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바심과 서두름이 나의 적이다 >
“서준하...! 서, 설마 뒤따라오는 차들을 먼저 보낸 거였어?”
중후반 어택러들의 페이스를 자신의 속도에 맞춘 다음, 본격적인 공략에 앞서 트래픽을 정리하기 위해 뒤차들을 먼저 보낸 서준하.
“차, 차량 문제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엔진에 문제가 생겨 출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줄 알았다. 잘 달리던 차가 피니시 전에 갑자기 멈추는 건 대부분 차량 문제였으니까.
“하...”
제프가 잠정 1위에 올라섰고, 페트로도 좋은 랩타임을 냈다. 행운의 여신이 마지막 기회를 던져준 것 같았지만, 서준하가 다시 달리는 걸 본 조르조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게다가 프라임 타이어를 끼고도 초중반에 그렇게 빨랐단 말이구만...”
프리마 팀 엔지니어들의 따르면 서준하는 미디움 타이어를 끼고 예선을 나섰다. 지금처럼 마지막 두 바퀴에서 플라잉 랩을 노리는 전략이었다면, 연료량 역시 뒤따르는 프리마 팀 차량보다 많았을 터.
“실력 차이가 너무 나는구만...”
아직 제프가 잠정 1위 기록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지만, 서준하가 다시 달리는 모습만 보고도 경쟁팀엔 불길한 예감이 불어닥쳤다.
“조르조! 스메들리 차량 6턴 헤어핀을 빠져나오면서 빠른 속도로 7턴에 접근 중입니다!”
프리마 팀 피트에선 7턴 근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피트 너머 들려오는 함성으로 서준하의 위치가 대략 파악됐다. 그의 질주가 다시 시작되고부터 서준하가 지나다니는 코스 근처로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으니까.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7턴을 공략하는 서준하! 놀랍습니다! 현재 속도는 236km/h! 완만한 코너에서는 결코 감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경쟁 대열에 합류해 달리던 드라이빙과는 대조적으로 상당한 속도로 고속 코너를 빠져나오는 서준하. 코너각이 완만한 곳에선 미세한 턴만 가하며 최대한 속도를 살려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0턴을 빠져나온 서준하, 다음 코너에 들어가기 전 이미 차량의 앞머리를 어느 정도 틀어둔 상태입니다!”
“공식 코너로 지정된 11턴이지만, 서준하에겐 결코 코너로 보이지 않는군요...!”
뒤이어 서준하가 모토드롬 스타디움 섹터의 첫 코너로 들어오자, 관중석은 마치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을 방불케하는 듯한 열광적인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호켄하임링 갤러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린 듯 보입니다!”
많은 한국팬들은 물론 중계진 역시 서준하의 질주를 기다렸다. 트랙의 폭이 급격히 좁아지는 13~17턴으로 진입하는 서준하. 코너각이 큰 코스가 대부분이지만, 빠른 속도로 공략하며 이번 랩타임 기대를 걸었다.
“와, 14, 15시케인 앞에서도 무난하게 가속하는 서준하입니다. 시케인을 만든 서킷 설계자의 의도가 무색할 지경이군요...!”
시케인을 빠져나온 서준하. 살짝 속도를 죽이며 남쪽 코너(Sudkurve) 16턴을 돌아 마지막 코너로 향하고,
“흔들리지 않아요. 경주차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리듬을 타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서준하의 랩타임이 보고 싶은데요...!!!”
갑작스럽게 자빠진다거나 차가 멈추는 일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코스 공략은 더욱 날카로웠고, 페달 조작은 더 섬세했다. 곧이어 스타트라인을 통과하는데,
“1분 29초 001!!!”
전광판 잠정 1위 선수의 이름이 바뀌자, 많은 갤러리들이 방방 뛰기 시작했다.
“서준하 톱 타임입니다! 남은 시간은 2분! 아직 한 바퀴 더 가능하죠...!”
우승 경쟁자들의 차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 서준하가 트랙 레코드를 따내기 위한 최후의 질주를 시작했다.
