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들 아직 눈치 못 챈 건가? >
“이번에는 페트로 선수가 피트를 나섭니다!”
“갑자기 이렇게 한꺼번에 출발하니까 저희도 당황스럽네요.”
긴장되는 파이널 퀄리파잉. 좀처럼 나서지 않던 참가자들이 첫 번째 주자의 등장과 동시에 피트 레인 입구로 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블 포인트가 적용되는 라운드인만큼 퀄리파잉에서 최대한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는 부담감도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러면 사실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긴 하죠.”
“음, 제가 볼 땐 많은 경쟁자들이 서준하의 움직임을 기다렸던 것 같아 보였는데요.”
최고 경쟁자인 서준하의 기록을 저지하려는 전략부터, 서준하의 뒤에서 달리는 일이 오히려 순위권을 노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전략까지. 저마다 다양한 전략을 들고 피트를 나선 참가자들이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온통 서준하의 어택 타이밍과 그의 주행 페이스였다.
“가장 먼저 서킷에 등장한 서준하가 워밍업 랩을 돌며 모토드롬 스타디움 섹터의 첫 코너, 12턴 모빌1(Mobil 1)으로 접어듭니다!”
호켄하임링의 12~16턴까지 총 5개의 코너와 피트 레인 입구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모토드롬(그랜드스탠드) 우측 90도로 급격하게 꺾인 12턴으로, 오늘 예선에서 가장 먼저 파란색 스메들리 포뮬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과 다르게 선수들 충분히 워밍업을 해주고 있는 모습인데요. 옵션 타이어를 장착한 참가자들조차 크게 속도를 높이지 않고 있습니다.”
호켄하임링에는 모두 17 개의 코너가 존재한다.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평지에 가깝지만, 작고 좁은 코너들이 곳곳에 배치돼있기에 초반 충분한 적응이 필요한 서킷이다.
“아무래도 다들 먼저 급하게 달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대부분이 라인 공략에 치중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간단한 워밍업을 마치고 뛰어들었던 이번 시즌 퀄리파잉들. 그와 달리 참가자들은 마치 포메이션 랩을 돌 듯 충분히 서킷을 돌고 있었다. 대다수가 매 바퀴 일정한 라인을 그리며 비교적 좁은 트랙폭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돌파할지 탐사에 들어간 듯 보였는데,
“그런데요. 조금 특이한 선수를 뽑자면, 단연 서준하입니다. 이 선수 계속해서 라인을 바꿔타고 있어요.”
미세한 차이였지만, 매 바퀴 특정 코너에서 브레이킹 타이밍, 연석을 밟는 정도, 차량의 방향 전환 각도 등을 달리하고 있었다. 고정적으로 일정한 방식으로 달리는 경쟁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8R. Qualifying Time]
[15 분 : 52 초]
“자, 첫 번째 주자 서준하가 이제 여섯 바퀴를 돌았거든요? 이제 슬슬 속도를 높일 때가 됐는데요.”
빠른 기록대로 예선 순위가 전광판에 표시되긴 했지만, 아직은 저조한 기록이었다. 시작 이후 15분이 지난 상황에 중계진이 어느 정도 어택 타이밍을 예상해보는데,
“말씀하신 순간, 빨라지기 시작하죠?”
캐스터의 말과 동시에 곧바로 서준하를 향해 넘어간 중계 화면. 갤러리들의 환호 없이 포뮬러카들의 배기음만 가득했던 모토드롬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준비를 마친 듯 보입니다.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온 서준하! 홈스트레치를 향해 스피드를 높입니다!”
그러자 서준하의 뒤를 따르던 참가자들 역시 덩달아 스피드를 높였다. 보다 뜨거워진 함성과 더욱 커진 경주차의 배기음이 호켄하임링에 울려퍼졌다.
***
“누가 보면 저 차가 페이스세터(Pace Setter) 인줄 알겠다.”
파란색 스메들리 포뮬러카 한 대의 뒤를 추격하는 네 대의 차량. 모두 서준하를 그냥 두지 않겠다는 모습처럼 어택 타이밍을 동일하게 가져갔다.
서준하가 쿨링에 들어가면 똑같이 속도를 늦췄고, 스피드를 높일 땐 재빠르게 뒤따라붙었다. 덕분에 랩타임 기록은,
[8R. Qualifying Record]
1위. 서준하 1분 32초 292 / 8
2위. 페트로 1분 32초 531 / 7
3위. 제이크 1분 32초 966 / 8
4위. 제프 1분 33초 032 / 8
.
