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다, 스메들리 >
“아... 오란이 미끄러지면서 뒤따라오던 트레게와 부딪힌 걸로 보입니다. 덕분에 마르코 선수의 프론트 윙도 완전히 박살났고요.”
북쪽 커브(Nordkurve)라는 이름의 호켄하임링의 첫 코너. 무난해 보이는 코너지만, 의외로 레이서에게 느껴지는 압력은 강해서 180 km/h 전후에도 속도감이 상당한 곳이다. 게다가 코너 부근 가득했던 연기가 시야를 가리는데 한몫해 8라운드 레이스 시작부터 크러쉬가 났다.
“마르코의 가족들로 보이는데요. 마지막 레이스의 시작부터 경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슬픔을 감추지 못 하는 모습입니다...”
경주차 레이스는 냉혹하다. 자신의 실수가 아니어도 경기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중계진이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동시에 침울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네덜란드 여성들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엄청난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다친 선수들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서준하 역시 무사히 첫 코너를 돌아나왔지만, 정말 코너 초입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연습 때처럼 이미지 트레이닝하듯 우측 바닥의 빨간 연석 무늬만 보고 감각적으로 빠져나왔다.
“서준하의 뒤를 쫓는 프리마 팀! 그뒤로 제이크와 강민수, 파비앙이 순위 변동없이 달립니다!”
스메들리의 경쟁 팀 코치진 모두 서준하의 리타이어를 바랐다. 특히나 프리마 팀에겐 오히려 좀전과 같은 돌발상황이 내심 반가웠을 정도. 하지만 카오스 속에서도 선두로 나온 건 역시나 서준하였다.
“선두의 서준하 당황하지 않고 이제 2턴을 빠져나옵니다!”
방금 전 첫 코너 상황은 서준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코너의 주의 사항을 신경 쓰며 휠락이 걸리지 않도록, 강하지만 결코 급하지 않게 감속했다.
“아! 2턴을 빠져나오는 페트로와 제이크! 잠시 주춤하며 탈출 속도가 죽습니다!”
카오스 이후 모두가 서준하처럼 침착함을 유지했던 건 아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레이서들은 2턴에서 급브레이킹하다 결국 프론트휠에 브레이크 락이 걸리고 말았다.
“가장 먼저 5턴에 들어가는 서준하. 호켄하임링에서 가장 빠른 구간답게 시원하게 돌파합니다!”
길고 완만한 기다란 왼쪽 커브길을 빠져나가는 서준하. 코너의 에이팩스에서 속도가 200km/h를 넘으며 5턴의 마지막 지점에서 스피드 트랩을 맞이했다.
“놀라운 집중력입니다! 속도가 얼마나 찍혔는지 한 번 볼까요?!”
“264km/h!!! 서준하의 속도에 한국팬들이 열광합니다!”
“뒤따라오는 선수들도 빠르지만, 서준하의 속도가 조금 더 빠르군요!”
추월 말고 모터스포츠의 또 다른 재미는 경주차들의 스피드를 감상하는 일. 귀를 찢을 듯한 포뮬러카의 굉음이 서킷의 서쪽 끝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제 호켄하임링 최대 추월 포인트 6턴 헤어핀 코너로 서준하가 접어드는데,
“지난 7번의 레이스에서 참가자들이 깨달은 사실이 있지 않겠습니까? 서준하를 제칠 생각이 있다면, 그건 무조건 스타트 이후 초반 세네 바퀴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거죠...!”
“그렇죠. 그 세네 바퀴 안에서도 최고로 확률이 높은 코너에서 시도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저 6턴 헤어핀에서요! 자, 볼까요?!”
6턴 진입 전 260km/h에 육박하는 속도를 내지만, 6턴에서는 60km/h 이하로 감속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강한 브레이킹이 필수다. 덕분에 추월 공식에 들어 맞는 상황이 줄곧 등장하는 곳인데,
“제프가 심상치 않아요..!”
중계진의 말처럼 코너 진입을 앞두고 뒤따르는 프리마 팀 선수들에게 과감한 오버테이크를 성공시키라는 오더가 내려졌다.