***
“이쪽으로 올라가시죠, 서준하 선수.”
예선을 마치고 패독 팀 하우스 입구에 들어서자 슈퍼바이져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렸단 듯이 서준하를 맞이했다.
[한국의 히어로, 서준하. 8라운드에서도 폴포지션에 올라...]
해외 유명 모터스포츠 언론의 단독 인터뷰 요청을 비롯해 상위권 포뮬러 팀들의 제안이 쏟아졌다. 단지 경주차 운전만 잘했을 뿐인데, 이곳 사람들은 서준하를 코리아의 히어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Hockenheimring Team House: Smedley Formula British]
한국 언론과 모터스포츠 관계자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F1에 도전하겠다는 서준하의 패기 있는 모습만을 조명하며 성공 가능성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말보다 행동과 성과로 증명하자, 이제는 서준하의 재능을 추켜세우며 마치 한국인 최초의 F1 레이서의 탄생을 예견해왔다는 태도를 보였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저희 쪽에서 처리 가능한 건이라면 곧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언론이나 구단과 같은 큰 집단만 그런 게 아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평범한 사람들마저 서준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저들이 먼저 나서서 호의를 베풀었고, 서준하가 무슨 얘길 꺼낼라치면 귀담아들으려고 했다.
‘이것도 한순간의 실수로 날아가버릴지도 모르는 거지.’
내일이 곧 F3의 마지막 레이스. 6위 안에 들게되면 챔피언 자릴 확정짓지만, 자칫 리타이어라도 하는 순간 챔피언 자린 날아간다. 더 아득한 건, 혹시 모를 크러쉬에 큰 사고까지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상황은 마치 서준하가 전생의 마지막 레이스를 하기 전과도 비슷했다. F1 월드 챔피언 자릴 목전에 두고 사고가 났다. 지금와 돌이켜 보면, 그때처럼 조급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조바심과 서두름이 나의 적이다.’
전생과 달라진 게 있다면, 서준하는 조금 더 침착해졌고, 영리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생엔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역대 최다 F1 월드 챔피언의 기록을 세우겠다는 건 그야말로 레전드 오브 레전드가 되겠다는 말과도 같다. 이는 끊임없이 겸손한 자세로 배우고 실천해야 달성 가능한 목표.
‘이럴 때 일수록...’
이미 한 번 F1에 올랐지만, 환생 후 몇 년간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대한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팀원과 끊임없이 소통했고, 문제점인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매일 아침을 달렸다.
‘방심해선 안 돼.’
아직 해야할 것들이 많이 남았다. 내일 레이스조차 가벼운 마음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이번에도 역시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
“음, 어제 호켄하임링을 찾지 않은 것이 올해 저의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매력적인 보이스와 함께 미소 짓는 흑인 남자. 8라운드 레이스 시작 전 FIA 리포터가 스탠드 곳곳을 돌며 인터뷰에 나섰다.
“사실 포뮬러 3는 어느 팀이 강한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레이서가 최고인지는 잘 알고 있죠, 하하하.”
평소 유쾌한 성격답게 리포터와 농담을 주고 받는 윌 스미스. 리포터가 바로 옆 제프 슈마허를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손으로 가리키자, 윌이 고갤 저으며 나섰다.
“바로 저 선수 아닙니까?”
손을 뻗어 그리드의 가장 앞쪽 프론트 열을 가리키는 윌. 그와 동시에 빛을 받아 번쩍이는 서준하의 모습이 중계 스크린에 등장했다.
“며칠 전 우연히 주행 영상을 접한 뒤로, 서준하 선수의 온보드 영상을 모조리 찾아봤죠. 오늘 서준하 선수의 레이스, 정말 기대되요..!”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F3 시리즈를 찾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지금 한창 F1 시즌이 진행 중이기에 많은 셀러브리티들의 관심은 그곳을 향해 있다. 서준하를 보러왔다는 헐리우드 배우의 말에 모토드롬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는데,
“와, 서준하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군요.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지만, F3 관계자 입장으로서 서준하 선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F1에 비하면 다소 인기를 끌지 못하는 F3 시리즈. 이번 시즌 역대 최다 관중 기록과 더불어 다양한 언론과 인사들이 경기장을 찾자, 중계진 한 명이 진심을 담은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그리드 걸들이 입장하고, 각 팀 참가자들이 그리드에 멈춰섭니다.”
