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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8)화 (8/90)

<8화>

‘역시 다미안 마탑주에게 파트너 제의를 한 건 백번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어.’

헤어진 연인들이 가장 걱정한다는 건국제는 오히려 내게 통쾌한 쪽으로 잘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숙제가 있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오늘 오신다고 합니다.”

영지에 내려가 있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래, 오실 때까지 좀 쉴게. 도착하시면 알려 줘.”

아버지한테는 여태까지 폴리우스 때문에 잘못한 게 많아서 차마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영지에 내려가신 상태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다.

그날 오후에 도착하신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려고 1층 다이닝으로 내려가는 길,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비틀거렸다.

‘아, 또 다리가.’

요즘 들어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교 모임에서는 그래도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어제 무도회에서는 구두를 신고 서 있었더니 다리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리가 평소 상태와 달랐다.

“걷는 것이 힘들어 보이니 도와주마.”

“아버지……”

마중 나오신 모양인지 계단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시더니 나를 부축했다.

옆에 있던 하녀와 하인들이 아뿔싸 하는 얼굴로 당혹스러워했지만, 이건 그들의 근무 태만이 아니었다.

일부러 치맛자락이 풍성한 옷을 입어서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걸 아버지께 들키지 않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옆에 있던 하녀도 눈치채지 못한 걸 아버지는 기민하게 눈치채신 것이다.

‘역시 딸 사랑이 지극하셔.’

든든한 아버지의 품에 기대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아픈 걸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영지에서 쉼 없이 달려오셨을 거고, 지금은 늦은 저녁이라 피곤하실 거다. 그럼 내일 봐도 괜찮을 텐데 어디 다녀오면 나부터 찾으시니 원.

“요즘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진 모양이구나. 어제 꼭 영지에 있을 필요만 없었다면 네게 건국제에 가도록 무리시키지 않았을 터인데……”

“아니에요. 저도 가끔은 무도회에 가고 싶은걸요.”

“폴리우스 영식이 없는데도 말이냐?”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나는 조금 멈칫하다가 다시 웃어 보였다.

“아아, 직접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들으셨군요.”

“지방까지 소문이 자자해서 모를 수가 없더구나. 그 이야기를 내가 남에게 전해 들어야 하느냐.”

서운해하는 말투면서도 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은 끝까지 다정하다.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나를 의자에 앉힌 후에야 자리에 앉으셨다.

“물론, 너도 다 컸으니까 생각이 있겠지만. 헤어지기 전에 먼저 말해 줬으면 이 아버지가 걱정을 덜 했을 거다.”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헤어지겠다고 예전부터 생각한 건 아니어서요.”

나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그 대접을 받으면서도 폴리우스를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요즘 네가 진통제를 복용하는 양이 늘었다고 들었다. 헤어지는 건 괜찮다만 네가 아플까 걱정이구나.”

“…….”

“하지만 몸보다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나뿐인 딸에게는 전혀 책망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폴리우스 주변에 여자가 있나 싶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덕분에 가문의 명성을 깎아 먹고 악녀 소리까지 들었는데도 참 쉽게 이해해 주신다.

‘내게는 항상 무르셨지.’

아버지는 폴리우스가 원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여자인 나를 놓친 폴리우스는 어리석은 놈이라고 화를 내셨다.

“그 자식이 약혼녀가 엄연히 있는데도 여러 여자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더구나. 파혼은 신경 쓰지 말아라. 이 아버지가 다 해결해 주마.”

아무리 우리 가문이 공작가라지만 파혼이 가벼운 일은 아닌데 큰소리를 떵떵 치신다.

“사랑하는 우리 딸. 너는 네 건강만 신경 써라.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야.”

“다행히…… 파혼에 관해서는 생각해 둔 바가 있어요.”

여기엔 대책이 있었으므로 나는 바로 대답했다.

“다미안 마탑주가 아직 벨데르트 가문 명부에 있으니 상대를 바꾸면 폴리우스와 약혼은 쉽게 해결될 것 같아요. 요즘 그분과 교류가 있거든요.”

“네가 해결 방안을 생각해 왔으니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구나. 그런데 그렇다고 다미안 마탑주와 오래 안 것 같지도 않은데, 약혼이라니……”

“다행히 말씀이 잘 통하는 분이셔서 상대가 바뀐 후에는 파혼에 동의해 주시겠대요.”

물론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어쨌든 아버지는 내 건강이 더 중요한 분이셨으므로 그냥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특해하는 눈빛을 바라보면서 나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가주로서 파혼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텐데도 아버지는 나만 생각하시네.’

하지만 난 이런 아버지께 아플 때 폴리우스와는 다르게 해 준 것도 없다고 대들었다.

어머니가 남긴 상단을 다 날려 먹고는 사과도 하지 않고.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거니까.’

어머니의 유산인 상단을 지켜 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폴리우스에게 몰두하느라 예전 같지 않은 상단을 그때처럼, 아니 훨씬 더 훌륭한 상단으로 키워 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폴리우스가 내 이름으로 진행한 대출부터 해결해야겠지.

“아버지…… 항상 감사합니다.”

“허허, 파혼한다고 네가 많이 죄송한가 보구나?”

“그냥, 그것뿐만이 아니라요. 저어, 그리고……”

나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차마 마주 보고 할 자신은 없어서 눈은 질끈 감고서.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말을 해 드린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볼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얼굴에 열이 너무 올랐는지 좀 어지럽거든!