.
“역시 기록은 비슷비슷하네. 10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막판까지 가야 대략적인 순위가 나오겠는걸?”
“지금 잠정 1~3위 모두 우승 후보라는데. 제프, 저 녀석 안 치고 나오고 뭐하는 거야. 호켄하임링 만큼은 폴포지션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오프닝 행사 이후 예선 경기를 관람 중인 슈마허의 동생 랄츠 슈마허와 그의 오랜 동료 팻 시몬스. 이번 시리즈 단 한 번도 폴포지션을 차지하지 못한 제프를 두고 랄츠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확실히 서준하라는 친구는 리듬감이 있어. 탈출 속도랑 주행 라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
2턴을 빠져나가는 파란색 포뮬러카로 시선을 고정한 두 사람. 급감속 구간에서도 분명 강하지만, 결코 급하지 않게 감속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2턴이 꽤 범피(bumpy, 울퉁불퉁한)해서 저긴 속도보단 안전이 중요한 곳이잖아. 밸런스에 치중하는 걸 보니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아. 뒤따라오는 애들봐 봐, 저렇게 불안하게 흔들리잖아.”
독일 GP 우승 경험이 있는 랄츠에겐 레이서들이 사소하게 놓치고 있는 점들이 보였다. 반면, 서준하의 차량에선 눈에 띄게 흠잡을 만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제프도 괜찮게 타는데, 저 친구랑은 확실히 실력 차이가 있네. 오늘도 쉽진 않겠다.”
“흠... 내가 볼 땐 제프도 지금 경험 치고는 엄청 뛰어난 레이선데 말이야. F3에서 저런 상대를 만나니까 빛을 못 보네...”
랄츠의 말에 마누엘 슈마허의 옛 레이스 엔지니어 팻 역시 동의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근데 다들 아직 눈치 못 챈 건가?”
서준하의 주행을 쭉 지켜보던 랄츠. 어딘가 수상한 점을 발견한 듯 보이는데,
“아마 그런 것 같아. 라인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스피드를 높이기 시작했던 7랩부터 현재 7분 가량 남은 시간까지. 두 사람이 주목한 파란색 포뮬러카의 주행 라인은 계속 달라지고 있었다.
“매 바퀴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도, 전력으로 레코드 라인을 공략하는 경쟁자들보다 랩타임이 좋아.”
종료까지 10분 남은 시간동안 연신 플라잉랩을 달리는 서준하의 경쟁자들. 0.5초도 차이나지 않는 기록이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서준하의 폴기록을 넘지 못 했다.
“서킷에 있으면 앞차 라인이 보일 법도 한데...”
“이런 상황에선 눈에 잘 안들어올 거야. 아니면, 앞차가 실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수한다라... 계속 저렇게 달리면서 경쟁자들한테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걸 수도 있겠네...”
팻의 말에 고갤 끄덕이던 랄츠. 실력만큼이나 훌륭한 파란 포뮬러카에게로 계속 시선이 향했다.
“이거 막판에 서준하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을 지도 모르겠는데?”
네 명의 경쟁자들이 더욱 분주한 움직임으로 페이스세터를 쫓기 시작했다.
***
[8R. Qualifying Record]
1위. 서준하 1분 31초 134 / 10
2위. 페트로 1분 31초 600 / 10
3위. 제프 1분 32초 122 / 10
4위. 제이크 1분 32초 694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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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네 바퀴정도 더 돌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아직 순위권에선 제프가 3위에 올라선 것 말고는 별다른 변동이 없습니다.”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참가자들 대부분 전력을 다해 호켄하임링을 공략했지만, 10랩에서 만들어진 기록을 넘어서진 못 했다.
“하지만 지금 타임 로그 보시면, 잠정 폴 기록하고 뒤따르는 선수들 랩타임이 별 차이가 없거든요? 이거 이렇게 되면 결과는 막판까지 봐야합니다.”
“그렇죠. 순위권 선수들이 각각 0.5초 정도씩 차이나는데요. 이건 두 턴 정도만 잘 공략해준다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차이에요.”