출발 선으로 넘어간 중계 화면. 키가 크고 날씬한 몸매의 금발 여성들이 차량 번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선수들 앞에 섰다.
“아, 서준하 매너도 좋은 것 같습니다. 레이스 시작 전,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사실 저런 것도 눈에 잘 안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서준하의 콕핏 위로 양산을 씌워주는 그리드 걸. 서준하의 고맙다는 손동작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됐다.
“와아아아아아아!!!”
이어서 모토드롬 좌측면으로 넘어간 중계 화면. 대형 태극기의 등장에 한국팬들이 엄청난 환호를 쏟아냈다.
“오늘 마지막 레이스인만큼 참가 팀의 가족 대부분이 호켄하임링을 찾은 것 같군요.”
“가족들이 왔군요. 이 분이 서준하 선수의 할머니라고 하는데요.”
가족들은 물론, 서준하의 스폰 기업과 국내 지상파 방송 관계자들까지.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을 응원하기 위해 많은 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포메이션 랩 시작합니다. 서준하를 시작으로 제프, 페트로, 제이크, 강민수...”
충분히 롤링을 마친 선수들이 다시 그리드로 복귀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둥.
그리드 주위로 흐르는 엄청난 긴장감. 경주차의 엔진음을 제외한 아무런 소음도 움직임도 없었다. 갤러리와 중계진마저 고요한 태도로 스타트라인을 바라봤다.
띠.
띠.
[RPM: 6750]
띠.
[RPM: 6930]
띠.
[RPM: 7440]
띠.
클러치 패들 하나를 쥔 서준하. 나머지 하나는 맞물림 지점을 유지하며 기다리는데,
“라이트 아웃(Lights Out)!!!”
신호등이 일제히 꺼짐과 동시에 첫 번째 패들을 놓았다. 기어가 맞물리는 사이 두 번째 패들을 놓는 서준하.
[Km/h: 102]
약 4.5초 만에 시속 100km. 이어 6.5초 만에 시속 150km를 돌파하는 서준하의 포뮬러카.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출발 신호에 0.1초 가량 늦게 반응한다면 홀샷(스타트부터 첫 코너까지의 주행)에서 대략 7m 이상을 손해 보게 되지만, 반전은 없었다. 남다른 반응 속도로 완벽한 스타트에 성공하는데,
“번개 같은 스피드로 1코너에 진입하는 선수들!!!”
레이스 시작과 동시에 F3 역대 최다 관중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런데,
“아! 뭐죠?! 앞이 안 보입니다!”
“폭죽 연기가 너무 강한데요! 지금 막 1턴으로 선수들이 들어갔거든요?!”
여기저기 화려한 폭죽 연기가 1코너에 가득차올랐다. 그리고,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쿵.
파바바박.
타다다다당.
쿠쿠쿵.
엄청난 스키드음과 함께 연이어 부딪히고 부서지는 소리. 사고를 직감한 갤러리들의 함성이 쏟아지고 모두가 긴장된 표정이 돼버렸다.
“크러쉬! 크러쉬가 난 것 같은데요?!”
시작부터 혼란스러운 상황. 1턴 진입을 살피던 중계진이 카오스에 당황하고 말았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1턴 출구로 향한 중계 카메라. 코너를 빠져나오는 참가자들의 배기음이 점점 크게 들려오는데,
“아!!!”
연기 속에서 화면에 등장한 포뮬러카 한 대.
“카오스를 빠져나옵니다아아아!!!”
스모그 밖으로 서준하의 포뮬러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조바심과 서두름이 나의 적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