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안면을 터놔야 하지 않겠어요? >
부와아아아아아아앙.
대기 장소를 벗어나 할리우드 거리로 나온 서준하. 거리 전체 분위기가 엉망이 된 걸 확인했다.
‘너무 과하지도, 너무 머뭇거려서도 안 돼.’
앞선 선수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안다. 급가속을 한다거나 조작 리듬이 부자연스러워는 안 된다.
‘첫 턴은 가볍게...!’
주행로의 마지막 원형 펜스 근처로 진입한 서준하가 턴 준비를 위해 스티어링을 비틀었다.
클러치와 핸드 브레이크를 풀며 동시에 악셀을 재빠르게 밟자, 리어 휠에 락이 걸렸다.
끼이이이이이이익.
왼쪽 프론트 타이어를 중심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페라리카. 강렬한 스키드음을 뿜어내며 순식간에 엄청난 스모그를 만들어냈다.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서준하 선수가 할리우드에 나타났습니다!!!”
조금씩 경주차가 만들어내는 리듬에 몸을 맡기기 시작하는 팬들.
곳곳에서 환호가 나왔고, DJ들이 행사 음악 볼륨을 더욱 키우며 쇼런의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부와아앙.
끼이이이익.
신중하고 리듬이 끊기는 느낌이 아닌, 마치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듯 막힘이 없는 서준하의 턴.
“와우! 오늘 완전 서준하 선수의 날이군요!”
다시 턴 구역으로 들어온 페라리카가 이번에는 8자 모양을 그리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저거 봐, 저거. 하하, 쟤 지금 바깥으로 손을 흔들고 있어.”
“한 손으로 도넛을 만든다고?! 원래 스턴트 드라이버(Stunt Driver)였나?”
“하하하, 이 친구 보통이 아닌데?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다면서?”
“팬 서비스 제대로 하는군요.”
자동차 레이싱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곡예주행사들의 묘기. 콕핏 바깥으로 한 손을 내미는 드라이버의 여유가 두 사람 눈에 띄었다. 그런데,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차에 문제가 생겼나?”
도넛 도중 콕핏에서 내린 서준하가 경주차에 내리려고 했다. 좀처럼 본 적 없는 장면에 팬들의 시선이 고정되고,
‘헐리우드에선 원래 더 까불어야 하는 거야!!!’
차량 위로 올라간 서준하가 두 주먹을 흔들며 팬들의 환호를 온몸으로 느꼈다.
계획에 없는 행동에 스태프들이 살짝 당황했지만, 행사장의 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오늘 쇼런을 보여준 막누스, 마그누센 그리고 서준하 선수였습니다!!!”
쇼런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오늘 출연했던 선수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포토타임이 시작된 할리우드 거리.
“와아아아아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어우...!”
서준하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고, 그의 주위로 수백 명의 팬들이 모여들었다.
덕분에 행사 진행자들이 서준하만 데리고 포토존을 옮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드리프트는 일본에서 배웠으려나?”
“한국 출신이니까 아마 그랬을 거 같은데요?”
“보통 수준이 아니야. 그 예민한 포뮬러카를 저렇게 쉽게 돌릴 수 있다니 말이야.”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촬영하며 수많은 스턴트 드라이버의 묘기를 봤던 게리 감독. 포뮬러카와 같은 오픈 휠 경주차로 프리스타일 주행이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직접 영화사를 꾸려 시리즈를 제작 중인 빈 역시 레이싱카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는데,
“감독님, 잠깐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가죠.”
“사진?”
빈이 행사장을 빠져나가려던 감독을 붙잡고는 셀럽들에게 둘러싸인 서준하를 가리키며 웃었다.
“지금 안면을 터놔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껏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포뮬러카가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 주행으로 영감을 받은 빈 디젤이 드라이버와 귀한 연을 쌓기 위해 포토존으로 향했다.
***
“준하 선수, 여기에 잠깐 사인 좀 해줘.”
미국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 오브 디 아메리카스(Circuit of the Americas, COTA) 퀄리파잉 시작 전, 한서윤이 게러지로 들어와 서준하를 찾았다.