이미 지난 시즌 호켄하임링 폴 기록을 넘어선 참가자들. 확실히 이번 대회 참가자들의 실력이 월등히 앞섰다. 중계진의 해설에 호켄하임링이 더욱 긴장감에 휩싸이는데,
“막판 기록을 뒤집으려면 선수들 집중력도 집중력이지만, 타이어가 그때까지 잘 버텨줘야 하거든요? 선수들 관리력도 중요하고요.”
“제가 볼 땐 이번 랩 아니면, 다음 랩에서 많은 선수들이 그립감이 한계에 올 수도 있어요. 늦기 전에 승부를 봐야할 수도 있습니다.”
해설자의 말과 동시에 플라잉 랩을 시작하는 한 선수.
“제프! 제프가 플라잉랩을 달리는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랩이 마지막일 거 같고요...!”
옵션 타이어를 장착한 프리마 팀. 이번 랩에서 최대한 기록을 뽑아내려는 듯 보였다. 제프가 따라붙자 페트로도 타이어를 과감하게 쓰며 플라잉 랩을 달리는데,
“서준하는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고요! 이런 모습이라면 막판에 달릴 것으로 보입니다.”
“서준하가 타이어 관리를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프라임 타이어를 끼고 나온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서준하는 몇 바퀴 더 가능해 보이긴 해요...!”
프리마 팀과 제이크 그리고 파비앙. 옵션 타이어를 장착한 경쟁자 모두 이번 랩 오버 히트해가며 스피드를 뽑아내는데,
“11턴! 서준하가 가장 먼저 진입합... 엥?!”
연속 커브를 돌아 11턴을 빠져나온 서준하. 이어지는 직선주로에서 우측으로 빠지며 속도를 늦췄다.
“차량 문제인가요?! 서준하의 스피드가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뒤이어 미친 듯한 스피드로 11턴을 빠져나온 선수들. 우측으로 빠진 서준하를 제치며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달리는데,
띠링,
순식간에 이어지는 다섯 개의 턴을 돌아나간 서준하의 경쟁 차량들. 전광판에 랩타임이 표시됐다.
[8R. Qualifying Record]
1위. 제프 1분 30초 783 / 12
2위. 페트로 1분 30초 910 / 12
3위. 서준하 1분 31초 134 / 10
4위. 제이크 1분 31초 894 / 12
.
.
“12랩! 순위가 뒤바뀝니다! 플라잉랩에 성공하는 프리마 팀! 단숨에 1,2위를 차지합니다!”
곧바로 넘어간 화면. 잠정 1위 기록을 뺏긴 서준하의 모습이 등장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잉.
-현재 1위 기록은 30초 783. 예상대로 폴 기록 달성 후 곧바로 서행 중. 조금 전 랩에서 오버 히트한 듯 보인다
중계진의 걱정과 달리, 롭의 무전과 동시에 미소를 띄운 서준하.
-2, 3턴 스핀 차량 상황 클리어. 현재 트래픽 이상 없다
스메들리 피트로부터 서킷의 상황을 전달 받은 서준하가 마지막 코너를 빠져나오며 재빠르게 풀악셀을 밟았다.
-종료까지 두 바퀴 가능할 것으로 보임. 지금부터 전력을 다 할 것
지금까진 워밍업이었다. 경쟁자들을 먼저 보내버리자 앞길은 깔끔했고, 달리기 좋아보였다.
4단, 5단... 6단!!!
200km/h가 넘는 속도로 1턴을 빠져나온 서준하. 재빠르게 시프트업하며 무서운 스피드로 다음 코너에 다가섰다.
“허, 빨라요...!!!”
참가자들과 다르게 미디움 타이어를 선택했던 서준하. 탁월한 관리 능력도 한몫하며 그립감이 피크에 오른 타이어로 질주를 시작했다.
“지, 지금까지 보여줬던 스피드랑 너무 다른데요?!”
마치 모두가 이 순간을 기다렸단 듯이 서준하의 질주에 함성이 쏟아져 나오고,
“서준하! 중고속 코너에서 엑셀을 끊는 타이밍이 미친 듯이 날카롭습니다!!”
이십여 분동안 지루했던 트랙 탐사를 마친 서준하가 핫 랩을 시작했다.
“비켜! 아니, 빨리 비켜줘야죠!”
“서준하의 앞으로 청색기가 휘날립니다아아아!!!”
서준하의 스피드에 당황한 마샬들. 재빠르게 교통정리에 들어갔다.
< 다들 아직 눈치 못 챈 건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