다.
“오, 잘 타네. 6턴 진입에서 빠르게 인으로 파고든 다음, 순간적으로 답력을 풀고 살짝 가속하네. 이미 차의 방향을 돌려놨으니까 저렇게 돌아나가는 타이밍이 빠르지.”
파란색 F3 차량의 무빙을 유심히 보던 저스틴 페텔. 참가 선수의 조작을 단숨에 파악해내며 역시나 4회 연속 월드 챔피언 레이서다운 눈썰미를 드러냈다.
“으흠, 으흠. 그래, 멋진 추월이다.”
평소 무뚝뚝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아이스맨(Ice 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라이코넨 역시 그의 주행에 박수를 보냈다. 서준하의 드라이빙 테크닉이 F1 최정상급 레이서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는데,
“앞에 하나 더 넘겠는데?”
페라리 팀의 이목을 끌었던 파란색 포뮬러카. 파라볼리카의 탈출에서 다른 차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간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쎄에에에에에엥.
페텔의 예측대로 한 대를 추월한 파란색 차량이 자신들의 위치한 패독 근방을 최고속으로 지나쳤다.
“콕핏 내부가 한창 뜨거울 텐데. 안 지치나 봐?”
파란 차의 차량 넘버와 함께 전광판을 살펴보는 페텔. 그의 눈에 참가 선수들의 오점이 종종 보였지만, 선두 레이서는 F3 레벨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실수 하나 내지 않았다.
“서준하? 코리아?”
유럼 모터스포츠 무대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아시아 선수.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는 어린 레이서에게로 페텔이 다시 시선을 옮겼다.
“뭐? 저기서 또 추월하겠다고?”
또 다시 시작된 추월 시도. 서준하라는 이름이 페텔의 머릿속을 지배한 순간이었다.
***
“아, 기가 막히네요, 서준하!”
“피트 스탑을 마치고 6위로 복귀한 서준하! 이번 12랩에서 세 명의 선수를 제쳐버립니다!”
제이크, 파비앙, 강민수. 서준하가 추월한 세 선수 모두 인 랩(In lap, 피트 스탑에 들어가기로 오더 받은 랩)을 도는 중이었다. 하지만 타이어가 한계에 달한 선수들을 가차없이 제쳐버리는 서준하.
“프리마 팀은 피트 스탑 타이밍을 한 바퀴 더 늦췄거든요? 이 선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현재 3위에 랭크한 서준하. 선두와 2위 차량과 달리 이미 피트 스탑을 마친 상태. 새 타이어로 교체한 뒤 날라다니고 있는 서준하의 눈앞으로 페트로가 보였다.
“페트로까지 쫓아왔어요오오오!!!”
프리마 팀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 생각보다 서준하의 타이어 교체 타이밍이 빨랐을 뿐만 아니라 새 타이어에 대한 적응력도 남달랐는데,
“서준하! 페트로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갑니다아아아!!!”
아스카리 시케인에 들어가기 전 직선 주로. 서준하가 빠른 속도로 페트로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서준하의 전방으로 보이는 페트로의 리어윙. 시케인 진입을 두고 앞차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리고,
‘이번엔 이쪽이야...!!!’
제프를 앞에둔 페트로는 어떻게든 서준하를 묶어두려고 할 게 뻔했다. 슬립스트림에 들어갔던 서준하. 기민성을 발휘하며 재빠르게 우측으로 튀어나갔다.
훼에에에엥.
구동력이 한계에 이른 페트로의 차량을 손쉽게 벗겨내며 아스카리 시케인의 바깥쪽으로 먼저 튀어나가는데 성공했다.
“기어코 추월해버리네요! 몬차 레이스의 재미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서준하! 갤러리가 환호합니다!”
서킷을 관람하는 팬들에게 가장 흥분되는 일은 바로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추월에 성공하는 것.
“경쟁자에게 자비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제프인가요?!”
피트 스탑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차량에게 자비따윈 없다. 서준하가 제프 슈마허의 포뮬러 뒤에 성큼 다가섰다.
< 이 선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