“6턴에 들어간 서준하! 파워 브레이킹하며 먼저 헤어핀을 돌기 시작합니다!”
서준하의 윙미러로 보다 더 가까워진 제프의 차량이 보였다. 그리고,
“제프가 최대로 브레이킹 포인트를 늦추는데요오오오!!!”
모터레이싱 팬들이 열광할 만한 배경을 등에 업고, 막판 역전극의 희망을 놓지 않은 제프. 이번 시즌 오직 서준하에게만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를 뒤집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아! 좁혔습니다! 서준하에게 배틀을 신청하는 제프! 지금 이 기세라면 계속 시도해 볼만 해죠!”
헤어핀을 돌아나오자 서준하와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선두의 뒤를 바짝 추격하며 요리조리 앞차의 빈틈을 노리는데,
“제프한텐 8턴도 노려볼 만해요! 이번에도 심상치 않은데요!”
“들어가요! 다시 한 번 노리는데요오오!!!”
7턴 완만한 고속 코너를 지나 8턴으로 들어간 두 선수. 8턴 역시 90km/h 이하로 속도를 줄여야하는 저속 코너다. 제프가 다시 한번 브레이킹 포인트를 최대한 늦추며 격차 좁히기에 들어갔다.
“또 좁혔습니다! 제프, 이번 시즌 처음으로 서준하를 넘는 건가요?!”
이번 시즌 제프의 끈기와 투지를 보여주는 세션. 호켄하임링의 슈마허와 독일 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서준하를 응원하는 갤러리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13턴 진입을 두고 속도를 늦추지 않는 제프의 차량으로 시선이 쏠리는데,
“안쪽! 안쪽!! 안쪽!!!”
두 차례 레이트 브레이킹에 성공하며 자신감이 극에 달한 제프 슈마허. 왼쪽으로 꺾이는 13턴 진입에서 서준하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
뒤차의 움직임을 보고 미리 차량의 방향을 바꿔놓은 상태로 코너링 하는 서준하. 덕분에 안쪽으로 노즈를 밀어넣으려던 제프가 공간을 잃고 뒤로 물러났다.
“서준하 디펜스 성공! 상대에게 절대 안쪽을 파고들 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슬라럼을 통과하며 다시 한 번 뒤차가 추월을 시도했지만, 코너 바깥쪽에서 거리를 두고 제동을 걸었다. 차가 옆을 보게 만드는 테크닉으로 뒤차의 길목을 차단해버린 서준하. 그리고,
“어!!! 진입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제프! 제프! 제프!!!”
치열한 접전의 절정, 마지막 코너에서 다시 한 번 브레이킹 포인트를 최대로 늦춘 제프의 판단이 착오를 일으킨 듯 보였다.
“악!!!”
브레이킹이 너무 늦은 제프가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코너 안쪽으로 차를 돌리는데,
끼이이이이익.
주체할 수 없는 진입 속도 덕분에 코너 바깥으로 튀어나가버린 경주차.
휘리리리릭.
마지막 턴 바깥으로 제프가 스핀하고 말았다. 멈춰선 제프의 옆을 뒤따르던 경쟁자들이 연속해서 지나치는데,
“아아아아!!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프가 이번 시즌 최악의 사태를 맞이합니다...!!!”
모토드롬 스타디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마지막 코너. 스탠드에 일어선 독일 팬들 대부분이 머릴 감싸쥐는 순간이었다.
“뒤차를 따돌린 선두 차! 서준하는 계속 질주합니다!!!”
***
매 레이스 서준하는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알고 싶었다. 어디서 랩타임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지, 팀메이트는 무얼 하고 있는지 등등. 서킷의 정보는 레이서가 더 나은 속도를 뽑아낼 수 있기에 서준하는 항상 최신 정보를 원했다.
“지금 누가 가장 빠르지?”
하지만 또 너무 자주 방해 받기는 싫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싶었지만, 간결한 형태로 쉽게 듣고 싶었다. 그래서 엔지니어의 무전 타이밍은 중요했다. 롭은 매번 서준하의 현재 위치를 확인한 뒤 무전을 보냈고, 코너에선 결코 말을 걸지 않았다.
