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27)화 (27/90)

<27화>

나는 저녁때 내 사무실에서 보이는 풍경을 참 좋아한다.

담홍색의 색채가 번져 가는 오묘한 빛깔의 하늘.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 나무가 만들어 낸 긴 그림자.

한동안 분위기에 젖어 있던 나는 나지막한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마르티스 영애가 보낸 편지를 다시 한번 꺼냈다.

‘아무래도 통곡은 내가 아니라 폴리우스가 하게 될 것 같은데.’

나는 폴리우스가 사전 조사도, 사업 계획도 없이 건물을 팔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식 웃었다.

마르티스 영애에게 부추겨 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게 성사될 줄은 몰랐다.

[이미 제국의 어지간한 콘텐츠들은 클로틸드 영애와 독점 계약이 되어 있는데, 그런 것조차 확인하지 않고 뛰어드는 게 정말 바보 같다니까요.]

그리고 건물을 팔기로 하면서 벨데르트 극단을 해체하기로 했다 한다.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은 그럼 이제 갈 곳이 없어지겠네?’

나는 다미안 마탑주의 사무실로 가, 사람을 물리고 이 사실을 알렸다.

“벨데르트 극단이 해체된다면, 그 인력을 검은 달에 영입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

그의 눈동자에 잠깐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건 혹시 저를 배려한 선택입니까?”

이내 다미안 마탑주는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다른 곳에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한꺼번에 영입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지금 접촉하는 게 낫겠죠.”

“……능력이 있는 건 맞습니다.”

다미안 마탑주는 짧게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단순히 눈앞의 남자를 배려해서 극단 사람들을 영입하는 건 아니었다.

‘폴리우스는 환경이 좋아서 <13번째 기사>가 잘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이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데. 괜히 제국에서 첫 번째로 꼽히던 게 아니라고.’

지금은 검은 달에 관심이 쏠려서 관객이 줄었을 뿐,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다시 치고 올라왔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영상석 사업을 시작했는데, 굳이 극단을 영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앞으로 영상석의 시대가 올 테니 극단은 돈이 안 될 거라는 게 일반론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뇨, 전에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지금은 기존의 연극을 단순히 영상석에 담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시기가 분명히 올 거라고요.”

내가 입을 열자 다미안 마탑주의 의혹 섞인 눈빛은 곧 수긍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저희는 뛰어난 인력이 필요해요.”

내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미안 마탑주는 금세 내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이전에 검은 달에서만 볼 수 있는 영상물을 자체 제작하고 싶다고 하셨죠.”

다미안 마탑주는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렇다면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이 제일 적합할 겁니다. 마침 시간이 비니, 함께 가시죠.”

“어머나.”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동의해 주신 건 감사한데, 영입 제안을 하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닐까요.”

“아……”

다미안 마탑주는 머쓱해져서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다미안 마탑주가 부끄러운 듯 말을 이었다.

“극단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제안을 건네야 한다고 했던 건 클로틸드 대표님이십니다.”

“이야, 우리 마탑주님께서 마음이 급하셨나 보지요? 뭐, 극단이 해체된다는 소식에 심란한 사람들이 술을 먹기엔 딱 적당한 시간이기도 하죠.”

나는 싱긋 웃으며 다미안 마탑주가 열었던 문을 다시 잡았다.

“그럼 그분들이라도 만나러 가실래요?”

“……알겠습니다.”

다미안 마탑주는 나를 한 번 보더니 장난기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따라서 문을 잡는 그사이에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짧은 시간, 다미안 마탑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클로틸드 대표님께서는 짓궂으시군요.”

평소에 듣기 좋다고 생각하던 저음이 귓가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다미안 마탑주는 내게 속삭인 뒤 바로 몸을 움직여 저 앞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건 나 하나뿐이었다.

“어……”

문을 잡고 있던 찰나의 시간에 이뤄진 귓속말일 뿐인데, 뭔 여운이 이렇게 길담.

나는 숨소리가 닿았던 귀를 매만지다가 퍼뜩 생각했다.

아니, 방금 다미안 마탑주야말로 나를 거하게 골탕 먹인 거 아니야?

* * *

어제저녁, 떠들썩한 주점에서 조연출을 만난 나와 다미안 마탑주는 오늘은 반대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호수로 향했다.