아주 어릴 때나 아버지께 하던 말을 오랜만에 하게 된 건…… 그냥, 내가 아버지께 받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건지 알 것 같아서.

또,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받기만 했었다는 게……

“이런…… 네가 오늘 큰 선물을 주는구나. 나도 사랑한다, 딸아.”

잠시 굳었던 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창밖으로 지는 노을 한 줄기가 아버지의 얼굴에 쏟아졌다.

“멜라니, 모쪼록 너는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항상 너의 편이다.”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광경이었다.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건국제 무도회 이후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다미안 마탑주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화려하게 치장했던 무도회 때와는 달리 이동성을 고려해 경쾌한 차림으로 나섰다.

다미안 마탑주 역시 저번 무도회 때보다는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폴리우스랑 만날 때는 멀리서 찾기 힘들었는데…… 낯설다……’

키가 큰 미남이 눈과 몸의 피로를 덜어 주는 존재일 줄 전혀 몰랐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다시 만난 다미안 마탑주는 여전히 훤칠한 얼굴로 내게 마주 인사를 건넸다.

“저도 일찍 온다고 했는데 마탑주님이 더 일찍 오셨네요. 기다리느라 지루하진 않으셨나요?”

“아니요. 영애가 마력석 광산을 가지신 게 맞다면, 왜 그 이야기를 제게 먼저 말해 주신 건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마력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다미안 마탑주와 사업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좋은 제안이 들어왔으면 왜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 따져 보는 게 맞지.

‘마탑만큼 마력석을 잘 써먹을 수 있는 곳도 없을 텐데 참 침착하네.’

나는 다미안 마탑주와 손잡기로 한 이유를 다시 떠올리며 대답했다.

“전 마력석 판매 그 이상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이상이라면 마력석으로 어떤 사업이라도 생각하신단 소리이십니까?”

오, 다짜고짜 핵심을 찌르고 들어온다.

마력석의 가치는 이루 말할 데 없다.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까지 마법을 쓰게 해 주는 희대의 물건이니.

‘마력석은 마법 아티팩트 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

마법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데에는 역시 마법사가 여럿 소속되어 있는 마탑이 제일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 아티팩트 산업은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마물 토벌로 인해 대부분의 마법은 공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그건 마물 토벌이 마무리된 지금에도 그랬다.

귀족들이 호신용 아티팩트를 가보로 물려받고, 굉장히 큰 행사에서나 마법 아티팩트를 볼 수 있는 정도.

귀족이 아닌 경우에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마법 아티팩트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마법의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한데 생활 분야는 거의 연구가 안 되다시피 한 거다.

‘하지만 난 마력석 광산을 가지고 있는 데다, 그걸 효율적으로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알 것 같거든?’

그리고 나는 그 파트너로 다미안 마탑주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번 마법 아티팩트 산업을 성공적으로 키운다면 마법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 테니.’

벨데르트 백작이 그간 한 짓이 있음에도 아직 다미안 마탑주가 아들입네 하고 지껄일 수 있는 건, 이 남자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다미안은 마탑주가 된 것으로는 아버지가 자신을 놓친 걸 뼈저리게 후회할 정도의 성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는 분명 지금 이상의 명예와 성공을 바란다.

그리고 내게도 상단을 키우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채굴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력석 광산임을 아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영애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흐음, 영업 비밀이라 말씀해 드릴 수는 없어요.”

소설에서 마력석 광산인 걸 알았거든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나와 마탑주는 마차를 통해 내가 매입한 광산으로 향했다. 수도 근교라서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여기가 제가 매입한 광산이에요.”

“채굴한 지 꽤 오래된 광산으로 보입니다만……”

“사람들은 금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달라요. 그걸 확인해 보셨으면 하는데요. 제 이야기는 그 이후부터 시작될 거라서.”

“무엇을 보고 그리 확신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미안 마탑주가 가져온 장비는 빈틈이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을 믿는다는 이야기다.

우웅-

곧 다미안 마탑주의 마력이 검사 장비에 흘러 들어가자 내게도 들릴 만큼 진동이 울렸다. 그의 눈동자 색과 꼭 같은 붉은빛의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기사 몇 명은 흔치 않은 마법에 불안한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나는 그 붉은빛이 행운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다미안 마탑주는 눈을 감았다.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호위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내 행동보다 다미안 마탑주의 말이 더 빨랐다.

“정말이군요.”

채굴하기도 전의 마력석이니 땅 안에 묻혀 있고, 아무리 마탑주라고 해도 금방 알지는 못할 텐데……

“그 짧은 시간에 마력석 광산이라는 걸 판단해 냈단 말인가요?”

“금을 채굴했던 금광인 터라 전부 꽉 막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칭찬에 딱딱하게 대답한다. 조금은 잘난 척을 해도 될 텐데 말이야.

검사 장비를 사용해도 가공되지 않은 마력석의 마력을 알아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괜히 이 사람이 마탑주까지 한 건 아니구나.’

어쨌든 광산에 마력석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해야 할 말들이 아주 많다.

“어떠세요? 당분간은 저랑 좀 만나셔야 할 것 같죠?”

“확실히 짧은 이야기가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마탑에 가서 찬찬히 이야기해 보시겠습니까?”

“그것도 좋지만 오늘은 제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나는 싱긋 웃으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수도의 카페 거리를 말했다.

여기에는 내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는데, 나와 다미안 마탑주가 사이좋은 모습을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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