“아, 저기, 저쪽 카메라 보면서.”
“이게 그때 말했던 이벤트 선물인가요?”
“응, 맞아. 직관한 팬들 중에 추첨해서 줄 거래.”
챔피언을 결정 지을지도 모르는 이번 라운드. 에이전시는 많은 한국 팬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직관 티켓과 친필 사인 헬멧 등을 증정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고, 이에 한국의 여러 스폰 기업들도 참가했다.
“멀리서 오신 건데 이런 것 말고 드릴 게 더 없으려나. 흠...”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이미 PHsports랑 스폰서 쪽에서 직관 티켓이랑 선물 많이 준비했대. 무엇보다 가장 좋은 선물은 우승 소식 아니겠어?”
연승 덕분에 이제는 전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된 서준하. 그가 한국팬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단연 챔피언을 확정 짓는 일이었다.
“음... 그것도 사인해야 하죠?”
사인을 마치고 한서윤이 손에 든 헬멧을 가리키는 서준하.
“아니, 이건 준하 네 선물이야.”
노란색 바탕에 초록 라인으로 포인트를 준 특이한 헬멧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전생부터 값어치 있는 화려한 선물을 다 받아봤지만, 지금처럼 놀란 적은 없었다.
선물의 정체를 파악한 서준하가 들고 있던 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세, 세나...!”
1993년 전성기 시절 세나가 실제로 착용했던 모델. 이번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세나의 정신을 보여준 서준하의 행동에 브라질 팬들과 그 가족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응원 선물을 보냈다.
“세나의 가족분들이 직접 보내주신 거야. 너를 위해서...”
영광스러운 선물 앞에 서준하의 눈가는 금세 촉촉해졌고, 그 주위로 카메라맨들이 모여들었다.
“와아아아아아!!!”
“세나!!! 서준하!!!”
슈퍼 스크린에 세나의 핼멧을 손에 든 서준하가 등장하자, 갤러리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취재진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리포터의 상황 설명에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서준하에겐 정말 영광스러운 날이군요...!!”
전설적인 이름의 등장만으로 COTA 전체가 떠들썩해졌고, 서준하가 세나의 헬멧에 키스했다.
확실히 팬들이 무얼 원하는지 잘 아는 선수였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쇼맨십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준하가 헬멧을 들고...! 엥?!”
무언가 결심한 듯 경주차 옆으로 이동하는 서준하. 콕핏에서 자신의 헬멧을 바깥으로 빼내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됐다.
“지금 바로 쓰려는 겁니까?! 와하하!!!”
이제 헬멧의 주인은 서준하. 전시장에 보관하는 대신 오늘 예선에서 직접 착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이즈도 딱이야!’
롤모델에 대한 생각으로 감정이 깊어진 지금, 무엇보다 세나와 함께 달리고 싶었다.
자신의 머리에 꼭 들어맞는 세나의 헬멧. 승리에 대한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오늘 뜻밖의 선물로 서준하의 드라이빙 스텟이 몇 배는 올라간 것만 같군요!”
또다시 F1 역사에 남을 오늘의 이벤트. 전설의 선수가 남긴 드라이버 정신을 떠올리며 서준하가 콕핏에 올랐다.
***
“치열했던 Q1, Q2를 뚫고 살아남은 10명의 선수들...! 이제 내일 레이스 스타팅 그리드를 정하기 위한 마지막 퀄리파잉에 들어갑니다!”
Q3 탈락자와 1위 기록이 1초도 채 되지 않았던 Q2. 치열한 접전 끝에 Q2가 마무리되며 새롭게 타이어를 교체한 Q3 진출자들이 피트 레인으로 등장했다.
“Q1, Q2 가장 빠른 기록을 냈던 서준하! 이번에도 시작과 동시에 피트 레인을 뛰쳐나옵니다!”
“이번 라운드 서준하보다 부담감이 큰 선수는 없을 텐데요. 전혀 긴장한 것 같지 않습니다. 챔피언을 눈앞에 둔 선수 같지 않아요, 자신감이 넘칩니다!”