벨데르트 극단 해체 통보를 받은 후, 은퇴를 선언하고 숨어 버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곳까지 오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고 선선한 기온, 푸르른 나무가 뜨거운 햇빛을 가려 쾌청한 공기.

중년의 한 남성은 호숫가에서 외롭게 낚싯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와 다미안 마탑주는 낚시보다는 거의 졸고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아니,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우리의 발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이 사람은 벨데르트 극단을 대표하던 연출가, 칠렌이었다.

“주변 분들에게 물어봤더니, 요즘 이 근처로 산책을 자주 오신다고 해서요.”

“쥘브르 놈이 가르쳐 준 겁니까?”

어제저녁에 만난 조연출의 이름이다.

칠렌 연출가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떡 벌렸다.

“다, 다미안 도련님?”

“이제는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왜 이런 곳까지 직접……”

다미안을 본 칠렌 연출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극단을 운영하던 가문의 도련님이었으니 좀 더 와닿는 게 큰 모양이다.

‘소년에 불과했는데도, 마탑주님이 가문에 있을 때는 가장 극단을 챙기는 사람이었다고 했던가?’

하지만 놀라던 것도 잠시, 칠렌 연출가는 도로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제 연극과 관련된 일은 안 할 겁니다.”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네, 하지 마세요.”

“……!”

다미안 마탑주가 당황했는지 바로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평소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함께 일하다 보니 이제는 나도 조금 이 사람을 알겠다.

‘칠렌 연출가를 꼭 영입할 거라고 하던 내가 이런 말을 하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겠지.’

물론 당사자인 칠렌 연출가는 더 놀랐다. 그는 두 눈을 멍하니 껌뻑이다가 되물었다.

“그렇게 순순히 돌아갈 거면 왜…… 아니, 알아들으셨으면 됐습니다. 그럼-”

“사실 제가 만들려는 건 연극이 아니라 ‘영화’거든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극장이 필요 없는 영상을 전 영화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연극을 극장이 아니면 어디에 상영한답니까?”

“에이, 이제는 영상물을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시대는 지났잖아요.”

그제야 상대는 내가 요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클로틸드 영애라는 걸 상기한 모양이었다.

“연극도 물론 좋지만, 극장 밖에서 더 넓은 무대를 배경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떠세요?”

게다가 마법으로 만든 촬영 장비는 색다른 시도를 하기 좋을 것이다.

즉, 훌륭한 연출가와 뛰어난 장비가 있으면 벨데르트 극단의 <13번째 기사>보다 훨씬 뛰어난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거다.

물론 검은 달에도 도움이 되는 콘텐츠겠지.

“아아, 다양한 시도를 누구보다 하고 싶어 하던 분이 계셨는데. 정작 지금 이런 장비를 만져 보지도 못하고 있으시니.”

“그분이 누구신데요?”

“아마 아실 텐데, 그 연출가님은 그 유명한 <13번째 기사>도 하셨거든요. 그분이 다시 연출을 하도록 꼭 설득해 주십시오. 벨데르트 극단이 해체된다는 소식에 많은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예 연출을 안 하시겠다고 했지만……”

벨데르트 극단을 최고로 만든 데 기여를 한 칠렌 연출가는 자신이 원해서 극단을 그만둔 게 아니다.

분명 연출에 대한 미련이 있다.

“벨데르트 극단이 해체될 거라고 발표된 이후로 연출가님이 많은 회의감이 드셨을 건 알아요. 하지만 한번 저희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어요?”

나는 그가 혹할 만한 설명을 준비해 왔다.

‘전에 들은 말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자신만만하지는 않았겠지.’

다미안과 방문했던 영상 제작 현장에서 벨데르트 극단 이야기를 꺼내 괜히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던 사람.

그때는 왜 폴리우스의 전 약혼녀인 나와 벨데르트 성을 버리겠다고 한 다미안 마탑주 앞에서 벨데르트 극단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는데 지금은 참 도움이 됐다.

덕분에 어제저녁에 만난 조연출에게 칠렌 연출가에 대해 물어볼 수 있었거든.

내가 연출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조연출은 흔쾌히 이 장소를 알려 주었으니까.

본인은 부정해도, 옆에서 칠렌 연출가를 지켜봐 온 사람들은 다 아는 거다.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나설 차례가 아니지.’

내가 눈짓을 하자, 다미안 마탑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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