-준하, 너야. 이번 랩 1분 32초 545 페스티스트다
1,2미터의 정확도로 브레이킹 포인트를 찾으려고 애쓰는 코너에서 자칫하면 레이서가 브레이킹 포인트를 놓칠 수도 있다. 서준하가 빠른 건 이런 디테일까지 챙기는 전담 엔지니어와 완벽한 소통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슬슬 바꿀 때가 된 거 같은데
8랩을 돌며 점점 격차를 벌려나가는 서준하. 레이스 중반 타이어 교체를 앞두고 있었는데,
-준하야, 9랩 다시 한번 페스티스트야. 타겟 플러스 쓰리, 할 수 있겠어?
예정된 타이어 교체 시기보다 3랩을 늦춰줄 수 있냐는 롭의 주문. 계속해서 서준하의 랩타임이 떨어지지 않자, 스메들리 팀이 최대한 피트스탑 타이밍을 늦추는 전략에 들어갔다.
“플러스 쓰리? 파이브까지 해 볼게.”
프론트 그립은 아직 충분히 날카로웠고, 초반 디펜스할 때를 제외하곤 그립감은 훌륭했다. 타이어 관리에 자신감을 보이는 서준하가 롭의 무전에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지지지지지징.
[Smedley’s Radio]
“...자, 이번에는 스메들리 팀 라디오를 한 번 들어볼까요?”
2턴에 진입한 서준하. 새로운 시도로 코스를 공략한 결과를 롭에게 전달했다. 그와 동시에 중계 방송에 공개된 스메들리 팀의 무전 내용.
-롭, 2턴에서 잔디밭에 빠져도 괜찮을 듯. 예상했던 것 보다 주행 밸런스가 좋다 -copy -노면 온도 역시 생각보다 안 높아. 타이어 피크 타임이 조금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7턴에서 살짝 미끄러운 느낌을 받았어. 민수한테 전달하도록 -copy.
.
“하하, 서준하. 그냥 달리기만 했던 게 아니었군요!”
“그렇죠, 이런 정보는 팀 메이트에게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강민수의 레이스 엔지니어 맬릭에게 서준하의 서킷 피드백을 전달하는 롭. 무전 내용을 듣던 중계진의 입에서 칭찬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피드백을 적용한 강민수의 랩타임도 좋아지기 시작하는데,
“오늘 레이스 강민수가 포디엄에 오른다면, 스메들리 팀이 팀 챔피언십을 차지할 가능성은 더 높아지거든요? 이번 시즌 서준하가 팀을 챔피언 자리에 올려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실제 무전 내용을 보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피트 스탑 타이밍에 맞게 점점 더 타이어를 과하게 써가며 거침없이 질주하던 서준하. 13랩에 들어서자 곧바로 인랩 오더가 떨어졌다.
“자, 그리고 스메들리 피트가 분주해졌죠. 서준하, 드디어 들어가려나 본데요...!”
이미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새 타이어로 교체한 상황. 덕분에 서준하는 이번에도 역시 백마커들 틈을 달리고 있었다. 13랩을 마치고 피트 레인 입구에 들어섰다.
“뒤차들과 격차가 많이 벌어졌지만, 추격자들에게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죠! 마치 스메들리의 모든 경쟁자들이 이때만을 기다려왔단 듯이 좀 더 과감하게 주행하고 있습니다!”
피트 박스에 들어선 서준하. 자신의 차량으로 달려드는 미캐닉들이 보였다.
“그렇습니다. 서준하가 피트 스탑에서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요.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날아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신중해야죠!”
중계진은 물론 코치진 모두가 스메들리 피트를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서준하의 눈엔 미캐닉 크루 한 명 한 명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믿는다, 스메들리!’
스메들리 팀원들은 서준하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연습 기간 동안 긴밀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교감했다. 진정한 신뢰는 깊은 교감으로부터 나온다.
“서준하! F3 마지막 타이어 체인지에 들어갑니다!!!”
이번 시즌 피트 스탑 기록 1위를 5번이나 달성한 스메들리 피트 크루.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 믿는다, 스메들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