마치 반전을 꾀하려는 경쟁자들의 사기를 꺾어버리겠다는 듯, 서준하는 앞선 예선과 같이 가장 먼저 피트를 나서며 일찍이 Q1, Q2 폴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로이스, 출발하도록!
“Copy.”
경쟁자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밀턴도 피트를 나섰다.
피트 레인에 오르는 동안 COTA의 커다란 슈퍼 스크린으로 아웃 랩을 달리는 서준하의 페라리카가 등장했고, 해밀턴은 좀처럼 한 군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드라이버가 착용한 노란색 헬멧. 해밀턴은 세나의 굉장한 팬이였고, 세나는 그의 우상이었다.
경매에 나온 세나의 물품을 모두 수집할 만큼 애호가였던 해밀턴. 이번 시즌 WDC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이제 막 F1에 들어온 신인이 세나의 뒤를 잇는다는 반응들에 더욱 씁쓸했다.
-로이스, 아웃 랩 마지막에 코스 돌파 속도를 높이도록. Q1, Q2 스타트 속도가 늦었었어.
“...”
마지막 코너부터 랩타임이 측정되기 시작하는 스타트 라인까지의 거리가 짧은 COTA의 특성상, 아웃 랩의 후반부부터 속도를 높이라는 오더가 내려졌다.
-로이스?
“크흠... 오케이, copy.”
아웃 랩을 돌며 생각에 잠겼던 해밀턴이 뒤늦게 답변을 보냈다.
“아! 서준하 섹터1 고속 슬라럼에서 차량 제어가 안정적이었습니다!”
해밀턴이 백스트레치를 빠져나갈 때쯤 서준하는 첫 번째 플라잉 랩을 달렸다.
“섹터2 시작 랩타임도 괜찮고요. 첫 플라잉 랩부터 기대해봐도 좋겠는데요...!”
성공적으로 COTA의 초반 난코스들을 돌파하며 팬들의 기대를 끌어모으는 서준하. 단순한 가속 구간에 들어서며 순식간에 속도를 끌어올렸다.
“서준하의 다운 시프트 속도가 굉장합니다! 이제 마지막 코너만 통과하면...!”
복잡한 멀티 에이팩스 세션을 섬세한 페달링으로 빠져나오며 COTA의 마지막 20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아! 해밀턴도...!!!”
서준하의 앞으로 보이는 또 한 대의 경주차. 홈스트레이트에서 속도를 높이려는 해밀턴의 경주차도 20턴 돌파에 뛰어들었다.
“해밀턴은 서준하를 못 본 건가요?!”
“위험해요!! 서준하! 서준하는 안쪽으로 파고드는데요...!!!”
이제 플라잉 랩을 시작하려는 해밀턴과 플라잉 랩을 마치고 최종 기록을 확인하려는 서준하.
두 선수가 20턴을 나란히 진입했다. 그리고,
쿵.
“아!!!”
“충돌!!!”
속도를 줄이며 20턴 헤어핀을 돌던 두 대의 포뮬러카가 부딪히고 말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멈췄습니다! 엔진이 꺼진 건가요?!”
충돌과 동시에 코너 바깥으로 밀려 나간 두 대의 차량. 속도가 급격히 줄어든 레이싱카들이 20턴 바깥 런오프에 멈춰섰다.
“아! 두 선수 아직 Q3 기록이 없는데요! 아쉽습니다!”
심각한 사고는 아니었지만, 퀄리파잉 리타이어로 본선 레이스가 치명적일 것으로 보였다.
“일어납니다... 해밀턴이 차밖으로...!”
재시동이 걸리지 않자, 해밀턴이 콕핏을 박차고 나왔다.
사고 지점으로 달려온 마샬들이 런오프 주변으로 차량을 움직였다. 그런데,
“아!!!”
마샬들을 향해 손짓하는 서준하가 중계 화면에 등장했다. 무언가 지시를 내리자, 마샬들이 경주차를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바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페라리카. 모래 먼지를 휘날리며 잔디밭을 빠져나오는 장면이 슈퍼 스크린에 등장했다.
< 지금 안면을 터놔야 하지 않겠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